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4화
“거인이 아니라니?”
헨리의 되물음에 게덤은 물건을 훔친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듯 천천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린…… 아주 오래 전에 저주를 받았네. 선조께서 브리타니아 님을 저버리고 중층으로 이주해 오시고 몇 년 뒤, 우리들은 모두 몸이 작아지는 저주를 받았네.”
“어떻게 저주라고 확신하는 거지? 저주라면 저주를 건 자가 있을 텐데?”
“모르네. 사실 우리 이게 저주인지 병인지도 몰라. 우린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된 거니까. 그럼에도 저주라고 한 건 우리들이 그리 생각하기 때문이네.”
“그럼 불가침조약을 맺은 건…….”
그 말에 게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께서 우릴 보호하기 위해 맺으셨던 것 같군. 어쨌든 우리가 중층으로 이주해 왔을 땐 중층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들이었으니까.”
헨리는 잠시 침묵했다.
요새에서 봤던 거인들은 용맹하고 의리 넘치는 전사들 그 자체였는데 이곳의 거인들은 자신이 본 것들과는 완전히 반대 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헨리는 엘리혼을 사냥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전사의 후손은 전사의 후손인가 보군. 덩치는 작아졌어도 아이들이 엘리혼을 사냥할 정도니.”
“…부끄럽네.”
“하지만 명예는 되찾을 수 있는 것이지.”
“그게…… 무슨 말인가?”
헨리의 말에 게덤이 다시 고개를 든다.
말 그대로였다.
헨리는 이들의 키가 작아졌다고 해서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설령 실망했다고 한들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다.
헨리가 필요한 건 이들 자체지 이들의 키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헨리는 그들의 키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뭐가 됐든 만악의 근원을 꼽으라면 어비스일 테고 어비스에게 상처받은 자들의 상처를 긁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야. 그동안은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모른 척 해 왔지. 아래층과 대화할 수가 없어서, 선조들이 그랬기에, 이곳을 나갈 수 없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서…… 하지만 이젠 진실을 알게 됐잖아?”
“그건…….”
“이곳의 평화가 영원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라, 촌장.”
헨리의 말에 게덤의 눈이 커졌고 헨리의 말은 계속됐다.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은 매일같이 중층을 방문한다. 그중 전에 없던 강자가 나타나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너희들을 사냥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게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걱정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렇기에 매일같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군사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허나 헨리는 그 또한 간파했다.
“설마 군사 훈련을 하고 있다는 말로 변명할 생각은 아니겠지? 촌장. 당신이 전사라면 전사답게 행동해라. 지금 당신의 모습은 전사가 아니라 꼭 겁쟁이 같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헨리는 팔짱을 낀 채 무거운 눈빛으로 게덤을 내려다보았다.
게덤은 고개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촌장의 위엄?
자존심?
거인으로써의 심층부에 해당하는 에고를 강타 당했는데 어찌 강짜를 부릴 수가 있을까.
심지어 구구절절 다 옳은 말들뿐.
침묵 끝에 게덤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해 줬으면 하는가?”
“무언갈 해 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너희들의 의지지. 분단된 일족과 하나 되겠다는 의지.”
그 말에 게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의지라면 충분하다. 그대의 말마따나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을 테니. 그럼 자네는 우릴 어떤 식으로 하나로 합치게 할 생각인 건가?”
게덤의 물음에 헨리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방법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윽고 설명이 끝났을 때 게덤이 입을 반쯤 벌린 채 감탄했다.
“그런 방법이 가능하다니……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비스 포인트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대가?”
“그래.”
그때였다.
- 주인님.
클레버가 급히 영성을 전해 온 건.
- 왜 그러지?
- 좀 전에 혁명군에서 경고가 왔습니다.
- 경고?
- 어딜 가든 끝까지 추적할 테니 벗어날 생각 말라더군요. 그리고 곧 얼굴을 보자고……
- 그래?
그 말에 헨리는 픽 웃었다.
미끼를 던진 대로 덜컥 문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알겠다, 슬슬 준비하마.
- 예.
녀석들이 클레버의 위치를 아는 이유에 대해선 모른다.
어떤 스킬 같은 장치를 해 두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리티와 하문이 어떻게 단번에 클레버를 쫓아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집요함과 무서움이 있기에 중층에 올라온 플레이어들은 웬만해선 삼강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여태까진 하층로와 중층로라는 좋은 회피 수단이 있었지만 상층으로 가기 위해선 천년전쟁 이외엔 방법이 없었으니까.
‘뭐, 천년전쟁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상층에 도전할 수 있기야 하지만…….’
세력을 이뤄 덤벼도 이길까 말까 한 마당에 개인이 상층 문지기들을 이긴다?
그것도 홀로?
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헨리가 말했다.
“납득한 것 같으니 바로 자리를 마련토록 하지. 양측 간의 뜻이 맞는데 더 미룰 이유가 없잖아?”
“자리를?”
“그래. 이런 큰 문제는 얼굴 보고 대화해야 하는 것이 맞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게덤은 눈을 꿈뻑였다.
모든 게 휙휙 눈 깜짝할 새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아래층 거인들과 대화를 좀 나누도록 하지. 그사이, 당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 잘 좀 전달해 줬음 해.”
“알겠네.”
게덤은 홀린 듯이 방을 나왔다.
이윽고 헨리 혼자가 됐을 때, 헨리가 파티 시스템창을 켰다.
