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85화 (385/522)

# 385

결초보은 (6)

태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제국과 동맹을 맺게 된 이상 언젠간 문화적 교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제는 헨리의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며 알게 모르게 마법에 대한 좋은 인상을 품고 있던 차였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아닙니다. 태제님께서 제안을 수락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참,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태제님께서만 아셨으면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점은 염려치 마십시오.”

헨리는 헤라볼라와 마찬가지로 태제가 미래 예지에 대한 사실을 발설치 않도록 미리 입단속을 해 두었다.

이로써 홍월에 대한 은혜는 갚은 셈이다.

헨리는 태제와 악수를 나눈 뒤 별채를 나섰다.

‘이제 남은 곳은 제방뿐인가?’

제방의 경우엔 제국 십검과 맞서싸울 땐 참전해 주었지만 훗날 마지막 원정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처음의 고마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구별해야 할 건 구별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올에게 줄 선물은 진즉에 정해져 있었다.

헨리는 곧바로 도올이 머무르고 있을 제방의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에 도착하자 헨리를 알아본 제방 사신 중 한 명이 즉각 고개를 숙였다.

“대마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로……?”

헨리에게 고개를 숙인 사람은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더불어 귀뜸없이 방문한 헨리에게 적잖이 놀랐는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헨리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도올 님께 안부 인사를 여쭙고자 방문했습니다. 도올 님 안에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대마법사님께서 방문하셨다고 도올 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가 호들갑을 떨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채 안에 마련된 응접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응접실에는 도올을 비롯한 다른 사신들 모두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마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올을 비롯한 응접실의 모든 이가 예를 갖추어 헨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에 헨리도 격식을 갖추어 인사했다.

자리에 앉은 헨리가 말했다.

“모두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아침부터 이곳을 찾은 까닭은 단순히 제국 건국식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를 표하기 위함이니까요.”

“오오……! 역시 대마법사님이십니다.”

소레국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들 헨리의 방문에 감동한 표정들이었다.

헨리의 표정이 도올에게로 옮겨졌다.

헨리만큼이나 나이가 많았던 도올은 수십 년 전으로 회귀한 만큼 몹시 젊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앞을 볼 수 있군.’

미래에서 만났던 도올은 맹인이었다.

눈동자가 탁했고 탁한 눈동자는 세상을 보지 못했다.

대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여 제방의 현자라고 불리었다.

그래서 조금 어색했다.

미래에서 본 그의 외모는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현자처럼 한없이 인자했다.

하지만 앞을 볼 수 있는 지금은 여전히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현자보단 지략가 같은 이미지가 강했다.

헨리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방에 조그마한 선물을 하나 해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 말씀이십니까?”

“예, 잠시 도올 님과 단 둘이서만 이야기를 좀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헨리의 요청에 도올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응접실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도올이 물었다.

“허허, 대체 무엇을 주시고 싶으시기에 사람들까지 물리시는 겁니까?”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소소한 것입니다.”

“소소한 것이요?”

“예, 도올 님께선 혹시 동대륙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멈칫!

찻잔을 들어올리던 도올의 손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곧 경직되어 있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도올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도올이 물었다.

“……혹 어디서 동대륙에 대한 말씀을 들으신 게 있으신 겁니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헨리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도올은 더 이상 질문을 잇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멤돌았다.

침묵이 감돌자 헨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헨리는 도올과 자신 사이에 왜 이런 어색함이 멤돌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연합국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먼저 동대륙으로의 이주를 말한 건 다름 아닌 도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도올은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몹시 조심스러워 했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나?’

헨리는 처음부터 제방의 수장, 도올에게 줄 선물을 미리 정해 두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향수병에 걸려 있던 도올을 동대륙으로 데려다주는 것.

물론 동대륙에 완전히 정착할지, 아니면 잠시 땅만 밟아 보고 돌아올지는 도올의 몫이었다.

헨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를 동대륙으로 데려다주는 것뿐.

그리고 사실 선물이라기보다는 원래 주었어야 할 보상이 오히려 맞는 표현이었다.

헨리는 잠시 고민 끝에 말을 좀 더 조심하기로 했다.

현재 도올의 사연이 어떻든 간에 어찌 됐든 헨리는 지금 보은을 하러 온 입장이었으니까.

헨리가 말했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방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 되긴 했지만 현재 제방에 거주하시는 분들 모두가 동대륙에서 넘어오신 분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무슨 연유로 이곳 유라시아 대륙에까지 오게 되신 건진 잘 모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동대륙에서 넘어오신 분들 중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지는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

헨리는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도올은 대답을 아꼈다.

대신 눈빛으로 응대했다.

헨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동대륙, 즉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앓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제가 가진 힘으로 그 병을 치유해 드리면 어떨까 말입니다.”

“향수병을 치유해 주신다는 말씀은……? 설마!”

“예, 제 마법으로 동대륙 땅을 밟게 해 드린다는 말입니다.”

미끼는 던져졌다.

헨리는 도올에게 선물 상자의 내용물을 보여 주었고 선택은 도올이 할 뿐이다.

그리고 헨리의 말이 끝났을 때 도올의 눈빛에는 전에 보지 못한 경탄이 드리워져 있었다.

“…….”

도올의 입술이 오물거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금방이라도 말을 내뱉을 것만 같았던 도올의 입술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오물거리는 것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답답했다.

