2부. 75화
“저게 무슨……!”
놀랍게도 킨만은 거인을 처음 보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는 거대종 보다도 커다란 거인의 실제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라훔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지킬 필요가 없겠군.”
“크으윽!!”
라훔이 입을 열자 몰려든 플레이어 모두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렸다.
그저 평소보다 목소리를 좀 더 높였을 뿐인데 압도적인 덩치 차이에서 발생한 데미지였다.
물론 헨리와 클레버, 넬바프의 거인들은 멀쩡했다.
헨리가 비틀거리는 킨만에게 다가가 말했다.
“조약은 너희가 먼저 파괴했다. 그러니 지금부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겠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모두들 준비해!”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
킨만은 이를 부득 갈며 에테르를 활성화시켰다.
동시에 부하들과 미리 준비해 온 거인 사냥 플랜을 발동시켰다. 필요하다면 아이템도 전부 사용할 생각이었다.
생각은 그렇게 했다.
그들에게 집채만 한 몽둥이가 떨어지기 전까진.
콰아아앙!!
한 번의 매질.
라훔의 철곤이 작렬했다.
그리고 다시 철곤이 들어 올려졌을 때, 그 아래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길고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절대로 만들지 못할 규모의.
다행이라면 그 일격에 휘말린 플레이어가 없다는 것.
당연했다.
일부러 빗겨 친 거니까.
“딸꾹!”
딸꾹질 소리.
킨만의 것이었다.
헨리가 물었다.
“계속할 건가?”
“…아, 아니.”
“말이 짧군.”
“아, 안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삼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
“…….”
곤돌라의 블랙룸.
삼강의 수장들이 모여 회담을 나누는 프라이빗한 공간.
소유주는 따로 있었지만 사실상 세 사람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오늘, 블랙룸에는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헨리가 참석했기 때문이다.
레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킨만과 페트로를 쳐다보았다.
헨리도 이따금씩 흘겨보았다.
원래라면 헨리를 보자마자 날뛰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거인들 때문이었다.
헨리가 말했다.
“천년전쟁을 준비하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대답은 페트로가 대표로 했다.
“오늘부로 천년전쟁은 폐지다.”
“예?”
“뭐?”
“뭐라고?!”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란 반응들을 보인다. 하지만 헨리는 단호했다.
“왜? 불만 있나?”
“아, 아니 그게…….”
“그래도 룰이라는 게 있는데….”
“하…….”
곳곳에서 들리는 탄식 소리.
그럴 만도 했다.
여지껏 천년전쟁을 위해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폐지됐으니까. 그러나 큰 목소리로 항의하지 못했다.
천년전쟁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이었으니까.
헨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룰?”
“예?”
“천년전쟁이란 룰을, 누가 만든 거냐고.”
“그게…….”
헨리의 물음에 킨만과 레반이 페트로를 보았다.
이중 그나마 잡지식이 많은 게 페트로였으니까.
하지만 페트로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천년전쟁은 역사가 오래된 제도로 페트로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존재했으니까.
“모르지?”
“…….”
“누가 만든지도 모를 룰에 겁먹어서 지키려는 꼴이라니…… 시스템 알림에 뜨지 않았다면 지킬 필요가 없는 룰이다. 게다가 천년전쟁이란 것 자체가 상층민이 되기 위한 싸움인데 왜 상층민 말단의 입맛에 맞추려는 거지? 상층에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덤비면 될 터인데.”
“그게…….”
“그걸 누가 몰라서 안 합니까?”
대답하려던 페트로 대신 폭발한 건 레반이었다.
“상층민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놈들은 강합니다. 그래서 중층민들이 힘을 합쳐 싸우려는 거고. 아무것도 모르…….”
“어이가 없군.”
“뭐요?”
“그러니까 넌 지금 네가 약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잖아? 천년전쟁이 아니면 놈들에게 감히 도전도 못 해볼 정도로. 그런 주제에 여기선 왕 놀이나 하며 살고 있었나?”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본연의 살기와 아우라, 에테르까지 조금도 갈무리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풀어냈다.
“강자에겐 덤빌 생각조차 못하고 자기보다 약한 존재들…… 심지어 자신의 부하였던 자들을 세뇌하고 착취해 스스로의 가치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약해 빠진 네놈이 여태 해 온 짓거리지. 그런데 뭐? 힘을 합쳐?”
헨리가 레반에게 조금씩 다가갈수록 레반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치다 못 해 결국 의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헨리는 그런 레반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클레버를 생각하면 네놈은 지금 당장 갈아 마셔도 모자라지만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 주었으니 한 번은 봐주지. 그러니 부디 찍소리하지 말고 찌그러져 있는 게 좋겠어.”
“…예, 예.”
고개 숙이는 레반.
헨리는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난 얼마 뒤 상층에 도전할 것이다. 천년전쟁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룰을 지킬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흰 필요 없다.”
“……!”
“예?!”
헨리의 말은 계속됐다.
“난 내 거인군단과 함께 상층을 밀어붙일 것이다. 그리고 상층의 수문장 자리도 꿰찰 것이고. 아, 물론 중층에도 거인들을 남겨 두어 중층을 지배할 것이다. 우리의 불가침조약은 너희가 깨 버렸잖아?”
