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9화
불길.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처음엔 비명만 들리던 그것은 이내 곧 피비린내 사이로 묵직한 탄내를 풍겨 왔다.
“키아아아!”
“쾌애애애애!!”
뒤에 갑자기 뭐라도 나타난 걸까?
거인만큼 거대한 녀석들이었지만 후방에 있는 녀석들은 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미친 듯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후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돈 2대대장은 멍하니 지켜보던 끝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다! 지금이 기회야! 모두 진격하라!!”
페돈의 명령이 떨어졌고 병사들은 용맹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종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앞에는 거인군단이.
뒤에는 열풍이.
특히 페돈이 이끄는 거인군단의 기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증대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본부에 증원을 요청했으니까.
“가라! 계속해서 나아가!!”
거침없는 진격과 후방의 열풍.
어비스 갓들에게 때아닌 재앙이 내려졌다.
그렇게 협곡의 반절 이상을 지나왔을 때, 선두에 선 페돈은 생각지도 못한 존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너……!”
헨리였다.
*
“그곳에서 나타날 줄이야…….”
요새 본부.
요새장 라훔을 비롯한 최고 간부 사인방이 모두 모여 있었다. 헨리도 테이블 한켠을 차지해 앉아 있었다.
라훔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몸은 또 왜 그렇고? 거인단이라도 섭취한 건가?”
라훔은 헨리가 떠난 차원의 틈 앞에서 몇 날 며칠을 뚝심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파티원 상태 표시로 다시 돌아올 것도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장소가 다름 아닌 재앙의 협곡이라니?
심지어 덩치도 자신들만큼 커져서 왔다.
거인의 근골 효과인 걸까?
그에 헨리가 대답했다.
“우선 덩치에 대한 문제부터 대답하자면 거인단 때문이 아니라 내가 건너온 차원의 폭풍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인 효과다. 곧 원래 크기로 되돌아올 거야.”
“그럼 우리가 상대하던 어비스 갓이 우리만큼 거대했던 이유가…….”
“나와 비슷한 이유겠지.”
“…그렇군. 그럼 제단도 거기에 있었나?”
“그건 이제부터 설명해 주지.”
헨리는 하급 관리자를 죽인 것부터 시작해 제단을 파괴하고 상급 관리자인 엘을 만난 것.
그들이 어비스 갓을 ‘비스’라 부르는 것과 녀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염가원에 가 염왕을 만난 이야기 등 그간 겪은 일들에 대해 모두 말해 주었다.
놀랍게도 거인들은 상급 관리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덕분에 대화가 한결 편했고, 그래서일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거인들의 입이 벌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거인들의 표정이 매우 심각해졌다.
특히 라훔이 침음성을 삼켰다.
“…그렇군.”
“상급 관리자라…….”
“염왕…….”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
그사이 헨리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고 왔다.
특히 염왕이 헨리에게 후원의 대가로 요구한 점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게 염왕은 헨리에게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인 천년전쟁을 난장판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으니까.
라훔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 떠날 생각인가?”
“너희가 나와의 거래에서 만족했다면.”
“만족은 당연히 했지. 아니,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잘해 주었어.”
“그렇군. 그럼 이제 내가 제안을 한 가지 하고 싶은데.”
“제안?”
“듣기로는 위층에 다른 거인족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아는 바가 맞나?”
헨리의 말에 네 사람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라훔이 모두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런데?”
“그들과는 영원히 남으로 지낼 생각인가?”
“이 문제는 그리 쉽게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넌 분명 우리에게 고마운 존재지만 이 문제는 선을 넘었어.”
“하지만 내가 제안할 내용에는 이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좋아, 원래라면 머리통을 부쉈을 테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니까 일단 한번 들어 보지.”
“거인족이 둘로 나뉜 이유는 더 이상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쪽과 싸움이 계속 되더라도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시작은 그랬지.”
“그럼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옮기면 되잖아?”
“……뭐?”
“굳이 이곳에서 무덤을 지킬 이유는 없잖아? 이곳은 누가 봐도 어비스가 너흴 괴롭히기 위해 만든 곳. 그런데 굳이 놈들의 장단에 맞춰 계속 어울려 줄 필요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분단의 아픔까지 겪어 가면서.”
“그건…….”
헨리의 말에 라훔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무덤을 옮긴다는 발상은 여지껏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덤을 옮긴다는 물리적인 문제 보다는 어비스가 직접 이곳에 브리타니아의 무덤을 만들어 버려 절대로 옮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
쉽게 말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고정관념을 깬다고 해도 무덤을 옮긴다는 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무덤을 옮긴다는 건 이곳 요새의 거인들 모두가 무덤을 따라 이주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디르푸 부요새장이 말했다.
“말은 쉽지.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하면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면?”
“일단 우린 다른 거인들이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지 모른다. 단절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중층 어딘가에 있다고 들었다만은…….”
“그런 건 문제도 아니지. 차원상인들에게 돈 몇 푼 쥐여 주면 알아낼 수 있는 문제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과 합칠 생각이 있어도 그들이 없다고 하면?”
“그땐 근처에 새로운 터를 만들어야겠지.”
“어려운 말을 참 쉽게도 하는군. 이 요새에서 지내는 거인의 수가 몇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인가? 자그마치 육천이다. 터전을 옮긴다는 건 어찌 보면 마을을 통째로 옮겨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처럼 쉬울 것 같나?”