파티 시스템창에는 익숙한 자가 실시간 대화 기능을 켠 채 침묵하고 있었다.
라훔이었다.
헨리가 파티 메시지로 음성을 전달했다.
- 그렇다는군.
- …그렇군. 그런 사연이 있었어.
게덤과 독대를 시작할 때부터 헨리는 일부러 실시간 대화 기능을 켰다.
대화 이후 다시 말을 전달하기보단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라훔이 직접 듣고 모든 걸 판단하라는 배려에서였다.
- 그래서, 어쩔 셈이지? 보아하니 중층의 넬바프는 당신들과 하나가 될 의향이 다분해 보이는데 말이야.
- 우리도 거절 할 이유가 없다. 브리타니아 님의 무덤만 안전하게 지킬 수 있고 어비스 놈들만 엿 먹일 수 있다면 말이야. 그건 그렇고……
라훔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 무덤과 요새를 옮기는데 드는 막대한 어비스 포인트는 대체 어디서 구할 심산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머리론 답을 못 찾겠어서 말이야. 설마 어비스 은행들에게 대출이라도 할 셈인가?
- 설마. 듣기론 탑에서 절대로 해선 안 될 행동들 중 하나가 삼대은행에 대출을 하는 것이라던데.
- 잘 알고 있군.
- 방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내 계획은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헨리는 그제서야 다물고 있던 계획을 라훔에게 공유해 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계획에 대한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라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 이미 사전 확인도 끝마친 사항이다. 왜? 내가 못 해낼 것 같나?
- 그건 아니지만……
- 그럼 방금 내가 말한 대로 좀 부탁하지. 필요한 아이템은 허멀트를 통해 보내겠다.
- 알겠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통발에 물고기가 들어오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
거인들의 숲.
그곳에 때 아닌 플레이어 군단들이 집결했다.
그 수는 적게 잡아도 최소 수천.
심지어 정예 중의 정예였다.
이들의 정체는 뉴어비스와 질서단, 그리고 살아남은 혁명군에서 추려진 레반을 위한 어벤저들이었다.
이번 복수전은 드물게도 킨만과 페트로가 함께 진두지휘에 나섰다.
습격받은 레반의 체면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지난 수백 년간 한 번도 공개 된 적 없는 거인들의 숲에 첫발을 내딛는 것에 큰 의미가 부여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숲 어귀에 만들어져 있는 두개골탑 앞에 있었다.
그것을 본 킨만이 중얼였다.
“끔찍하군.”
“포악한 놈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악취미가 있을 줄이야.”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 중 전부가 거인을 본 건 아니다.
중층로의 마지막 스테이지인 거인들의 요세에서의 탈출은 수많은 중층로 라스트 미션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이중에는 거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인이 어떤 존재인지는 다양하게 수집되어 오는 정보력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땅한 대비책도 세웠다.
얼마 안 되지만 거인단이라던지, 거인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모아 제법 그럴 듯한 공략법도 만들어 왔다.
거기에 늘상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두 집단이었기에 이번 복수전은 성공적으로 끝날 것으로 사료됐다.
“가지.”
킨만과 페트로의 어벤저 군단이 거침없이 숲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목적지는 뚜렷했다.
혁명군에서 클레버의 위치 정보를 계속 송출해 주었으니까.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킨만과 페트로는 드디어 문제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헨리였다.
선두에 선 킨만이 물었다.
“네가 그 헨리 모리스냐?”
“맞아. 용케도 잘 찾아 왔네.”
“난 뉴어비스를 이끄는 킨만이다. 들어 본 적은 있겠지?”
그 물음에 헨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어이가 없군. 아님 여유 부리는 척을 하는 건가? 그나저나 클레버란 놈은 어디 있지?”
“왜? 볼일은 나한테 있는 게 아니었나?”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나저나 중층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천둥벌거숭이라더니 올라오자마자 이렇게나 큰 사고를 칠 줄이야. 대단한데?”
“그래서 이렇게 우루루 몰려 온 건가? 나 하나 잡자고?”
“일처리는 확실하고 꼼꼼한 게 좋잖아? 그런 의미에서 곱게 투항 하는 게 어때? 우린 레반 그놈과는 달리 별로 유약하지도 약하지도 않거든.”
그때, 헨리의 눈에 금빛이 드리웠다.
여왕의 눈이 발동 된 것이다.
곧 금빛이 가셨고 헨리가 픽 웃었다.
“내가 보기엔 너나 레반이란 놈이나 별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뭐?”
“복수하러 온 거라면 얼마든지 상대 해 줄 게. 근데 너희,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듣기로는 너희들과 거인들 사이에는 서로 상관하지도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겠다는 불가침조약이 있는 걸로 아는데.”
“불가침조약은 지랄.”
킨만이 입에 굵직한 시가 한 대를 물며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게 빨아들인 후 뱉었다.
“그딴 조약, 우리가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지킬 이유가 있나? 설마 우리가 옛날이야기에 겁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저런…… 선배들이 그런 조약을 해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 안타깝게 됐어.”
“선배는 무슨.”
그때였다.
쿠궁!
쿠궁!
커다란 굉음.
지진이라도 난 걸까?
아니.
지진이 아니었다.
이건 발걸음 소리였다.
수십…… 아니 최소 수백에 달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엄청난 크기의 발걸음 소리.
이윽고 어벤저들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고, 놀란 킨만이 고개를 쳐들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산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산이 아니라 산처럼 거대한 ‘라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