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
리버스 (2)
헨리의 펜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헨리의 펜촉은 춤을 추듯이 즐겁게 빙글거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헨리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래서일까?
동이 틀 때까지 지속될 줄 알았던 계획표 작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났다.
퇴고는 없었다.
이것은 계획표였지, 소설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헨리가 계획표를 작성한다는 건 이미 짜 놓은 계획들을 한 번 더 검토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노트를 덮은 헨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꽤 공들여서 썼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벌써 수십 년도 더 전에 일이었지만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떠났던 군의 일과표 정돈 훤히 꿰고 있다.
해가 뜬다고 해도 군 전체가 제대로 활동하려면 아직 4시간은 훨씬 더 남았다.
그리고 4시간이면 꽤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는데……. 이참에 가볍게 산보나 좀 다녀와야겠군.’
입에 걸린 미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막사에서 퍼질러 자고 있을 반가운 얼굴들을 당장에라도 깨우고 싶었지만 당장은 참기로 했다.
여기서 감회가 새로운 건 헨리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헨리는 참기로 했다.
수십 년을 못 본 얼굴인데 몇 시간 정도 만남이 늦춰진다고 한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헨리는 속에 걸친 내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로브를 재정돈한 뒤 위즈덤을 손에 꼭 쥐었다.
그런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하이드.”
몸을 투명하게 해 주는 마법.
헨리는 몸속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후에야 깨달았다.
‘그렇군. 이젠 9서클이 아닌 7서클이니 이래저래 신경을 좀 써야겠어.’
확실히 8서클을 이룬 직후부터 마법 사용에 대해 관대해졌다.
아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필요하다면 무작정 사용했다.
그 전에는 가진 마력이 한정적이라 마법 한 번을 써도 꽤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이 필요한 때였다.
헨리는 하이드 이외에도 기척을 지워 주는 마법을 포함해 갖가지 은신 마법들을 스스로에게 시전했다.
준비를 마친 헨리가 자연스럽게 막사 밖을 나섰다.
‘여전하네.’
아까는 막사 앞에서 병사를 마주치는 바람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은신 마법으로 누구와 마주칠 염려가 없게 됐으니 마음 놓고 주위를 노닐 수 있었다.
헨리는 막사 주위를 거닐며 몇몇의 반가운 얼굴들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다.
‘해후는 이 정도면 됐고…… 슬슬 움직여 볼까?’
그저 병사들 얼굴이나 보자고 은신 마법을 사용해 가면서까지 막사를 나온 게 아니다.
헨리는 가벼운 해후를 즐긴 후 곧바로 막사진을 벗어나 2급 구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헨리의 이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만약 현재 헨리의 동료들이 헨리의 행동을 보았다면 실성한 게 아니냐며 헨리를 붙잡았겠지만 헨리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는 이미 과거에 수차례나 마왕을 진압했고 필요에 의해 마물의 숲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또한 그때는 힘겹게 물리친 2급 구역의 마족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약점까지 모두 꿰차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에겐 지금 반드시 2급 구역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2급 구역에는 현 시점의 헨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녀석이 있었으니까.
이윽고 헨리가 3급 구역을 벗어나 2급 구역에 진입하는 순간, 피부를 비롯한 기관지가 더욱 더 따끔거렸다.
공기 중에 함유된 독소가 배가된 탓이다.
헨리가 손에 쥔 위즈덤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마력이 얼마나 소모되든 상관없으니까 이 거지 같은 기분 좀 없애 봐.”
우우웅.
짜증처럼 뱉은 말이었지만 위즈덤은 그것을 명령으로 해석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모될 마력량과 효율에 대해서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습관이란 역시 무서운 법이다.
헨리의 명령을 알아들은 위즈덤이 몸을 떨며 빛을 발했다.
그러자 전신을 압박하던 독소로부터 해방되었다.
대신 체내에 축적시켜 두었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길어야 사흘.’
그나마 헨리가 가진 마력량이 7서클이나 되니 사흘씩이나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흘이면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다.
헨리는 독소로부터 얻은 자유를 만끽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곳곳에 살기와 마기로 가득하다.