“대체 넌 우리한테 무슨 제안을 하고 싶은 건가?”
라훔을 제외한 나머지 거인들이 슬슬 성을 내기 시작한다.
당연했다.
헨리가 하는 말들은 해석하기에 따라 허황된 말들이나 다름없으니까.
그 말에 헨리가 파티 메시지를 켰다.
그런 다음 유일한 파티원인 라훔에게만 따로 말을 전달했다. 그에 라훔의 눈이 커졌다.
이내 라훔이 눈살을 좁히며 물었다.
“…진심인가?”
“진심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찢었다.
허멀트의 것이었다.
“자, 또 저를 불러 주셨군…… 흐엑?!”
테이블 위로 소환된 허멀트는 자연스럽게 헨리에게 인사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네 거인과 거인들만큼 커진 헨리를 보기 전까진.
깜짝 놀란 허멀트가 입을 반쯤 벌리고 서 있더니 품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히 덩치를 부풀려 냈다.
“휴, 이 정도는 돼야 대화가 되겠군요.”
허멀트의 등장에 디르푸가 물었다.
“누구지?”
“내 전속 차원상인.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니 본론만 이야기 하도록 하지. 허멀트, 거인들의 요새에 있는 브리타니아의 무덤에 대해서 알고 있나?”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알고 있죠. 근데 그건 왜요?”
“만약 그 무덤을 다른 층계로 옮기고 싶다면 도와줄 수 있나?”
“네?”
“가능한지를 묻는 거다. 너의 힘으로.”
“그건…….”
헨리의 물음에 네 거인의 시선이 허멀트에게로 모였다.
반신반의 하는 눈빛들.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험상궂기 그지없다.
하지만 허멀트는 노련한 차원상인답게 그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 됩니다! 당연히 되죠! 어비스에서 차원상이 못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배짱 가득한 대답에 헨리가 피식 웃었다.
“그럼 무덤을 옮기는데 필요한 대가는?”
“뭐, 자세한 건 견적을 내봐야 알겠지만…… 혹시 무덤만 옮기실 건가요?”
“그럼? 더 한 것도 옮길 수 있나?”
“돈만 있으면 도시도 옮길 수야 있죠. 이곳의 경우엔 요새겠지만. 아무튼 저희 상인협회에선 취급 안 하는 서비스가 없습니다.”
“무덤만 옮기는 것과 요새 전체를 옮긴다는 가정으로 두 건에 대해 견적을 짜봐.”
“흠, 그렇다면…… 전자의 경우엔 못 해도 일억 어비스 포인트가 들 거고, 후자의 경우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십억 어비스 포인트는 들 것으로 사료됩니다.”
일억과 십억.
자그마치 열 배가 넘는 금액.
허나 헨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무려 무덤과 요새를 옮기는 건데 저 정도 금액은 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인들은 좀 달랐던 모양.
“…….”
“세상에…….”
“일억….”
“십억…… 그 돈이면…….”
헨리는 어비스 포인트를 사용하지도 않고 대부분의 아이템을 허멀트에게서 받아 쓰기 때문에 포인트에 대한 체감이 적다.
하지만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보통의 플레이어인 거인들은 때때로 부족한 물자를 차원상인들에게 구매해 사용했기 때문에 이 금액이 얼마나 비싼 건지 대번에 이해했다.
그들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허멀트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 또 궁금하신 점은요?”
“없어. 이 정도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불러 주시죠. 그리고 여러분들도요.”
허멀트는 능숙하게 자신의 명함을 모두에게 돌린 후 모습을 감추었다.
허멀트가 사라진 뒤, 헨리가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거인들을 뒤로 하고 라훔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저렴하네. 내가 말한 계획이 성공하기만 하면 이 정돈 일도 아니잖아?”
“…그 부분에 대해선 동의하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일이 잘 풀렸다는 가정 하에 진행될 일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그러니 이제 대답을 듣고 싶은데?”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헨리가 입을 다물고 빤히 라훔을 쳐다보자 라훔은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 원…… 이건 못 당하겠군. 아주 현실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말이지.”
“요새장님?”
“설마?”
“좋아. 제안을 받아들이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야.”
그 말과 함께 헨리의 시야에 아이템 하나를 획득했다는 아카이브 알림이 떠올랐다.
헨리는 즉시 물품 정보를 확인했고 만족을 표했다.
“물론이지. 나도 남한테 폐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그렇군. 이것 말곤 더 할 말이 남아 있나?”
“없어.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그럼 바로 떠날 생각인가?”
“그래야겠지.”
“중층으로 가는 고정 출구를 알려 주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따로 배웅하진 않았다.
대신 특별한 시야 오브젝트를 주었다.
시야 오브젝트를 획득한 헨리가 미니맵으로 출구를 확인한 뒤 가벼이 인사했다.
“금방 또 보지.”
“그랬으면 좋겠군.”
이윽고 헨리가 떠났고, 방에 남은 네 사람 중 호기심을 참지 못한 간부들이 보채듯이 라훔에게 물었다.
“뭡니까? 제안은 또 뭐였고 그로 인해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건 또 뭐랍니까?”
“설마 비밀은 아니겠지요?”
“말씀해 주십시오, 요새장님.”
그들의 물음에 라훔은 얼마간 고민하더니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군대가 되어 달라더군.”
“예?”
“그렇게만 해 준다면 중층을 우리한테 통째로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 말에 라훔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입이 쫙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