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
결초보은 (5)
‘샤하트라는 이 정도면 됐고.’
헤라볼라에게 해 줄 말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는 유능한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남자였으니까.
그러니 더 이상의 걱정은 무의미했다.
헤라볼라가 미치지 않는 이상, 알아서 잘 해결할 테니까.
또한 헤라볼라가 헨리의 미래 예지 능력 같은 걸 발설하고 다닐 걱정 또한 하지 않았다.
헨리의 미래 예지가 외부로 새어 나가 봤자 그에게 딱히 좋을 건 없었으니까.
‘남은 건 헤라볼라의 단명을 막는 것뿐인가?’
헤라볼라는 헤라리온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는 병으로 단명했다고 들었다.
그것이 샤하트라 왕조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헤라볼라가 무병장수했다면 직접 헤라리온을 가르쳤을 것이고, 왕권 또한 일찍 물려주지 않아 약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훈수를 마친 헨리는 식사를 금방 끝내고 심경이 복잡해진 헤라볼라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씩 날 찾아 와. 혹시라도 다른 미래를 보게 되면 미리 알려 줄 테니까.”
“……고맙네.”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헨리가 정말로 미래를 볼 줄 아는 건 아니었지만 1년에 한 번씩 헤라볼라의 행보를 점검하며 미래를 바로 잡는데 도움을 줄 순 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라고 말한 것이다.
격려를 마친 헨리는 방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건 세 곳 정도인가?’
헨리에게 힘을 모아 주었던 이들은 많다.
그중 동맹국의 숫자는 총 다섯.
그중에서 아마리스의 헬라와 샤하트라의 헤라볼라에게 은혜를 갚았으니 이제 남은 동맹국은 세 곳뿐이었다.
헨리는 남은 세 개의 동맹국들 중 두스카인은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스카인을 통치하는 초완족은 분명히 헨리를 도와주긴 하였으나 두스카인은 힘에 의한 질서로 통치자를 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두스카인의 통치자는 초완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현재의 초완족을 도와주지 않더라도 언젠간 두스카인의 왕좌를 꿰차게 될 테니 그때 은혜를 갚아도 늦지 않았다.
‘그때 도와줘도 늦지 않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곳은 두 곳.
소레국과 제방뿐이었다.
헨리는 두 동맹국들 중 소레국을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아마 이 시기의 소레국은 천강이 태제로 있을 때였지, 아마?’
샤하트라는 왕을 칸이라고 불렀고 소레국은 왕을 태제라고 불렀다.
태제의 자식은 태자라고 불렀으며, 미래에서 환생한 후에 만났던 태제는 현 태제의 셋째 딸인 홍월이었다.
당시의 홍월은 어렸다.
그래서 좌사와 우사가 국정을 도맡아 처리했는데, 지금은 그로부터 수십 년 전이니 아직 홍월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지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홍월의 은혜를 갚기 위해 태제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천강의 위치를 수소문해 보니 헤라볼라와 마찬가지로 황궁에서 내준 손님 전용 별채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거리가 별로 멀지 않아 금방 걸음을 옮겼다.
별채 앞에 도착하자 소레국의 수호신, 대장군이 태제의 처소를 지키고 있었다.
헨리를 알아본 대장군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마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아침부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인사성이 바른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장군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헨리가 아는 대장군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군, 태제뿐만이 아니라 대장군도 세대가 교체되었어.’
수십 년 전이니 미래에서 만났던 젊은 대장군은 현재 아직 칼을 쥐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장군이 예를 갖추자 헨리 또한 예를 갖추어 말했다.
“그냥 단순히 안부 인사나 물을 겸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일정이 바쁜 탓에 태제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죠.”
헨리의 말에 대장군이 짐짓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대장군의 심기를 울린 모양이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태제님을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대장군의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대장군은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태제를 부르기 위해 서둘러 사라졌다.
그렇게 헨리가 태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대마법사님! 안녕하십니까!”
“음?”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들린 것은.
