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6화
“…뭐라고요?”
“전쟁에 끼워 주겠다고.”
헨리의 말에 레반과 킨만, 그리고 페트로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눈치 보던 킨만이 물었다.
“왜……요?”
“싫은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깟 호기심이 기회보다 중요한가?”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감사를 표하는 킨만과 페트로.
하지만 레반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 헨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넌 필요 없나 보지?”
“아, 아닙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래도 납득 못하는 표정이긴 했다.
당연했다.
이십억 포인트나 뜯어간 놈이 갑자기 전쟁에 끼워 준다고 하는데 누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사실 이번 전쟁에서 헨리는 이들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을 데려가려는 건 이들 마음속에 숨겨져 있을 분노를 해소시켜 주기 위함.
미안한 감정 때문이 아니다.
증오와 분노를 품고 있는 자들은 언제든 복수할 생각만 품고 있고 그것은 언제 사고를 터뜨릴지 모를 꽤나 큰 위험 요소였다.
물론 그 피해가 일어날 쯤엔 헨리는 이미 상층으로 떠난 뒤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신경 쓰려는 것이다.
남은 거인들의 안위를 배려해서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거인들이 중층을 지배해야지만 어비스에게 한 방 먹여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천년전쟁이 아닌 새로운 룰이 등장하더라도 말이야.’
헨리가 모두에게 물었다.
“당장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그게…….”
헨리의 물음에 다들 우물쭈물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각 세력마다 내부적인 문제들이 발발해서 그 수를 가늠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하긴 삼강 전체가 당했는데 그럴 만도 하지.’
머리 전부가 당했으니 꼬리들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 불안은 곧 이탈자를 만들고 세력을 와해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꼬리들이 갈 곳이 있겠는가?
이곳은 중층.
달리 해석하면 벼랑 끄트머리 같은 곳, 도망칠 곳은 없다. 그리고 도망친 곳에는 낙원도 없다.
헨리가 말했다.
“하루 주지. 그동안 데려올 수 있는 놈들만 추려서 대기시켜. 싫다는 놈들을 억지로 설득시킬 필요는 없다. 선택은 자기가 하는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상층로 앞 정오에 보도록 하지.”
말을 끝으로 헨리는 자리를 떴다.
만나야 될 자들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
헨리가 향한 곳은 중층에 존재하는 도시들 중 오직 마녀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도시인, ‘위블’이었다.
헨리가 위블 안으로 발을 들인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건물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를 닮은 자가 튀어나와 헨리 앞에 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인 줄 알았더니 여자였다.
헨리가 물었다.
“날 아나?”
“지금 중층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대화가 빠르겠군. 수장에게 안내해.”
유명세는 이래서 좋다.
덕분에 헨리는 위블의 수장이자 마녀조합장, 피를레스를 생각보다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다.
피를레스가 있는 곳은 동화에서나 볼 법한 넓이는 좁지만 높이는 몹시 긴, 탑 같은 곳이었다.
재밌는 점은 탑의 내부는 겉에서 봤던 것에 비해 굉장히 넓다는 것.
위로 향하는 문이나 계단 같은 건 없었다. 대신 벽에 먹을 발라 놓은 것처럼 새카만 곳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이동 수단이었다.
텔레포트를 하듯, 자신을 안내하는 자와 먹 속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전이됐다.
벽에 화롯불이 켜져 있고 대체적으로 어두운, 하지만 따스한 느낌이 나는 대형 서재에는 구석에 마녀들 특유의 대형 항아리가 끓고 있었다.
피를레스는 그곳 중앙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큰 여자였다.
거인족은 아니었지만 최소 2미티가 넘어 보이는 장신의 여성이었는데 몸매는 육감적이었지만 커다란 키 때문에 육감적인 몸매가 도리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헨리가 나타나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헨리를 맞아 주었다.
“어서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가 내미는 손을 헨리는 잡아 주었다.
그리곤 손님용으로 추정되는 의자에 먼저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피를레스는 씩 웃으며 앉아 있던 흔들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호쾌한 분이시네요. 소문은 들었습니다. 거인들의 주인이시라고?”
“주인까진 아니고 뭐 그냥 은혜를 입힌 정도지.”
“그럼 더 깊은 관계겠군요.”
“네가 피를레스인가?”
이어지는 질문에 헨리는 말허리를 끊고 주도권을 가지고 왔다.
그 박력에 피를레스가 피식 웃었다.
“절 아시나요?”
“들었어. 믿을 만한 친구한테.”
“호오, 흥미로운데요? 그럼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실까요?”
“어비스에 존재하는 마녀조합들 중 최대 규모의 수장.”
“어머, 그런 칭찬을.”
“하지만 최고는 아니지.”
“…네?”
헨리의 말이 이어졌다.
“중층이 탑의 끝은 아니잖아? 그러니 최대는 될 수 있어도 최고는 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으흠,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래서,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가 뭘까요?”
“제안을 하러 왔다.”
“제안이요?”
“내일 난 내게 항복한 플레이어들과 거인병들을 데리고 상층로에 도전한다.”
“내, 내일요?”
피를레스의 눈이 커졌다.
여태 눈과 귀를 풀어 헨리의 행보에 대해 계속해서 수집하고 있긴 했지만 이 소식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정확히는 상층 수문장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생각이지. 나한테 이곳은 지나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제게 하실 제안이란 게 뭐죠?”
