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5화
‘이 와중에도 자비를 베풀다니.’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헨리는 엘리트들에게 기회를 주는 데폴랑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저런 데폴랑이기에 왕의 인장을 넘길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인장을 완전히 넘긴 시점에서 더 이상 식스랜드의 일은 헨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저런 놈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클레버에게 들은 하층의 질서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식스랜드를 둘러봤을 때부터 헨리는 결심했다. 데폴랑에게 왕의 인장을 팔아야겠다고.
인장 간의 거래는 당연히 가능했다. 아이템 어디에도 ‘거래 불가’나 ‘귀속’ 같은 구절은 없었으니까.
물론 헨리의 목적은 단순히 중층의 준비가 전부이긴 했으나 굳이 데폴랑에게 왕의 인장을 넘긴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바라지 않을 어비스를 골려 주기 위해서였다.
어비스는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가 무조건 고통받길 바라는 변태 같은 족속이었으니까.
이제부터 뒷일은 순전히 데폴랑에게 맡기면 될 일.
헨리는 이어서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 헨리 모리스 ]
- 신분 : 하층민, 이레귤러
- 특성 : 없음
- 물리공격력 : 99
- 물리방어력 : 99
- 스킬공격력 : 99
- 스킬방어력 : 99
- 종합회복력 : 99
- 어비스 포인트 : 225,025 ap
++
다섯 개 스탯들이 모두 한계치인 99가 되었다.
더불어 어비스 포인트 또한 6만에서 22만이 됐다.
어비스 포인트는 요구한 적이 없었으나 데폴랑의 부하들이 고맙다는 의미로 십시일반 모아 준 것이다.
식스랜드에서의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는 두 번째 준비를 할 차례.
헨리는 허멀트의 명함을 찢었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명함을 찢자 허공에서 차원상인 허멀트가 튀어나왔다.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허멀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야, 여긴 식스랜드죠? 정말 오랜만에 오네요. 역시 고객님을 잘 둬야 두루두루 돌아다녀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식스랜드에서 절 소환하셨다는 건 혹시…….”
허멀트의 눈이 반달처럼 휜다.
음흉하다.
그도 그럴 게 허멀트도 아는 것이다.
하층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를.
계급에 의한 핍박과 탄압.
그 정도가 심한 곳은 아랫 계급을 아예 노예처럼 부리는 구역도 존재했으니까.
허멀트는 그런 곳에서 사이사이 이득을 봤다.
허나 허멀트의 기대는 이번에도 무참히 깨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헨리였으니까.
헨리가 말했다.
“하급 특성의 룬과 성장의 룬이 필요하다.”
“…예?”
헨리의 말에 허멀트는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한쪽 귀를 다시 내밀었다.
그에 헨리가 인상을 찌푸리자 허멀트가 헛기침을 하며 귀를 집어넣었다.
“흠흠, 듣기는 제대로 들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비슷한 것들을 요구하실 줄은…….”
“없다면 다른 상인을 부르겠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없기는요! 설마 제가 그것들이 없으려구요. 그럼 개수는 몇 개나……?”
“각각 5개씩.”
“마침 또 여분이 있네요. 이밖에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없다. 그리고 이번엔 외상으로 거래를 했으면 하는데.”
“외상이요?”
“그래.”
외상.
그 말에 허멀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감히 차원상인에게 외상 거래라니?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헨리이기에 궁금해졌다.
“원칙적으로 외상 거래는 불가하나 경우에 따라서 가능하기는 한데…… 근데 아시죠? 외상값은 날짜에 따른 이자가 붙는다는 거?”
“알고 있다. 금리는 혈라은행의 금리를 따르도록 하지.”
혈라은행.
탑 내에서 손꼽히는 은행 길드로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다른 은행들을 이끄는 리드 뱅크라고도 불리는 곳.
그래서 젠장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헨리의 제안은 퍽 합리적인 것이었기에.
