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6화
[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
[ 웨이브 등급은 <마스터>입니다. ]
같은 시각.
식스랜드의 다른 플레이어들 앞에도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폴랑도, 살아남은 엘리트들에게도.
데폴랑이 띄어 올린 왕의 인장을 접으며 말했다.
“어떡할래요?”
“무, 뭘 어떡해?”
“말했잖아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평등하게 싸우겠다고 하면 그간의 만행들은 용서해 주겠습니다.”
그동안 엘리트 계급이 자행해 온 만행들.
하지만 데폴랑은 복수 보다는 현실을 볼 줄 아는 남자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복수심에 눈이 멀어 엘리트 계급원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식스랜드는 필히 멸망할 테니까.
그때, 갈렌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난 협조하겠습니다.”
과연 갈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프와 같은 태도를 취했던 그였지만 데폴랑이 가진 왕의 인장을 보자마자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에 데폴랑의 시선이 네프에게로 옮겨졌고……
“협조…….”
네프는 부들거리는 듯하더니.
“……하겠습니다.”
그 또한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데폴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웨이브부터 막고 마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이 책임지고 상급 군인 엘리트 군을 설득하세요.”
“…예.”
모두가 바라던 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부우우우──!
뿔각 소리.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그것은 언제 들어도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들릴 때마다 오금을 저리게 하고 마른 침을 삼키게 하는 것.
허나 오늘은 두려움이 덜했다.
그 콧대 높은 엘리트 군이 후발대가 아닌 처음부터 함께했기 때문이다.
물론 배치만 되었을뿐, 아직 마음까지 하급 군과 완전히 섞인 건 아니었다.
쿵-!
쿵-!
쿵-!
거대한 발자국 소리.
지평선 너무 거대한 몬스터 해일이 뒤덮여 들어온다.
사람들은 한층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려 마스터 등급이다.
1년에 한 번 발생할까 말까한 빅 이벤트. 통칭 마스터 웨이브라 불리는 이것은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연례 행사였다.
슬슬 시야에 몬스터들의 외견이 잡히기 시작한다.
마스터 웨이브는 말 그대로 총군세다.
그동안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몬스터들이 하나의 군대가 되어 진격해 오는 것이다.
카엘이 물었다.
“…종류는?”
“전부 다 있습니다. 고블린, 놀, 오크, 오우거, 트롤, 골렘 등…… 라이더는 물론이고 플라잉 라이더에 공중형까지…… 공성병기도 수십여 개는 되네요.”
“씁…….”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타격은 좀 있어도 이번엔 상급 군이 처음부터 합류하니까.”
“하지만 이번엔 헤타르카일도 없고…….”
부하 병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헤타르카일이 제아무리 막되 먹은 폭군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지난 세월 동안 마스터 웨이브를 막을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헤타르카일의 힘이 컸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헤타르카일도 없고, 엘리트 상급 군도 일부 감소한 상황. 그리고 그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데폴랑도 잘 알고 있었다.
‘막을 수 있겠지. 아니, 반드시 막아야 한다. 반드시 막아 내고 보란 듯이 이곳을 지킬 것이다.’
이제야 겨우 식스랜드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을 때가 왔다.
그런데 고작 연례행사 같은 저런 놈들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몸에 입은 부상도 대부분 회복했다.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지만 평소 힘의 9할은 쓸 수 있었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한 그였기에 데폴랑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창을 꼭 잡았다.
허나 네프의 생각은 달랐다.
‘데폴랑, 네놈이 무슨 수로 왕의 인장을 손에 넣은 건진 모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들한테나 통하는 힘. 그러니 이번 웨이브 때 널 사지로 몰아넣고 다시 식스랜드의 왕권을 탈환한다……!’
말 그대로였다.
왕의 인장이 대체 어디서 난 건진 모르겠지만 인장의 힘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힘.
그것은 신분을 가르는 아이템이지 플레이어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래서 몬스터 웨이브를 이용해 데폴랑을 죽일 생각이었다.
이건 기회였다.
그때였다.
“데폴랑 님.”
뒤에서 들린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데폴랑은 고개를 돌렸다.
네프와 갈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 사람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데폴랑을 부른 이는 다름 아닌 헨리였으니까.
“너, 넌!”
놀란 네프가 말까지 더듬었으나 헨리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데폴랑 앞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늦게 합류해 죄송합니다.”
“……!”
그 행동에 네프와 갈렌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저놈이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다 저놈은 분명 헤타르카일까지 죽인 실력자인데 어째서 데폴랑에게 저런 태도를?
상황파악을 위해 네프와 갈렌이 두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 헨리가 기세 좋게 말을 이어 나갔다.
“말씀하신대로 이번 웨이브에서 공을 세우면 정말 헤타르카일을 죽인 것에 대해 선처해 주시는 겁니까?”
“……!”
“……!”
네프와 갈렌의 눈이 커졌다.
선처라니?
그럼 설마……
“그래.”
다행히 데폴랑은 바보가 아니었다.
사전 협의는 조금도 이루어져 있지 않았지만 눈썰미 좋게 연기했다.
그 태연함에 헨리가 픽 웃었다.
“근데…….”
헨리가 고갯짓으로 네프와 갈렌을 가리키며 물었다.
“신하들은 전부 죽이신다더니 이놈들은 일부러 살려 주신 겁니까?”
“……!”
“……!”
네프와 갈렌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지진 난 눈동자로 데폴랑을 보았다.