헨리는 낯선 목소리를 듣고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기에요!”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
요청대로 이번에는 시선을 좀 낮추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정복을 입은 꼬마아이 한 명이 헨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씩씩한 남자아이였다.
‘애?’
이곳은 소레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별채다.
그리고 소레국에서 온 손님들은 대부분이 제국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초대된 귀빈들.
물론 형식상 소레국 왕궁 전체에 초대장을 돌리긴 했다.
그런데 초대장을 받고 방문한 인물들 중에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을 줄은 몰랐다.
‘일태자인가?’
헨리는 자연스럽게 일태자를 떠올렸다.
이태자나 삼태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일태자는 비교적 빨리 태어났다고 들었으니까.
헨리가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헨리가 말했다.
“목소리가 씩씩하네. 이름이 뭐야?”
“유하입니다!”
“유하?”
유하.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헨리는 얼마간 기억을 뒤지던 끝에 유하가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 그 미래의 대장군!’
미래의 태제, 홍월을 보좌하던 대장군의 이름이 바로 유하다.
헨리는 유하의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에 문득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얼른 입가에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래, 유하야. 넌 누굴 따라 이곳에 왔니?”
“아버님을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대마법사님! 제국 건국을 축하드립니다!”
“푸흡!”
이제 겨우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그 유하가 이토록 똘망똘망한 아이였다니.
헨리는 생각지도 못한 대장군의 귀여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아버님이라니? 아버님이 누구신데?”
“제 아버님의 함자는 유천입니다! 현재는 소레국을 지키는 대장군님이십니다!”
유천.
좀 전에 태제를 모시러 간 대장군의 이름이었다.
‘부자(父子) 모두가 대장군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집안이었군.’
2대째 소레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놀라움만큼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헨리의 입가에 진심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럼 유하도 아버지를 본받아 대장군이 되는 게 목표겠구나?”
“그렇습니다!”
“후후, 그럼 미래의 대장군님께 이 아저씨가 선물이라도 줘야겠는걸?”
“선물…… 말씀이십니까?”
선물이라는 말에 유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해도 애는 애다.
헨리가 아공간을 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를 도와 제국 십검에 맞서 싸웠던 대장군이다.
그런 은인이 아무리 어리다고 해서 모른 척 지나갈 순 없는 일이었다.
헨리는 아공간을 뒤적이던 끝에 선물로 줄 만한 물건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헨리는 손에 잡은 것을 아공간에서 빼 들었다.
“호오오…….”
유하의 눈엔 허공에서 물건이 튀어나왔으니 그저 신기할 것이다.
헨리가 아공간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단검’이었다.
마음 같아선 롱소드나 바스타드소드 같은 검다운 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유하의 어린 나이를 고려했을 때 지금은 단검 정도가 적당했다.
어차피 오랫동안 두고 볼 사이이니만큼 유하가 좀 더 자라면 더 좋은 검을 선물로 주면 됐으니까.
아공간에서 빼든 검은 장식이 수수했다.
헨리가 검 집에 담긴 단검을 유하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검의 이름은 충견이다. 충견은 한 번 주인으로 인식한 자가 나타나면 주인 이외에는 절대로 검 집에서 나오지 않는단다.”
“충……견.”
충견을 받아든 유하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그리고 이내 곧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헨리에게 큰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그래 유하야, 너의 키가 클 때마다 너에게 어울리는 검을 선물로 보내 주도록 하마.”
“저, 정말이십니까!”
아이들은 매년마다 키가 부쩍 자란다.
그리고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매년 검을 선물하겠다고 하니 대장군을 꿈꾸는 소년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충견을 받아든 유하는 몇 번이나 더 감사 인사를 올린 뒤 종종걸음으로 헨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척 보기에도 맑고 총명해 보였다.
아마 이변이 없다면 분명히 훌륭하게 자라 미래에 보았던 그 대장군이 될 것이다.
유하가 사라진 직후였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마법사님.”
유하의 아버지 유천이 나타났다.