그렇잖아도 투기가 넘치는 곳일 테지만 현재 헨리가 돌아온 시점은 곧 마왕이 진격을 선언할 때이니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2급 구역의 독소로부터 자유로워진 헨리는 몇 가지 준비를 끝마친 후에야 후련하게 내뱉었다.
“하이드, 캔슬.”
갖가지 은신 마법이 해제되었다.
동시에 인간 특유의 살 냄새가 백 리 밖까지 퍼져 나갔다.
-키륵?
인간의 살 냄새라 하면 이곳에선 좀처럼 맡을 수 없는 것이니, 감각이 예민한 마물들이라면 대번에 헨리의 존재를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족 또한 마찬가지다.
헨리는 일부러 정체를 드러냈다.
제아무리 2급 구역 전체를 제패해 본 몸이라고는 한들, 단시간에 그것도 이렇게나 넓은 구역에서 헨리가 원하는 그 녀석을 찾아내기란 힘든 일이었으니까.
-키아아아아!
쿵! 쿵! 쿵!
헨리의 살 냄새를 맡은 대형 마물 하나가 괴성을 내지르며 헨리와의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지축을 흔들며 전신을 압박하는 위압감이 오감을 짜릿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맹수와 마주쳤을 때 인간이 느끼는 병적인 생리 현상 중에 하나일 뿐.
헨리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하기가 더할 나위 없었다.
쿵! 쿵! 쿵!
거리가 좁혀진다.
덩치가 큰 녀석이니 만큼 정체가 금방 드러났다.
“오!”
헨리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나왔다.
이마에 초승달 같은 뿔이 인상적인 고릴라 마물, 혼마였다.
“네가 일등이냐?”
과거로 돌아온 탓일까?
예전이라면 귀찮게 여겼을 혼마조차도 이젠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혼마는 괴성을 내지르며 헨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쩌엉-!
혼마의 주먹이 헨리의 지척에서 멈춰 선다.
쇠망치로 쇠종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혼마의 주먹이 헨리의 매직 실드에 가로막힌 것이다.
-키에에에에!
아팠던 것일까?
혼마가 다시금 괴성을 내뱉으며 주먹을 거두었다.
하지만 가진 근력에 비해 학습 능력은 저조한지 혼마는 곧바로 반대쪽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다시 한번 청아한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쩌엉-!
-키에에에에!
“쯧쯧, 멍청한 놈.”
퉁퉁 부은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픽 나온다.
그러나 확실히 과거로 돌아오긴 한 모양이다.
헨리는 고작해야 두 번의 공격에 뭉텅이로 빠져나간 마력량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마도사 시절에는 아크메이지를 기다렸고 아크메이지 땐 얼른 7서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9서클에서 7서클이 되자 과거에 자랑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경지가 얼마나 초라했던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생 후에 습득한 마력은 오러와 그 성질이 같아서 마력 주제에 강도까지 갖추었다.
그런데 현재의 마력은 말 그대로 마법사들이 가진 평범한 마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헨리는 혀를 차며 손바닥에 푸른 마력을 응집시켰다.
손바닥 위로 푸른색으로 빛나는 반달이 만들어졌다.
헨리는 그것을 들어 혼마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푸른 반달을 던진 직후, 헨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악!”
하마터면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전에 쓰던 감각 그대로 반달을 던졌을 뿐인데 이놈의 몸뚱어리가 어찌나 허약한지, 하마터면 어깨 탈골은 물론이고 손목 인대까지 늘어나는 줄로만 알았다.
헨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던 그 순간.
-꺽!
날아간 푸른 반달이 혼마의 미간에 정확히 박혀, 그 커다란 혼마의 숨을 일격에 끊어 놓았다.
쿵!
혼마가 쓰러지고 미간에 박힌 푸른 반달이 사라졌다.
마력으로 빚은 것이니만큼 오랫동안 그 형태를 유지할수록 헨리의 마력만 소모될 테니 얼른 없애는 편이 좋았다.
반달이 꽂혀 있던 자리로부터 보랏빛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여전히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래도 힘 하나는 쓸 만하네.”
-키에에에에!
그때였다.
혼마가 쓰러진 직후, 연이어 다른 마물들의 괴성이 들려온 것은.
헨리가 어깨 관절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쯧쯧, 돌아가는 대로 전신 마사지라도 받아야겠어.”
