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3화
혁명군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은 중층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특히 삼강 구도를 잇고 있던 질서단과 뉴어비스의 귀에 가장 먼저 들어갔고 소식을 접한 열강들 내부의 반응은 대부분이 같았다.
“지금 공격해야 합니다!”
“지금이 기횝니다!”
“그 머저리 같은 놈들을 지금 짓밟아 놔야 우리가 천년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져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삼강 구도였지만 그렇다고 정이 넘치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곳은 야생이자 정글, 강자존이자 약육강식의 법칙에 지배받는 곳.
기회가 왔을 때 어서 빨리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기회라 여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좀 더 조심스럽게 대하자는 의견들도 있었다.
“섣불리 공격하면 안 됩니다.”
“천년전쟁은 과정일 뿐입니다. 이후의 싸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혁명군이 지금 약해진 상태이긴 하나, 그들이 와해되면 결국 전체적인 힘이 줄어듭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
질서단의 단장, 페트로.
뉴어비스의 수장, 킨만.
두 사람은 각자의 진영에서 한창의 회의 끝에 우선 서로 만나기로 했다.
독대 테이블에서, 킨만이 말했다.
“…그래서 우린 혁명군을 치기로 했는데, 그쪽 생각은 어때?”
“우린 반대야. 혁명군을 분해시킨다 한들 그들이 우리 아래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되면 결국 전체적인 힘의 손실로 이어질 뿐이고.”
“으음.”
신사적인 대화들이었다.
그도 그럴 게 삼강은 서로 비슷비슷한 힘을 가진 세력들이었으니까.
또 서로가 내세우는 논리들이 빈약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킨만은 이 대화를 이렇게 흐지부지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천년전쟁이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 뒤는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 뻔했으니까.
그때였다.
덜컹!
거칠게 열어젖히는 문.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세력의 수장들이 독대하는 자리에서 이런 무례라니.
하지만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페트로와 킨만은 대번에 납득했다.
방문자는 다름 아닌 레반이었다.
자신만 빼놓고 두 사람이 만났다는 소식에 치료를 받다 말고 급히 참석한 것이다.
“다들 반갑군. 근데 날 빼놓고 회담이라니, 이럼 내가 섭섭하지.”
레반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불인 업화를 통째로 뒤집어썼으니.
그는 몸의 털들이 전부 탔고 곳곳에 화상으로 인한 흉터와 진물들이 흘렀다.
중층에서 가장 실력 좋은 치료사들을 초빙해 최선을 다해 치료하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붕대와 의복, 반쪽짜리 가면 등으로 군데군데 가렸다.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킨만이 웃었다.
“호되게 당했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군.”
“웃어? 감히 웃음이 나와?”
“워워, 진정해. 그런 의미에서 웃은 건 아니니까.”
“그래, 진정하는 게 좋겠군. 레반.”
페트로까지 나서자 레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레반이 말했다.
“후, 이제 그럼 정기 회담을 진행하지.”
“정기 회담? 그건 아직 멀었잖아?”
“그게 중요해? 날 빼고 너희 둘이 모였는데 그 이유가 날 어떻게 조질지에 대해서 모인 거라고 세상에 공표할까?”
“많이 흥분했군. 마음의 여유가 없어.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갑자기 공격받아 그 꼴이 되면 나라도 그랬을 테니.”
“뭐라고?”
“진정하게, 레반. 자네 말대로 오늘 모임은 정기 회담으로 공표하겠네. 하지만 이 모임이 정기 회담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안건이 있어야 하는데…… 설마 그냥 온 건 아닐 테고, 이런 건 말 안 해도 알아서 준비해 왔겠지?”
“안건? 안건이야 있지. 없으면 만들면 될 일이고.”
레반은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병을 잡아 손날로 마개를 잘랐다. 그러고는 몇 모금을 울대로 넘긴 후 쓰라린 식도의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부터 빌어먹을 안건에 대해서 말해 주지. 우리 혁명군은 이번 천년전쟁에서 빠지겠다.”
“뭐?”
“뭐라고?”
레반의 파격 발언.
그 말에 페트로와 킨만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놀랄 만했다.
삼강 중 하나가 빠지면 그만큼 싸움을 덜할 테고 그만큼 전력 손실이 줄어들 테니까.
두 사람이 의자를 당겨 앉자 레반이 한 번 더 술을 들이켠 후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지금 날 이렇게 만든 놈이 아직도 중층에서 활보 중이다. 우리 애들 말로는 넬바프에 간 것 같다는데 난 그놈을 절대로 용서 못하겠단 말이지.”
“넬바프? 넬바프라면 불가침조약을 맺은 숲의 넬바프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놈은 내 수하 놈이 자신의 차원에서 모시던 주인이라 했어. 그러니 내 수하였던 놈 옆에 날 이렇게 만든 놈도 같이 붙어 있겠지!”
“근데 왜 하필이면 넬바프에…… 거긴 여태 아무도 들어간 전례가 없는 곳인데…….”
꿀꺽, 꿀꺽.
“크흐, 그래서? 지금 너희도 본 적 없는 거인 나부랭이들이 무서워서 이런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레반은 절대 감정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공격당한 후, 상황이 이렇게 될 거란 건 삼강에 속한 플레이어라면 누구든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참모들과 계산을 했다.
어떻게 하면 혁명군을 유지한 채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놈에게 피의 복수를 선사할 수 있을지.