유하가 다녀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헨리가 말했다.
“멋진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대장군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대장군님의 아드님이 제게 건국 축하 인사를 해 주고 갔습니다.”
“하하! 어린놈이 뭘 모르고 대마법사님께 무례를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을 어찌 무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드님께선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드님의 장래가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안부를 전한 헨리는 유천의 안내를 받아 태제가 기다리고 있을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별채의 응접실에는 천강을 비롯한 젊은 얼굴의 좌사와 우사가 천강과 함께 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가 나타나자 좌사와 우사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마법사님.”
“좌사님과 우사님이시군요. 두 분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물론 태제님도요.”
헨리의 인사에 태제도 인사를 했다.
태제는 얼굴선이 굵직굵직한 사내였다.
태제는 헨리와 마찬가지로 이미 아침 식사를 끝낸 참이어서 간단하게 차나 한 잔씩 나누기로 했다.
태제가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아침부터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대장군님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진즉에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이제야 인사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헨리의 인사에 태제가 놀랐다.
대장군에게 미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제국과 소레국이 동맹국 관계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관계일 뿐이다.
실상은 소레국이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약소국일뿐.
그렇기에 제아무리 태제가 소레국을 통치하는 왕족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지위만 놓고 보면 헨리가 한참이나 위였다.
그런데 그런 위치에 있는 헨리가 먼저 찾아와 안부를 먼저 여쭙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니 몹시 놀란 것이다.
헨리가 말했다.
“태제님, 혹시 태제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둘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혹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좌사와 우사는 잠시 자릴 좀 비켜주겠나?”
“예, 전하.”
헨리는 헤라볼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태제와 단 둘이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헤라볼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미래 예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단 말씀은…… 대마법사님께선 이제 미래를 보실 줄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능력이 부족해 불특정 다수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소레국에 대한 미래를 보게 되어 이렇게 태제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허허, 저희 소레국의 미래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꽤나 중요한 미래를 보았거든요.”
“어떤 미래를 보셨습니까?”
헨리는 이번에도 태제에게 미래 예지에 대한 거짓말을 했다.
미래 예지는 생각보다 편리한 거짓말이었으니까.
헨리가 짐짓 진중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태제님, 소레국은 먼 미래에 태제님도 피해 가실 수 없는 끔찍한 돌림병이 돌게 됩니다.”
“저도 피해갈 수 없는 돌림병요?”
“그렇습니다. 그로인해 태제님께선 병으로 일찍 승하하시게 되는데 태자님들도 돌림병을 피하지 못해 대가 끊기실 위기에 처하시게 됩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늘그막에 따님 한 분을 슬하에 두시게 되는데…….”
헨리는 미래에서 헨리가 보았던 소레국에 대해 말해 주었다.
병으로 일찍 죽게 되는 태제와 태자들, 그리고 혼자 남겨지는 홍월에 대해서 말이다.
우사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서스는 이미 죽었다.
변수가 없는 한 우사가 소레국을 배신할 일은 없을 터였다.
‘소레국은 대륙 내에서도 보기 드문 평화교 비수용 국가 중 하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의료 기술이 뒤떨어져 돌림병을 피하지 못한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돌림병 하나를 막기 위해 종교를 강요할 순 없다. 그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헨리가 말했다.
“태제님, 혹시 이번 기회에 저희 제국 마탑과 수교를 맺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마탑과 수교를요?”
“미래에 찾아올 돌림병은 소레국에 막대한 피해를 끼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희 마탑과 수교를 맺어 의료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분명히 그 위기를 넘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마탑과의 수교라…….”
헨리는 홍월에게 은혜를 입었지만 홍월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모른 체할 순 없으니 홍월이 가장 좋아할 만한 선물이 무엇일지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홍월이 가장 좋아할 만한 선물.
헨리는 그 선물로 태제와 태자들의 ‘목숨’을 선택했다.
‘어린 딸 혼자 피붙이도 없이 혼자서 왕국의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일 테니까.’
선물을 건네는 헨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