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비운의 천재 (1)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은 마탑의 최고층, 오직 탑주만이 드나들 수 있는 방.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 절벽처럼 까마득하게 펼쳐진 탑의 아래가 보였다.
탑은 거대했다.
처음에 지었던 마탑이나 미래에 지었던 설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탑 내부의 허공 곳곳에 부유석들이 날아다닌다.
저것은 때때로 계단이나 이동 수단이 된다.
그리고 떠다니는 부유석들 근처에는 불규칙한 패턴으로 문들이 나 있었다.
문들은 가장 아래층부터 낮은 서클 순으로 주어진 마법사들의 개인 연구실들이었다.
물론 가장 낮은 서클이라고 해도 최소 4서클은 되어야 개인 연구실을 배정받을 수 있다.
헨리는 자신의 연구실 문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유석을 끌어당겨 두 발을 올렸다.
“이동.”
명령과 동시에 마력을 주입하자 부유석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부유석이 아래로 낙하했다.
부유석이 아래로 낙하하는 동안 연구실 바깥에서 일하던 마법사들이 헨리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마법사님!”
“그래.”
헨리는 옅은 미소와 함께 짤막하게 대꾸했다.
누구 하나 헨리에게 인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탑을 지을 때부터 헨리가 권위 의식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것 같군.’
어린 마법사들의 스스럼없는 인사에 헨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권위.
옛날에는 높은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이 권위 의식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권위는 곧 위엄과 같았으며 때때로 그 사람을 더 가치 있어 보이도록 해 주었으니까.
특히 마법제일주의에 입각했던 헨리는 권위 의식과 더불어 선민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철이 없었지.’
물론 지금은 후회하는 과거 중 하나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 현재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고.
그렇기에 헨리는 이제 더 이상 권위 의식도 선민의식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들보다도 헨리가 권위 의식을 빠르게 무너뜨리려 했던 까닭은 다름 아닌 권위자가 가지는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권위자가 다 그런 분위기를 가진 건 아니다.
하지만 보통 어떠한 분야의 입문자들은 막연히 그 분야의 권위자를 신격화하여 스스로 권위자를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렇기에 함부로 권위자에게 말을 걸거나 어떠한 부탁을 하는 것에 굉장히 큰 어려움을 가진다.
헨리는 그런 것들이 권위자에게 가지는 억울한 선입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그런 선입견을 타파하고자 늘 웃는 얼굴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마탑 자체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헨리의 계획표에 적힌 ‘어떤 한 사람’ 때문에 말이다.
부유석이 멈춰 섰다.
헨리가 디딘 부유석이 멈춰 선 곳은 마탑 내에서도 하층부에 속하는, 어느 마법사의 개인 연구실 앞이었다.
헨리의 시선이 연구실 옆에 달린 이름패로 옮겨졌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헨리는 이름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나무로 만들어진 문 특유의 경쾌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끼이익-.
문이 열렸지만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
연구실 내부를 어둡게 해놓은 탓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어둠 사이로 귀신이 보였다.
“……대마법사님?”
귀신이 말을 했다.
아니, 그는 귀신이 아닌 큰 키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긴 머리를 가진 ‘드라칸 로티크’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였다.
헨리를 본 드라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그러나 헨리는 그의 표정에 아랑곳 않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차 한잔하겠는가?”
제국이 건국되고 몇 년, 헨리는 드디어 드라칸을 만날 준비를 끝마쳤다.
* * *
드라칸의 연구실에서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헨리의 시선이 힐끗 드라칸의 연구실을 훑는다.
책상 몇 개와 책으로 가득 메워진 책장들.
여느 마법사들의 연구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헨리가 말했다.
“자네가 지금 1등 마법사인가?”
“그렇습니다.”
“왜 갑자기 자네를 찾아왔는가 싶지?”
“……예?”
“그냥 궁금했네. 인명부를 열람하다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거든. 자네, 4서클을 이룩한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보조 마법사를 한 명도 두지 않았던데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나?”
4서클은 탑 내에서 1등 마법사로 불린다.
다른 말로는 수석 마법사.
5서클부터는 마도사로 불리며 6서클은 아크 메이지로 불린다.
그리고 1등 마법사부턴 3서클 이하의 마법사를 조수로 둘 수 있었는데, 드라칸은 특이하게도 여지껏 단 한 명의 보조 마법사도 둔 적이 없었다.
드라칸이 말했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개인 연구가 생각보다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나보군.”
“그렇습니다.”
개인 연구.
연구실을 배정받은 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한 가지 이상의 연구를 해야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의 무궁한 발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사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마탑에 보고할 의무는 없었다.
마법사들의 연구는 비밀을 보장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차를 홀짝이며 드라칸을 응시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연구실 속에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흐린 눈동자로 자신을 응대하는 1등 마법사.
특징들만 나열해 놓고 보면 뭔가 문제가 있을 법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이런 부류의 마법사는 탑에서 꽤나 흔한 축에 속했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참 신기했다.
‘이런 놈이 그런 미친놈이 될 줄은 몰랐지.’
맹신자.
신이 된 헨리도 어찌 못 했던 최악의 재앙.
그 업적 하나만으로 드라칸은 대륙 최악의 마법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헨리는 그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드라칸을 찾아온 것이다.
헨리가 말했다.
“드라칸.”
“예, 대마법사님.”
“자네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연구, 혹시 나에게도 보여 줄 수 있겠나?”
“대마법사님께 말입니까?”
“그렇네.”
드라칸의 탁한 눈동자가 옅게 떨린다.
그러나 떨림이 오래 가진 않는다.
눈동자가 떨린 시간은 찰나에 가깝다.
찰나가 지난 후 드라칸이 즉각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드라칸은 의외로 순순히 승낙했다.