몰려드는 마물들을 보며 헨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볍게 다녀올 줄로만 알았던 산보가, 생각보다 훨씬 더 약골인 몸 상태 때문에 꽤 힘든 여정이 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 * *
“와, 간당간당했다.”
헨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싸움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하마터면 마력 고갈로 탈진해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효율적인 싸움으로 헨리는 어떻게든 몰려드는 마족과 마물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후…….”
일과를 마친 노동자처럼, 헨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묵은 숨을 토해 냈다.
헨리가 주저앉은 곳은 어느 마물의 사체 위였다.
그러나 그렇게 쌓인 시체의 수가 워낙에 많다 보니 어느새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헨리는 산처럼 쌓인 마물과 마족들의 사체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시체의 산 위에서 내려왔다.
산 밑으로 내려오자 시체더미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척 보기에도 지위가 높아 보이는 마족의 시체가 보였다.
놈의 이름은 베놈.
현재 헨리가 가장 필요로 하던 마왕군의 맹독군주였다.
‘예전이라면 후손을 위해 양보했겠지만.’
헨리는 손끝에 마력을 결집시켜 손 자체를 예리하게 만들었다.
‘살아 보니까 결국 나한테 쓰는 게 남는 거더라고.’
그런 다음 맹독군주 베놈의 가슴팍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손끝에 뜨뜻한 촉감이 밀려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손날은 베놈의 가슴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았다.
헨리의 손끝은 결국 헨리가 원하는 것을 만지게 되었다.
원하는 바를 손에 쥔 헨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힘줄과 혈관 등이 뒤엉키며 핏물과 함께 바깥으로 울컥 뿜어졌다.
뽑혀져 나온 것은 베놈의 심장이었다.
먹기만 하면 세상 모든 독에 면역이 되고 몸에 흐르는 피를 사상 최악의 맹독으로 바꿔 준다는 그 맹독군주의 심장.
베놈의 심장을 손에 넣은 헨리는 간만에 마주한 자신의 보물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재회는 짧았다.
헨리는 핏물조차 씻지 않은 그것을 단숨에 베어 물었다.
왈칵!
베어 물은 부위로부터 심장 가득히 고여 있던 핏물이 뿜어졌다.
옷이 더러워졌고 얼굴에 핏물이 튀었다.
그러나 헨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것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심장 하나를 모두 먹어치웠다.
몸이 뜨거워졌다.
심장을 섭취한 지 몇 분.
헨리는 나직히 위즈덤에게 내렸던 명령을 거두었다.
그러자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던 마력의 소모가 멈추었다.
헨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독하디독한 2급 구역의 공기를 있는 힘껏 폐부 속으로 집어삼켰다.
“후으으읍!”
집어삼킨 공기를 뱉었다.
상쾌하다.
따끔거림이 없고 몸이 해롭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씹어 삼킨 베놈의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 그래야지.”
베놈의 심장.
헨리가 그리는 새로운 청사진의 가장 기본적인 밑그림이 되어 줄 재료였다.
이로써 헨리는 다시 한번 독왕(毒王)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에게 있어 이 독의 힘은 헨리가 그릴 청사진의 수많은 선들 중 하나일 뿐, 결코 그림이 될 순 없었다.
헨리는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옮긴 곳에는 좀 전까지 헨리가 해치웠던, 산처럼 쌓인 마물과 마족 들의 사체들이 있었다.
마력을 수급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헨리는 환생한 직후에는 노예들을 시켜 블랙 티어를 만들게 했다.
독성이 짙어 다른 마법사들은 섣불리 쓰지 못하는 방법이지만, 독에 면역이 있는 헨리에겐 가장 깔끔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없고 깔끔함을 따질 새도 없다.
지금 헨리가 가진 것은 세상 모든 독에 대한 면역력과 촉박한 시간뿐이었다.
그러므로 원래대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시간 단축을 위해 헨리는 비위를 조금만 버리기로 했다.
“……오늘 밥은 다 먹었네.”
고위 마물과 마족들의 심장.
그 안에 맺힌 독성을 중화하고 심장에 맺힌 마력만 잘 흡수할 수 있다면 그들의 심장은 훌륭한 마력 공급원이 된다.
헨리는 부족한 마력을 보충하고 하루라도 빨리 8서클이 되기 위해 저들의 심장을 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