간단했다.
이번 천년전쟁에서 빠지는 것.
그리 하면 혁명군은 질서단과 뉴어비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남은 물론이고 도리어 그들에게 휘하 전력으로 대우받으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리고 레반의 계산은 멋지게 먹혀들었다.
페트로와 킨만이 눈빛을 형형하게 빛냈기 때문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지. 그 불가침조약을 내가 맺은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지켜야 할 필요가 있나?”
“넬바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근데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라면 이번 안건은 경쟁할 필요가 없겠군?”
“당연한 소릴.”
말 그대로다.
어차피 천년전쟁이란 게 동일한 컨디션에서 하는 싸움이었으니, 이번에 레반이 내건 수배 싸움도 굳이 질서단과 뉴어비스가 싸우듯 경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경쟁은 오히려 부상만 추구하니까.
레반이 술 한 병을 마저 비운 후 빈병을 벽에 던져 깨며 말했다.
“뭐가 됐든 내 앞에 산 채로 잡아오기만 해! 사지를 끊든 코어를 파괴하든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테니까.”
“좋지.”
“좋아.”
뒤엉키는 세 개의 눈빛.
정기 회담의 안건이 가결되는 순간이었다.
*
촌장 게덤은 혼란스러웠다.
중층에서 고립을 자처하여 이곳에서만 살아간 지 몇백 년.
아니, 명맥을 따라 올라가면 어쩌면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넬바프의 초대 촌장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브리타니아의 휘장만큼은 알았다.
왜냐하면 넬바프에도 브리타니아의 휘장이 가보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헨리가 물었다.
“라훔에 대해 아나?”
“모른다. 누구인지. 하지만 이 휘장은 알지. 이것이 진품이라는 것도.”
“그럼 대화가 쉽겠군. 라훔은 이 아래층에 있는 분단된 당신들 일족의 수장되는 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동포들과 함께 비스…… 아니, 어비스 갓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지키는데 애를 쓰고 있지.”
“…아직도 지키고 있다고?”
“그래. 매우 커진 요새를 등지고 수많은 거인병들과 함께 말이야.”
“그럴 수가…….”
분단된 두 일족이 서로의 소식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중층로 말미와 중층.
얼핏 보면 가까워 보이지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갈라진 두 곳은 한쪽은 강력한 선민사상으로 플레이어들과 대화하지 않았고 한쪽은 오래 전에 맺은 불가침조약으로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아왔으니까.
즉, 어찌 보면 헨리가 분단된 일족 사이의 최초의 사절단이 된 셈이었다.
눈빛이 깊어진 게덤을 보며 헨리가 말했다.
“감상은 나중에 젖도록 하고 우선은 용건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지. 너흰 분단된 거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의향이 있나?”
“하나가 된다고…?”
“그래. 더 이상 남남이 아닌 아주 먼 옛날 과거에서 그랬듯이 하나로 말이야.”
“하나라니…… 그런 건 여지껏 감히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게덤의 눈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그래.
생각해 본 적 없을 테지.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이 이런 제안이라니.
하지만 과연 정말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을까?
헨리가 눈을 좁히며 물었다.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아니면 설마 촌장이란 자리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 된 거인에게 주는 명예직 같은 건가?”
“허튼 소리!”
“그럼? 그게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헨리의 말에 게담은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헨리의 말마따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신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거인이자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꼭 그래야만 하는 거인이었으며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문제들에 대해 과거와 미래까지 함께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헨리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왜 이곳이 넬바프라고 불리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알기로 여기 있는 거인들은 더 이상 어비스 갓들과의 싸움이 싫어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떠난 자들의 후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넬바프는 브리타니아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거인들 세상의 이름이고. 근데 그런 브리타니아에 대한 의리를 끊은 자들이 넬바프의 이름을 쓴다는 건 조금 어폐가 있지 않나?”
“그, 그건!”
쾅!
헨리의 말에 흥분한 게덤이 테이블을 쾅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헨리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건조한 눈빛으로 게덤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이해 못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희들은 분명 내가 찾는 그 거인들이 맞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꼬락서니들을 하고 있는 거지? 거인이라 함은 요새에서 본 그자들이 더 거인 같은데?”
“그건…….”
“그리고 불가침조약이란 건 또 뭐지? 설마 플레이어들의 침공이 두려워 그런 조약을 맺은 건가? 누가 맺은 거지? 너희들의 선조가 맺은 건가?”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질문들.
그것들은 알게 모르게 게덤을 질식시키게 만들었다.
하나 같이 전부 다 민감한…… 쉬이 대답하기 힘든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담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런 다음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던 것들인데.
아니, 누군가 의문을 가져도 회피해온 것들이었기에 더더욱 고개가 숙여졌다.
눈앞의 헨리가 넬바프에서 온 선조들의 망령 같았다.
그런 애처로운 모습에, 헨리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주도권을 쥐기 위해 일부러 압박한 게 아니다.
라훔의 거인군단은 헨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반드시 필요한 자들이었지만 단순히 일회성 도구로 쓰고 버릴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에고에 진지한 태도를 갖춘 것뿐이다.
특히 헨리가 보기에 이들은 더 이상 거인이 아닌데도 거인이라 불리고 있었으니 그 점이 가장 궁금하고 예민했다.
이윽고 한참의 침묵 끝에 게담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우린…… 더 이상 거인이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