“알겠습니다. 그럼 물건 값은 이 정도가 어떠세요?”
허멀트가 청구서를 내밀자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값은 딱 적당했다.
이제 허멀트는 헨리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헨리 또한 그것을 알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값을 깎을 생각도 없었다.
이윽고 헨리가 청구서에 사인하자……
[ <하급 특성의 룬> 5개를 획득하셨습니다. ]
[ <성장의 룬> 5개를 획득하셨습니다. ]
헨리가 원하는 물건들을 각각 5개씩 획득 할 수 있었다.
거래가 끝나자 허멀트가 물었다.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없다.”
“흠…….”
다시 눈꺼풀을 좁히는 허멀트.
이어서 은근한 어조로 질문했다.
“고객님. 근데 저한테 특성 룬과 성장 룬을 사 가셨다는 건 벌써 성장 최대치에 도달하셨거나 근접한 상태이시라는 건데……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혹시 고객님은 무슨 계급이실까요?”
솔직히 궁금했다.
하층의 시스템을 잘 아는 허멀트였고 그동안 헨리를 보아 온 것도 있었으니까.
그에 헨리가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했다.
“왕이었다.”
“왕?”
“그래.”
잠깐의 침묵.
헨리는 대수롭잖았고 허멀트는 순간 뇌가 정지했다. 그러다 다시 뇌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자……
“……설마 그 왕요? 최고 높은 지배 계급인?”
“그래.”
“세상에……!”
허멀트의 입이 여지껏 본 것들 중 가장 크게 벌어졌다.
당연했다.
허멀트가 알기로 하층에서 ‘왕’이 된 자는 정말 몇 안 될 만큼 소수의 존재였기에.
심지어 허멀트는 아직까지 왕의 인장을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어, 어디 봐요! 아, 아니지! 혹시 저도 좀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대가는?”
“예?”
“귀한 걸 그냥 보여 줄 순 없는 법이지.”
“그건 그렇긴 한데…….”
우리 사이에 너무 한 거 아니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헨리가 어떤 고객인지 알았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왕의 인장을 띄워 보였다.
“우와…….”
“대가는 다음에 받도록 하지.”
손아귀 위로 뿜어지는 푸르고 투명한, 그리고 성스럽기 그지없는 찬란한 왕의 인장.
그것을 본 허멀트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했다.
물론 인장은 가짜였다.
진짜는 데폴랑에게 팔아넘긴 지 오래였으니까.
헨리는 금방 인장을 접은 후 손을 내밀었다.
그 태도에 허멀트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곧 포션 몇 병과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좋은 구경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번에도 꼭 이용해 주십시오.”
허멀트가 사라진 직후, 헨리는 익숙한 모양새로 하급 특성의 룬부터 꺼내 들었다.
[ <하급 특성의 룬>을 사용하셨습니다. ]
[ <특성 : 전사>를 획득하셨습니다. ]
하급 특성은 기존의 특성들과는 달랐다.
기존의 특성들이 강화, 회복, 은신 이런 것들이었다면 하급 특성들은 모두 다 특정 직업군으로 표기됐다.
헨리는 잇달아 특성 룬을 사용했다.
[ <특성 : 마법사>를 획득하셨습니다. ]
[ <특성 : 암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
[ <특성 : 군주>를 획득하셨습니다. ]
[ <특성 : 상인>을 획득하셨습니다. ]
잇달아 4개의 하급 특성들이 추가되었다. 헨리는 획득한 특성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운이 조금만 따라 준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성장의 룬은 무색의 룬처럼 지정 성장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원하는 스탯을 얻고 싶다면 조합해야 될 특성들이 중요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현재 획득한 5개의 특성들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헨리는 이어서 성장의 룬을 꺼냈다.
이제는 정말로 특성 룬과 스탯을 합쳐 성장시킬 차례였으니까.