그리곤 곧바로 뒤편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헨리에게 내밀었다.
드라칸이 말했다.
“저는 이 고서를 해독하고 있습니다.”
“고서 해독?”
흔들림 없는 눈동자.
원래도 변화가 잘 없는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그의 얼굴에서 진실을 읽어냈다.
아마도 저 말은 진실일 것이다.
헨리는 드라칸의 얼굴을 슬쩍 흘겨본 뒤 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고서 옆에는 고서를 해독한 것으로 보이는 연구 노트가 한 권 끼워져 있었다.
헨리는 고서를 훑어보았다.
언어가 고대 룬어로 이루어진 것이 진짜 고서가 맞았다.
그것도 1등 마법사가 해독하기엔 꽤나 난이도가 있는 고서였다.
하지만 헨리는 이것이 드라칸의 진짜 연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서를 훑어본 헨리가 탁 소리가 나게 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대단하구만, 이제 겨우 4서클이면서 이 정도 수준의 고서 해독이라니…….”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하지만 해독 실력과는 별개로 거짓말에는 서툴구만.”
“예?”
“이건 위장이잖나? 진짜 연구를 감추기 위해 하는.”
흔한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생각지도 못 한 찌르기에 드라칸의 눈동자가 다시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떨림은 찰나와 같다.
“……저는 대마법사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준비해둔 대답이 드라칸의 입에서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드라칸의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헨리는 분명히 보았다.
좀 전에 마주친 눈동자의 찰나의 흔들림을.
헨리는 그 떨림을 보았고 그래서 더더욱 확신했다.
하지만 결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여기서 심리적으로 압박한다면 애써 몰아놓은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튈 테니까.
헨리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누군가에게 제보를 받아 자네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니까. 나는 단지 자네의 연구에 흥미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뿐이야.”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마법사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지금 만약 내게 자네의 연구를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비밀리에 자네의 연구를 지원해 주도록 하겠네.”
“……예?”
헨리의 제안을 들은 드라칸의 표정이 변했다.
눈동자나 겨우 떨리는 그런 변화가 아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그런 확연한 차이였다.
그리고 저러한 반응으로 인해 드라칸은 자신의 거짓말을 실토하게 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드라칸이 표정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지만 이미 속내를 들킨 뒤였다.
헨리가 말했다.
“드라칸 로티크,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건가? 무엇이 두려워 내게 솔직하지 못하는 건가?”
헨리는 일관된 태도로 드라칸을 대했다.
헨리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모든 마법사들의 지적 호기심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만약 마법사가 지적 호기심을 규제받는다면 마법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할 테니까.”
“대, 대마법사님……!”
드라칸의 동공이 확장됐다.
헨리가 권위주의에 찌든 인물이 아니란 건 잘 알았지만 마탑을 만들고 황궁을 움직이는 인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헨리에 대한 선입견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드라칸은 눈을 감았다.
몇 마디뿐인 말이었지만 그 말이 주는 충격은 꽤나 거대한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긴 생각이 필요했다.
드라칸이 눈을 감고 장고에 빠졌다.
‘결국……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건가?’
헨리의 사상과 자신에 대한 배려에 감동받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더 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연구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심히 비인륜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더 잡아뗐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드라칸은 헨리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드라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할 것 없네. 자네가 어떤 연구를 하든 화내지 않을 터이니 내게 자네의 연구를 보여 주겠나?”
헨리는 마지막까지 드라칸이 겁먹지 않게 노력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드라칸의 비밀 연구를 파헤칠 수 있었다.
드라칸은 이제 겨우 4서클에 불과한 어린 마법사였고, 헨리는 8서클에 달하는 대마법사였으니까.
하지만 헨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으로 끌어낸 진실보다 스스로 토해낸 진실이 더 많은 것들을 보여 준다는 걸 헨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심을 마친 드라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 순간, 뒤편에 서 있던 책장이 회전하며 숨겨진 문을 드러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비밀 문이 열리고 드라칸은 헨리를 안내했다.
문 속의 공간은 헨리가 연구실 한편에 마련한 비밀 저택과 비슷한 구조였지만 원리 자체는 달랐다.
드라칸은 이제 겨우 4서클.
공간 마법은 아직 무리였기 때문이다.
‘직접 굴을 파서 비밀 연구실을 만든 모양이군.’
그렇기 때문에 드라칸의 비밀 연구소는 헨리의 비밀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안내받은 비밀 연구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드라칸이 연구실에 불을 밝혔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헨리는, 비밀 연구실 중앙에 놓인 침대에 뉘여 있는 어느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시체?’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시체처럼 보였다.
시체는 바른 자세로 누워 있었고 머리카락을 포함한 전신의 털이 모두 밀려 있는 상태였다.
드라칸이 시체 앞에 서서 말했다.
“대마법사님. 저는 인간학을 전공한 마법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신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속 말해 보게.”
“하지만 인륜을 우선시하는 마탑에서 인간학은 좀처럼 발전시키기 어려운 학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학을 연구하더라도 정작 인간의 신체를 살펴볼 기회는 없기 때문이죠.”
“일리 있는 말이야. 확실히 마탑에선 인간의 몸을 연구 교보재로 삼는 걸 금지하고 있으니까. ……한데 여기 눈앞에 있는 이 시체는 누구인가?”
헨리의 시선이 침대에 뉘여 있는 시체로 옮겨졌다.
이에 드라칸의 시선이 창백하게 굳어 있는 시체로 옮겨졌다.
그의 눈썹이 좁혀졌다.
왠지 모르게 슬픔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라칸의 입에서 어렵사리 대답이 떨어졌다.
“이 사람은…… 저의 친형입니다, 대마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