그 말에 페트로와 킨만의 눈이 확장됐다.
킨만이 말했다.
“그. 그럼 저흰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예?”
“여긴 탑이야. 중층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탑의 본질을 잊은 모양인데 애초에 어비스가 안전과 밥그릇을 보장해 주던 곳이었던가?”
“그, 그럼…….”
“그건 이제 너희가 알아서 해야지. 우리에게 더 이상 불가침조약은 없다. 내 거인들은 중층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며 필요하다면 너희들을 사냥하겠지. 그러니 그런 불상사가 생기고 싶지 않다면 넬바프의 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 숨어 살아 봐.”
헨리의 말이 끝났을 때 세 사람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일이 심각해질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심각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건 페트로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킨만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사태 파악을 못 한 건 레반뿐이었다.
헨리가 되물었다.
“무얼?”
“저희는 헨리 님만큼 힘도 없고 개개인이 상층에 도전할 만큼의 역량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그럼 군대든 잡일이든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 말에 그제서야 레반도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치고 무릎을 꿇었다.
상처 때문에 무릎과 다리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 모습에 헨리가 눈만 아래로 내려 그들을 보았다.
헨리가 대답하지 않자 그들은 결국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에 헨리는 그제서야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협상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바닥에 이마 붙인 세 사람을 얼마간 바라보던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흰 나와 내 군대에게 무얼 해 줄 수 있지?”
“그건…….”
“내가 말해 주지. 이십억 어비스 포인트를 가져 와.”
“예?”
“나와 협상하고 싶다면 계약금으로 이십억 어비스 포인트를 가지고 와라. 그럼 최소한 너희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 주지.”
“그, 그게 무슨!”
“왜? 못하겠나? 그동안 편히 살아왔으면서 겨우 이 정도도 내지 못하면 그냥 죽어야지.”
“…….”
헨리의 말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할말은 이게 끝이었다.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흘 주지. 사흘 안에 이십억 포인트를 내지 않는다면 중층에 사는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이 금액은 깎을 수도 없고 그 어떤 형태로든 협상할 수도 없다. 너희 모두가 살고 싶다면 편 가르기는 그만하고 함께 모금이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말을 마친 헨리가 밖으로 나왔다.
*
이십억 포인트는 헨리가 말한 사흘 중 정확히 이틀 만에 모두 모금되었다.
이십억 포인트는 페트로가 모두를 대신해 전달해 주었고 전달 자리에는 헨리와 라훔, 그리고 게덤이 함께했다.
헨리는 페트로가 보는 앞에서 허멀트를 불러 생존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해 주었다.
헨리는 계약서 몇 부를 복사해 자리에 참석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페트로가 사라진 뒤, 남은 이들끼리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십억도 황당한데 이십억 포인트라니…….”
라훔과 게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헨리는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십억 포인트도 적게 부른 거지. 여기 있는 사람이 몇 명인데.”
“하지만 요새 전체를 옮기는데 드는 비용은 십억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사만 할 생각은 아니잖아? 정착 이후에도 필요한 건 많아. 그것들을 해결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차원상을 상대로 어비스 포인트를 쓰는 거고. 그렇지, 허멀트?”
“물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중층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거래는 모두 제가 독점하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죠?”
“물론.”
이로써 허멀트와의 약속을 지켰다.
헨리가 물었다.
“이사는 언제부터 가능하지?”
“요새만 비워 주시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합니다. 어차피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스킬로 하는 거라서요. 아, 그전에 이사할 곳은 선정하셨나요?”
그 물음에 헨리가 라훔과 게덤을 보았다.
“넬바프가 있는 곳으로 옮길 생각이다. 이왕 옮기는 거, 조금이라도 유서 깊은 곳이 나을 것 같아서.”
“그렇군.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꼭 지켜야 한다.”
“중층 대도시에 우리 지부를 만드는 것 말이지?”
“그래. 어쨌든 플레이어들에겐 거인들이 새로운 지배종처럼 보여야 하니까.”
사람은 간사해서 감시자가 없으면 나태해지고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층의 각 대도시마다 거인들을 상징하는 지부 건물을 둘 계획이었고 그곳은 곧 허멀트가 운영할 상단 건물로도 쓰일 계획이었다.
관리는 넬바프의 거인들이 맡기로 했다.
아무래도 요새의 거인들보단 모종의 이유로 작아진 거인들이 활동에는 더 용이할 테니까.
라훔이 말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군.”
“하나뿐이지. 그래서 말인데, 준비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전군을 모은다면 육천까지도 소집이 가능하다.”
“요새 인구가 구천이 좀 넘는다 들었는데 병력 비율이 상당하군.”
“우리들은 모두가 전사니까.”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육천까지는 필요 없어. 삼천 정도로 하지.”
“알겠다. 그럼 상층에는 언제 도전할 생각인가?”
그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헨리에게로 모인다.
그에 헨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틀 뒤로 하지.”
“이틀인 이유가 있나?”
“더 데려갈 자들이 있거든.”
“더?”
“그래.”
그 말에 헨리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