“위블을 어비스 내 최고의 마녀조합으로 만들어 주지.”
“최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위블은 탑 내 최대 규모는 되도 최고는 못 되지. 물론 관점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중층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상 꽤 많은 사람들이 최고라고는 생각 못 할 걸? 탑은 거주하는 곳의 높이로 실력을 평가받는 곳이니까.”
피를레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최고라는 자리는 피를레스에게도 관심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녀가 이루어야 할 숙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본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재물 보단 명예에 더 목을 매기 마련이니까.
“듣자 하니 넌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고 하더군.”
“…누구한테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꽤 양질의 정보를 갖고 계신 분이군요.”
“맞다면 다행이군. 아무튼 위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들었다. 아무리 중층에서 날고 기어 봤자 사람들의 인식이란 건 생각보다 단순하니까.”
말 그대로였다.
아무리 중층에서 날고 기어도 겨우 중층 수준이란 말로 치부해 버리면 반박할 말이 없어지게 되니까.
피를레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날 최고로 만들어 주겠다는거죠?”
“실력으로 증명해.”
“실력? 실력은 지금도 충분합니다. 탑 내에서 우리만큼 다양한 분야에 발을 걸친 집단도 없고…….”
“그건 네 생각이지 위층은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그게 무슨 말이죠?”
“마녀들은 약학 기술이 특히 뛰어나지. 차원상인들도 그래서 항상 너희와 거래를 트고 싶어 하고. 하지만 진짜 구매력 있는 집단은 차원상이 아닌 마녀조합과 직접 거래를 한다 들었다.”
“그래서요?”
“단골 고객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이용하는 가게를 바꾸지 않아. 그러니 네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위층에 네 실력을 증명할 만한 방법이 없다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제품 품질이 곧 실력이고 그 실력을 알기 위해선 직접 써 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상층민들은 굳이 아래층에 있는 브랜드를 이용하지 않는다.
상층에 일찍이 자리를 잡은 브랜드들이 있었으니까.
그것이 위블이 탑 최고의 마녀조합이 되지 못한 이유였다.
“정말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이번 전쟁에서,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갈 나에게 위블의 제품들을 지원해라. 그럼 기꺼이 위블의 실력을 탑 전체에 알리도록 하지.”
“…….”
헨리의 제안을 들은 피를레스는 할말을 잃었다.
솔직히 헨리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 이유가 재물이나 제품을 원해서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유라니.
황당했지만 기회였다.
얼마를 지불해도 절대로 살 수 없는 그런 기회.
그도 그럴 게 이전에도 삼강에게 이런 류의 비슷한 제안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솔직히 삼강은 실력이 못 미더워 제품을 협찬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꿀꺽.
피를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물건의 보급은 어떻게 하면 되죠? 필요한 건 또 뭐고요?”
그 말에 헨리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허멀트의 것이었다.
“앞으로 중층의 모든 상거래를 독점할 차원상인의 명함이다. 찢으면 호출 할 수 있고 앞으로 위블의 지원품은 모두 허멀트를 통해 받도록 하겠다. 그리고 필요한 건 네가 직접 생각해 내라.”
“예?”
“고객의 니즈를 미리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지급하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겠지. 제품 만드는 실력이 비슷하다면 이런 쪽으로라도 두각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
얕은 도발.
그러나 피를레스의 승부욕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동의합니다. 알아서 준비하도록 하죠.”
“내일 정오에 우리는 상층로에 진입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들어 줬으면 하는 약이 두 개 있다.”
“개인적?”
“이 또한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지.”
헨리는 피를레스에게 넬바프의 작아진 거인들을 위한 약을 의뢰했다.
그들이 앓고 있는 게 정말 저주라면 반드시 해주법도 존재할 테니까.
“게덤에게는 미리 말해 두었으니 은밀하게 만나 연구를 진행하도록 해.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의뢰 내용을 누설하는 짓은…….”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고.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실력에 자신이 없다면 허멀트를 통해 몰래 귀띔하도록 해. 그럼 중층 위에 존재하는 모든 마녀들을 죽여 줄 테니. 그럼 자연스레 위블이 최고가 될 수 있잖아?”
“필요 없습니다, 그런 배려는.”
“그냥 알아두라는 거지.”
“그럼 두 번째는 뭐죠?”
“두 번째는…….”
헨리는 두 번째 약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피를레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서 엔블이 죽은 거였군요.”
“엔블?”
“뱀의 신전에서 당신이 처리한 사냥꾼 중 한 명입니다.”
사냥꾼이라는 말에 헨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곧 엔블이 누군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날 원망하나?”
“천만에요. 그건 사냥꾼들의 운이 나빴을 뿐.”
“그럼 다행이고.”
할 말을 마친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서는 따로 쓰지 않았다.
이번 거래에서 누가 더 절박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정오.
상층로 앞에는 중층 역사상 유래 없을 만큼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모두들 상층로에 도전하기 위해 모인 헨리 휘하의 병사들이었다.
상층로 문지기도 당황한 눈치였다.
아직 천년전쟁의 때가 아닌데 갑작스러운 인파가 자신 앞에 몰려들었으니.
헨리는 병사들이 모두 내다보이는 곳에서 모인 전력들을 파악했다.
그런 다음 클레버와 함께 그들의 수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