순간 데폴랑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데폴랑.
그에 데폴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생각 중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해 드린 조언은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다는 걸.”
“참고하지.”
“그럼.”
헨리는 고개 숙인 후 다시 퇴장했다.
이윽고 성루 위에는 데폴랑과 네프, 그리고 갈렌만 남게 되었다.
그에 데폴랑이 헨리를 뒤따라갔다.
아니, 뒤따라가기 전 네프와 갈렌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번 수성전, 최선을 다해라.”
“예, 옛!”
“열심히 하겠습니다!”
경고를 마친 데폴랑이 헨리를 뒤따라간다.
*
“헨리 님!”
일부러 느긋하게 걸었다.
뒤따라오라고.
눈치 없는 놈이 아니었기에 금방 따라붙었다.
헨리가 대답했다.
“예, 데폴랑 님.”
“갑자기 웬 존대이십니까.”
“귀가 많습니다.”
“아아…… 그보다 아까,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갑자기 헨리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헨리는 자신과 거래를 마친 후 바로 중층으로 떠난다고 했으니까.
그에 헨리가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럼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도와줬는지가 궁금한 겁니까?”
“예.”
“그냥 어비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비스에는 그 어떤 곳이든 놈들의 눈과 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들어 본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어비스는 플레이어들이 최대한 고통 받기를 원하는 곳. 그중 최고는 희망 고문이라죠. 제 생각에 갑작스레 1년에 한번 발생할까 말까 하던 마스터 웨이브가 갑자기 시작된 건 아마도…….”
“어비스가 일부러 그런 것이다?”
“추측일 뿐입니다. 심지어 하루에 두 번이라니. 이례적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식스랜드의 안위 같은 건 별로 관심 없다.
물론 단순한 선의로 데폴랑을 도와주려는 것도,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목숨이 걱정되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어비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게 바보가 아니라면, 이대로의 식스랜드는 어떤 최후를 맞이할 지 뻔했으니까.
‘뭐가 됐든 최소한 데폴랑은 죽겠지.’
가장 낮은 곳의 영웅이니 그 누구보다도 앞장 설 테고 갑작스레 권력을 빼앗긴 사냥개들이 그 점을 놓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 되면 식스랜드는 예전과 같을 거고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바라는 이는 아마도 어비스일 터.
헨리가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중층에 가기 위해선 외부로 나가야 하는데 때마침 마스터 웨이브가 터진 것뿐입니다.”
“뭐가 됐든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하면 힘을 기르십시오. 다음번에는 마스터 웨이브가 닥쳐도 웃으며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명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 보스 몬스터가 출현합니다. ]
한 줄의 알림.
그 알림이 식스랜드 모두의 눈앞에 떠올랐다. 알림을 본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랬습니까, 어비스는 항상 보고 듣고 있다고.”
말을 마친 헨리의 형신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
쿵-! 쿵-! 쿵-!
거대한 굉음.
일반 웨이브의 오우거나 트롤, 골렘이 만들어 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소리였다.
오우거 따위는 가볍게 걷어 차 버릴 정도로 거대한 덩치.
하층 최강의 포식자라 불리는 거인족 몬스터 중 하나, ‘티탄’이었다.
놈은 보라색인지 푸른색인지 모를 기묘한 피부색과 더불어, 네 개의 팔, 거대한 꼬리. 그리고 8개의 눈을 가진 흉측한 몬스터였다.
“크웨에에에에!!”
모습을 드러낸 포식자 티탄이 거칠게 울부짖는다.
몬스터라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하울링, 몬스터 피어였다.
[ <정신저항력>이 부족하여 <공포>상태에 빠집니다. ]
[ <정신저항력>이 부족하여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
[ <정신저항력>이 부족하여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
……
그러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공포 상태에 빠졌다.
몬스터들이 피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플레이어의 공포심을 확대시켜 정신을 좀 먹기 위함이었으니까.
당연히 아군 몬스터들에게는 시스템 효과로 공포 상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제기랄.”
병사들이 공포 상태에 빠지자 순식간에 사기가 꺾여 나간다.
그것을 본 카엘이 이를 부득 갈았다.
매번 홍역처럼 앓는 마스터 웨이브이기에 해마다 스탯 수련을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실정이었으니까.
“쯧쯧, 이런 놈들이랑 같이 생활해야 하다니.”
“데폴랑 그놈은 왕의 인장을 대체 어디서 얻은 거야?”
“아, 그냥 다 죽여 버리고 싶다.”
곳곳에서 들리는 빈정거림들.
대체로 스탯 계수가 높아 공포 상태에 빠지지 않은 엘리트 상급 군이었다.
그렇잖아도 적도 벅찬데 아군까지 이 모양이라니.
답답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닐 텐데.
허나 놈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된 융합도 없는 상태에서 공포심만으로 투입된 전력이다 보니 전우애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상황.
그때였다.
“어, 어?”
“무슨 일이야?”
어느 병사의 외침.
그 외침에 카엘이 재빠르게 반응했고 병사는 여전히 놀란 눈초리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가리킴에 카엘을 비롯한 몇몇 병사들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
“저, 저건……!”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것.
별똥별 같은 게 아니었다.
환한 대낮에 하늘을 물들인 건 다름 아닌……
“운……석?”
별똥별만큼이나 많은 운석들이었다.
그것도 누군가의 마력을 머금고 떨어지는 ‘메테오’라 불리는 운석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으니 다름 아닌, ‘헨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