동대륙 땅을 밟는 건 도올의 오랜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올은 좀처럼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연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 사연 중에는 도올이 가진 사회적 위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동대륙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제방에 남은 주민들을 모른 척 내팽개치는 셈이 되고 만다.

도올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괴로웠다.

한번 동대륙 땅을 밟으면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염원이 얼마나 짙은지 알기에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해야만 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도올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가 말했다.

“도올 님.”

“예?”

“혹시 지금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나중에 대답해 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넘겨짚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혹시 다른 문제로 도올 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제안을 거절하시는 것이라면……. 그런 이유라면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황하는 도올.

어렵게 겨우 대답을 결정했는데 헨리가 먼저 입을 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가 말을 마쳤을 때 도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던 자신의 입장을, 헨리가 잘 헤아려서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도올의 떨리는 눈동자를 본 헨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헨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도올의 사정은 잘 모른다.

하지만 도올이 지금 하고 있는 눈빛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욕심을 참아야 하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헨리의 말을 들은 직후, 우물쭈물 하던 도올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올이 말했다.

“역시 대마법사님이십니다.”

“어떤 부분이 말씀이십니까?”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럼 말씀해 주신 대로 지금 저에게 해 주신 이 제안은, 당장이 아닌 나중에 따로 대답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올은 헨리의 배려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언제든지 도올 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예?”

티타임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헨리는 도올에게 확답을 받은 뒤 마지막으로 검지를 들어 오른쪽 눈 언저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눈 건강, 조심하세요.”

“눈 건강이라니요?”

“별 뜻은 없습니다. 나중에 고향 땅을 밟았는데 실명이라도 되어 있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좀 전에 도올 님께 드렸던 제안은 저만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그럼.”

헨리는 간단한 목례 후 별채를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선 미래 예지를 들먹이며 눈 건강을 조심하라고 일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도올은 이제 고향땅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건강에 유념할 테니까.

이로써 다섯 동맹국 모두에게 은혜를 갚았다.

속이 후련했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것 같아 기분이 홀가분해진 헨리가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제 한동안은 일만 하면 되겠구만.”

헨리의 걸음이 마탑으로 옮겨졌다.

* * *

몇 년이 지났다.

제국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건국 이래 유래없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매일이 황금기였다.

그사이에 헨리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8서클을 이뤄 낸 최초의 마법사임을 발표했다.

모두가 놀라움에 경탄했지만 헨리는 이미 경험한 반응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대신 과거에는 몇 년은 더 걸렸을 일들, 예컨대 제국을 이롭게 하는 정책적인 부분이나 제국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할 기타 세부적인 사항들에 집중하여 원래는 몇 년은 더 걸려야 할 일들을 앞당겨서 이루어 냈다.

이 업적으로 헨리의 위상은 과거보다 몇 배나 더 올라갔으며 제국민들은 쉴 새 없이 헨리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럼에도 헨리는 쉬지 않았다.

헨리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들 중 가장 큰 실수가 바로 적당한 선에서 할 일을 마무리 짓고 은퇴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황궁의 중심에서 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골든의 반발은 없었다.

오히려 국정 돌보기가 귀찮았는데 잘됐다며 몹시 좋아했다.

물론 헨리가 국정의 대소사를 도맡아 한다지만 최종 결정은 골든이 내리게 했다.

헨리는 어디까지나 골든을 도와줄 뿐이지 황제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골든이 아주 놀고 먹는 건 아니었다.

헨리는 골든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주었기 때문이다.

“허리 펴!”

날카로운 음성이 연무장을 가른다.

골든의 목소리였다.

골든은 편안한 복장을 하고서 목검 한 자루를 교편처럼 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다시!”

“핫!”

다른 목소리가 숨 가쁘게 연무장을 가른다.

연무장에는 골든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골든의 앞에는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목검을 휘두르는 실버가 있었다.

헨리가 골든에게 맡긴 아주 중요한 임무.

그것은 다름 아닌 과거, 아비 없이 자랐던 실버에게 이번에는 올바른 가치관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헨리는 소리 없이 연무장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다음 비 오듯이 땀을 뻘뻘 흘리는 실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역시 인성 개조에는 땀 흘리는 게 최고지.’

물론 골든에게 자식 교육 전부를 맡긴 건 아니었다.

골든은 검술을 비롯한 육체적인 부분을, 헨리 자신은 지식을 비롯한 인성을 교육했다.

어찌 보면 귀찮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헨리에게 실버의 교육은 귀찮은 일 따위가 아닌 아주 재미난 여흥 중 하나였다.

‘교육이 끝날 때쯤엔 역사상 유래 없는 최고의 황제로 만들어 주마.’

교육을 가장한 훈육.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헨리는 마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밀 저택에는 여전히 네프람 교단이 기거하고 있었고, 탑의 아래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제국민들의 편리함을 위해 생활 과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헨리는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런 다음 간만에 계획표를 집어 들었다.

계획표를 확인한 헨리는 이어서 마탑 인명부를 집어 들었다.

인명부를 몇 장 넘기던 끝에 어느 지점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이제 슬슬 이놈을 찾을 때가 됐군.’

제국이 건국되고 몇 년이 지났다.

필요한 기반이나 시설들은 모두 설립되었으며 이제 남은 건 제국을 더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것뿐이다.

그 말인즉슨, 드디어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헨리는 슬슬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기로 했다.

헨리의 계획표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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