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0화
[ <중층>에 입장합니다. ]
[ <4층 : 기회의 관>에 입장하셨습니다. ]
시야 오브젝트를 활용해 드디어 탈출구를 찾아 중층에 입장했다.
이번에는 하층 때처럼 정말로 입장하겠냐는 물음은 뜨지 않았다.
점멸되는 시야가 바로 서며 주위 풍경이 보였고 헨리는 가장 먼저 푸른 하늘과 그 아래 깔린 드넓은 초목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위치가 좀 높다.
그도 그럴 게 헨리는 어느 이름 모를, 아주 높이 솟은 나무 꼭대기에 서 있었기 때문.
당황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까마득한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유치하긴.’
분명 더 좋은 장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그리 심통이 났는지 이제 막 입장한 플레이어를 이런 곳에 얹어 놓다니.
딱히 상관없다.
높이가 높다 해서 겁먹을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헨리는 상태창을 켜 바뀐 정보부터 확인했다.
++
[ 헨리 모리스 ]
- 신분 : 중층민, 이레귤러
- 특성 : <염왕자>
- 염기 : 1
- 어비스 포인트 : 825,025 ap
++
바뀐 정보.
딱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
드디어 헨리는 정식으로 중층민이 될 수 있었다.
‘그래 봤자 별 차이는 없는 것 같다만…….’
상태창을 닫은 다음, 헨리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실제 목소리를 전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천 년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이었으니까.
헛기침을 마친 헨리는 눈을 감고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최초의 권속인, ‘그 녀석’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 클레버.
무려 수천 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
본인만큼이나 애타게 기다렸을 녀석의 이름을, 헨리는 조용히 불렀다. 그러자……
- ……주인님?
그토록 듣고 싶었던, 반갑기 그지없는 녀석의 목소리가 영혼을 통해 생생히 울려 퍼졌다.
몰려오는 반가움을 애써 참으며 헨리가 대답했다.
- 그래, 나다. 클레버.
- 주, 주인님? 정말 주인님이십니까?
- 그래. 나다, 이놈아.
- 세상에……
그동안 영성을 통해 대화하고자 꽤 많은 시도를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영혼이 각인된 사이라 할지라도 차원계가 달라지니 의식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심지어 같은 어비스 안이라 할지라도 층계가 다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참 오래도 걸렸고 더더욱 감격스러웠다.
헨리의 목소리를 들은 클레버가 한동안 먹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헨리는 그 심정을 이해하고 충분히 기다려 주었고 겨우 감정을 추스른 클레버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 전 주인님께서 언젠간 저를 반드시 찾아와 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래.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엔 너와 같은 층계까지 왔다. 그래서, 넌 지금 어디에 있느냐?
- 전……
헨리의 물음에 클레버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그 우물거림에 헨리가 물었다.
- 왜 그러느냐? 왜 대답을 못 해?
- 그게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될지……
-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걱정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널 찾으러 여기까지 온 나다.
헨리의 응원에 한참을 망설이던 클레버는 마침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 실은 전 지금 레파르도에 있습니다.
- 레파르도가 무어냐?
- 제가 속한 단체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교화 시설입니다.
- 교화?
- 예, 이곳은 비유하자면 자가발전소 같은 곳인데, 전 지금 여기서 에테르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 자가발전소? 에테르? 그게 다 무슨 말이냐? 그리고 네가 속한 단체라면 혁명군을 말하는 것이냐?
-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지금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조금만 시간을 두고 만나 뵈어도 되겠습니까?
- 개인적인 사정?
- 예.
- 개인적인 사정이라……
분명 허심탄회하게 말하라고 했거늘 그럼에도 클레버는 모든 걸 오픈하지 못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수천년 만에 만나서 그런 걸까?
원래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헨리는 옛날처럼 다그치거나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과 연결된 클레버의 영혼으로부터 굉장히 불안해하는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사연이 있긴 있는 모양이로군.’
그래서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권속이 곤란해하는데 어찌 더 물을 수가 있을까?
- 알겠다.
- 이,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 아니. 더는 네게 묻지 않기로 했다. 근데 잊은 건 아니겠지?
- 예?
말을 잇던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고.
그 순간.
파밧!
빛이 일렁이더니 헨리 앞에 엉성한 포즈의 클레버가 나타났다.
클레버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헨리가 클레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권속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 강제로 소환할 수 있다는 걸.”
“아…….”
그럼에도 얼빵한 표정으로 헨리를 올려다보는 클레버.
그러다 이내 정신이 들었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 이럼 안 되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냐?”
“저, 전 지금 처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 함부로 레파르도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막 맘대로 벗어났다간 분명……!”
“분명?”
“그들이 절 찾아올 겁니다…….”
다급함에 말을 잇던 클레버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헨리가 무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말을 잇던 중 정신이 확 들며 지금 자신이 주인 앞에서 무슨 행태를 보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허나 사태를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
헨리는 말없이 계속 클레버를 보았다.
클레버.
참 보고 싶었던 자신의 권속.
항상 총명했던 녀석이었는데 상태가 좀 이상했다.
마치 정신이 좀 아픈 사람처럼.