헨리가 성장의 룬을 사용하자……
[ <성장의 룬>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장의 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아카이브가 질문했고 헨리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 성장시킬 것을 선택해 주십시오. ]
성장의 룬이 성장시킬 스탯을 묻는다. 그 물음에 헨리는 우선적으로 ‘전사’ 특성과 ‘물리방어력’을 선택했다.
[ 선택하신 것들이 맞습니까? ]
맞다.
그러자 또 한 번 상태창이 빛나고 새로운 알람이 떠올랐다.
[ <스탯 : 물리방어력>과 <특성 : 전사>가 <스탯 : 방어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
새로 획득한 스탯은 ‘방어력’.
다행이었다.
방어력은 헨리가 꼭 얻어야 할 스탯으로, 중층에서 사용되는 방어력 스탯은 모든 종류에 대한 방어력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물리방어력은 물론 스킬방어력과 기타 다른 피해에 대한 모든 방어력들도 말이다.
물론 방어력 계열 스탯 중 하나인 ‘물리방어력’과 방어에 특화된 특성인 ‘전사’를 조합했으니 방어력 스탯이 나올 확률이 높긴 했다.
중층은 하층에 비해 스탯의 종류가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헨리는 계속해서 조합을 이어 나갔다.
[ <스탯 : 스킬공격력>과 <특성 : 마법사>가 <스탯 : 공격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
이어서 ‘공격력’ 스탯의 획득.
이 또한 어느 정도 예상한 바다.
이제 남은 건 암살자와 군주, 그리고 상인 특성. 스탯으로는 물리공격력과, 스킬방어력, 그리고 종합회복력 정도.
헨리는 잠시 고민 끝에 마저 조합을 이어나갔다.
[ <스탯 : 물리공격력>과 <특성 : 암살자>가 <스탯 : 관통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
[ <스탯 : 스킬방어력>과 <특성 : 상인>이 <스탯 : 친화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
[<스탯 : 종합회복력>과 <특성 : 군주>가 <스탯 : 지배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
모든 조합이 끝났다.
헨리는 갱신된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헨리 모리스 ]
- 신분 : 하층민, 이레귤러
- 특성 : 없음
- 공격력 : 1
- 방어력 : 1
- 관통력 : 1
- 수집력 : 1
- 지배력 : 1
- 어비스 포인트 : 225,025 ap
++
모든 스탯이 다시 1이 되었다.
허나 상관없다.
이제는 등급이 달라졌으니까.
헨리는 획득한 스탯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내 곧 고개를 주억였다.
‘모자란 것들은 또 확보하면 된다.’
헨리는 자신이 획득한 스탯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았다. 클레버의 기억 속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현재 얻은 것들이 최선의 결과가 아님은 알았지만 그래도 낙담하지 않았다.
최선이 아닐 뿐 최악은 아니었고 모자란 것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구해 나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럼 가 볼까 이제.’
중층으로 향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헨리는 고개를 들어 식스랜더 너머 넓게 펼쳐진 거대한 지평선을 보았다.
그곳은 이곳에서 흔히 ‘외부’라고 불리우는 곳이며 웨이브가 시작될 때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허나 저 외부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 외부가 바로 중층으로 향하기 위한 ‘중층로’가 있는 곳이라는 것.
다시 말해 중층으로 가기 위해선 저 외부를 뚫고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별로 걱정은 없었다.
클레버의 기억과 이곳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몬스터 웨이브의 주기는 비정기적이나 아주 짧아도 최소 열흘은 걸린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 웨이브가 일어난 것이 바로 오늘.
그때였다.
[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
갑작스럽게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건.
“이런.”
생각지도 못한 상황.
허나 상관없다.
제아무리 몬스터 웨이브라 할지라도 그래 봤자 어차피 수준은 거기서 거기.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아직까지는 모든 게 헨리의 손바닥 안이었으니까.
그 순간.
[ 웨이브 등급은 <마스터>입니다. ]
추가로 떠오르는 메시지.
그것은 식스랜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 등급의 웨이브가 일어났다는 걸 알려 주는 알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