헨리는 그 원인으로 혁명군을 의심했다.
화가 났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는 건 차순위다.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순간 클레버의 몸이 위로 튀어 올랐다가 바로 섰다.
권속의 주인으로서 강제로 권속의 영혼을 자극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끊은 것인데 과부하 온 전자 제품을 껐다 키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헨리는 다시 손가락을 튕겨 클레버의 의식을 다시 심어 주었다.
그러자 꼿꼿이 서 있던 클레버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속에 것들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헨리는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클레버가 진짜 정신을 되찾았을 때 헨리가 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느냐?”
“…예, 못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 네 정신을 오염시킨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내 불찰이지. 네게 무리한 명령을 내린 게 여기까지 영향을 주었으니.”
“…….”
헨리의 배려에 클레버는 황송함에 눈물을 훔쳤다. 헨리의 부드러운 말이 계속됐다.
“그래, 그럼 이제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우스의 마신씩이나 되는 놈이 이 꼴이 되었는지.”
“그게…….”
정신 차린 클레버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으나, 이젠 정신이 완전히 정화되었는지 아까와는 달리 차분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법 긴 이야기였다.
이해는 됐다.
떨어져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몇천 년이었으니.
허나 클레버의 이야기가 비교적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헨리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절정은 이야기가 종국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윽고 클레버의 이야기가 끝났고 헨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넌 네가 속한 혁명군의 말을 듣지 않아 그곳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냐? 살아 있는 에테르 공장이 되어 에테르를 뽑히며?”
“…예.”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는 클레버.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도 그럴 게 클레버가 속한 단체의 이름은 혁명군으로, 부조리한 어비스를 뒤집어엎자는 뜻에서 결성된 세력이었기 때문.
심지어 클레버가 벌을 받은 이유도, 헨리가 혁명군에 가입하지 않아서이며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헨리를 영입하려 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클레버가 나서지 않은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다.’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고 새로운 단체에 정신이 흐려졌다고는 하나, 긴 시간 함께해 오며 내린 뿌리 깊은 근본까지 흔들렸을까.
클레버가 감옥 같은 레파르도를 아무 대꾸 없이 수용한 건 다 그런 이유들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화가 났다.
헨리는 고개 숙인 클레버의 정수리를 얼마간 바라보던 끝에 나긋이 말했다.
“아무래도 혁명군이란 놈들을 잠시 만나 봐야겠구나.”
“주, 주인님!”
헨리의 말에 급히 고개를 드는 클레버.
표정에 다급함이 어려 있다.
오랜만이었다.
클레버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그렇기에 헨리는 그런 클레버의 모습마저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헨리는 얼마간 착잡한 눈길로 클레버를 바라보던 끝에 자신의 관자놀이에 검지를 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떼자 손끝에 하얀 빛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헨리가 탑 내에서 걸어온 길을 담은 헨리의 기억들이었다.
헨리가 손끝을 클레버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게 어떤 마법인지는 잘 알겠지.”
“…예, 잘 압니다. 그 누구보다도요.”
“그럼 직접 보고 판단하거라.”
헨리는 뽑아낸 기억을 그대로 클레버의 머리에 심어 주었다.
그러자 클레버의 눈이 번쩍 뜨이며 그동안 헨리가 걸어온 행보들을 주마등처럼 보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버의 두 눈에 옅은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헨리가 나긋해진 눈길로 촉촉해진 클레버의 눈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이래도 걱정이 되느냐?”
“아뇨…… 하나도 걱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도요…….”
“내가 너를 너무 오래 방치한 것 같구나. 그러나 이젠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여기까지 직접 왔으니 이제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 혁명군이란 놈들은…….”
그때였다.
먼 거리.
그것도 꽤 먼 거리에서 엄청난 기운의 에테르 반응이 느껴지기 시작한 건.
헨리와 클레버가 동시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클레버가 다급히 말했다.
“놈들입니다, 확실해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근데 벌써 널 찾으러 오다니, 그들은 정녕 너를 동료로 생각하는 것이 맞느냐?”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빨리 클레버를 추적해 올 일은 없겠지.
헨리는 긴장하는 클레버의 어깨를 감싸 쥐며 차분히 놈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한 기세로 에테르를 뿜어내는 자들의 면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놈들은 둘이었다.
도마뱀 수인 하나, 그리고 엘프처럼 생긴 귀쟁이 놈 하나.
둘을 본 클레버가 옅게 떨었다.
“추, 추적조…!”
“추적조?”
추적조란 말에 헨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추적조까지 갖춰 둔 걸 보니 혁명군이 단원들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헨리 앞에 선 추적조 멤버들 중 도마뱀 얼굴을 한 수인, 리티가 말했다.
“여기 있었구만. 근데 레파르도에선 거리가 꽤 되는데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지?”
이어서 엘프를 닮은 귀쟁이 추적조, 하문이 말했다.
“듣기로는 스킬 반응은 아니었다는데 말이야…… 그나저나 그쪽은 누구?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하문의 물음에 헨리가 건조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얘, 주인.”
“주, 뭐?”
“주인이라고.”
그 말과 함께 헨리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열기가 뿜어졌다.
[ <열풍>이 발동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