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73화 (373/522)

# 373

리버스 (1)

씨익.

헨리의 대답을 들은 주신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주신은 헨리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니 마치 헨리가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형이 어찌 됐든 주신은 만족스러웠다.

“이제야 솔직해지는구나.”

잘난 체하며 미친 듯이 독주해 왔지만 결국 헨리는 아직도 인간의 때를 벗지 못한 셈이었다.

주신은 만족스러운 눈길로 헨리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헨리는 죄를 고백한 사람처럼 미약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동시에 이따금씩 곁눈질로 주신의 눈치를 보았다.

미숙하다.

모든 행동들이 미숙했기에 그런 행동들 모두가 주신에겐 그저 어여삐 보였다.

헨리를 어여삐 여기던 주신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 진짜 소망은 무엇이냐?”

“제 소망은…….”

소망.

시간의 힘이란 게 존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맹신자 문제의 해결에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시간의 힘만 있으면 언제 끝날지 모를 그 끔찍한 실험을 중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따금씩 적막이 찾아올 때면 헨리는 맹신자가 아닌 다른 것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누구나 시간과 관련된 망상은 한번쯤은 해 보기 마련이었으니까.

가령 미래의 내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한다든가, 시간을 정지할 수 있다면, 혹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찌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구미가 당기는 것은 단연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선택의 연속만 있을 뿐.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바로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실수를 바로 잡는다면,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주신이 헨리에게 소망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헨리의 망상은 계속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맹신자를 넘어 아서스를 넘어, 자신이 사형당하는 그날로.

그러나 이왕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사형당하기 전으로 갈 것이다.

아니, 좀 더 욕심을 내서 아서스의 정치 음해가 시작될 때쯤일 수도 있다.

거기까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개국공신 파였던 동료들의 개죽음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더불어 유약했던 자신의 성정을 뜯어고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에’에는 끝이 없었고 헨리의 욕심은 계속해서 시간을 되감아 갔다.

헨리가 대답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주신이 한 번 더 헨리의 이름을 불렀다.

“헨리.”

머릿속이 어지럽다.

여태껏 시간의 힘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목과 천신의 목을 베어 가면서까지 왔는데,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헨리는 맹수에게 쫓기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대체 언제 적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하지?’

딱 한 번이었다.

딱 한 번 시간의 힘을 빌려준다고 하니 최대한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심사숙고하기엔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닥친 일이었다.

주어진 시간 자체가 촉박한 것이다.

주신의 시선이 헨리에게 닿았다.

헨리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주신의 눈빛이 부담을 주기 위함이 아닐지언정 지금 이 순간만큼은 헨리에게 있어 가장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상황과 추억, 고통과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는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때?”

“그렇습니다.”

“……때라.”

주신은 헨리의 대답을 곱씹었다.

재밌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흔적이 보여서였다.

그리고 주신은 정말로 헨리에게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주신이 말했다.

“좋다, 헨리.”

“……예?”

“너의 그 소망, 확실하게 알았으니 그때로 시간을 되감아주마.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소망을 들어준다는 말에 헨리의 두 눈에 희망이 스쳤다.

그러나 말꼬리 끝에 조건이 붙었다.

그래서 기쁨을 절제하고 조건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어떤…… 조건 말씀이십니까?”

“네가 원하는 그때로 시간을 되돌려 주마. 하지만 지금 가진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지금 제가 가진 것들이요?”

“그래. 예를 들면 신력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헨리가 지금 가진 것들.

생각해 보면 헨리는 지금 가진 것들이 많았다.

헨리의 성을 따서 새롭게 세운 왕국을 비롯해 신력이나 신도, 그리고 마신에게서 넘겨받은 차원의 힘이나 그로 인해 생겨난 아홉 번째 서클까지.

그러나 주신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까지도 말이다.”

주신이 검지를 들어 헨리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심장이 있는 위치다.

주신이 심장이 있는 자릴 가리키자 헨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은 그대로다. 난 네 심장을 원한다, 헨리. 아, 물론 네 심장 전부가 필요하단 건 아니다. 난 네 심장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주신은 곧 검지와 엄지를 손톱만큼의 크기로 오므려 보였다.

그래도 꺼림칙하다.

헨리가 짐짓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혹……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후후, 안 알려줄 거다, 이놈아.”

“예?”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 넌 지금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네가 단순히 시간을 되감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감정적인 문제일 수도 있단 얘기다.”

“감정적……? 아닙니다! 이건 그동안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문제입니다.”

“정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흐음, 이상하구나. 남들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인데 너는 왜 그리 과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구나.”

헨리는 대답 대신 말을 아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아도 안다.

헨리의 표정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주신이 말했다.

“좋다. 하지만 시간을 돌리되 네가 과거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가진 너의 ‘기억’뿐이다. 그 외의 것들은 이곳에 놔두고 가야 해.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다, 헨리. 정말로 그때로 되돌아가길 희망하는 것이냐?”

“저는…….”

마지막 물음.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변만 완료하면, 꿈처럼 여기던 일이 현실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주저할 수가 없었다.

헨리가 말했다.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알겠다.”

헨리의 대답을 들은 주신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헨리와 포옹했다.

그 순간, 헨리는 심장에 관통상이라도 생긴 듯 격렬한 고통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불에 타 재만 남은 형상처럼, 헨리의 몸이 잿빛이 됐다.

마치 화산재를 덮어쓴 듯, 앞으로 몸이 고꾸라진 채 굳어버린 헨리를 보며 주신이 말했다.

“어디 한번 지켜보마, 네 선택을.”

말을 마친 주신이 손끝으로 헨리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사아아…….

그러자, 헨리의 육신이 바람에 흩날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쿨럭, 쿨럭.”

목이 따가운 게 가시를 삼킨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침이 자꾸만 나왔다.

결국 기관지의 뻑뻑함을 견디지 못한 남자는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띵하다.

시야가 흐린 것이 전신도 찌뿌둥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낯익은 담요와 천막 같은 것이 보였다.

남자는 몽롱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던 끝에 건너편에 붙은 ‘거울’로 시선이 갔다.

그런데, 거울을 응시한 남자는 곧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어?”

남자는 놀란 눈초리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것.

그리웠지만 꿈이라고 여겼던 것.

그것은 어느 변두리 가문의 장남의 얼굴이 아닌 대현자라 일컬어지던 헨리의 ‘원래 얼굴’이었다.

헨리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동공은 확장되어 있었지만 입꼬리는 자꾸만 하늘을 찔렀다.

성공한 것이다. 아니, 돌아온 것이다.

주신이 소망을 들어주었다!

헨리는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르고 앙상하기 짝이 없는 육체.

그 앙상함을 가리기 위해 헨리는 늘 어깨선이 길게 난 로브를 걸치고 다녔다.

맞았다.

전생의 헨리는 마법우월주의에 빠져 육체 단련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기본적인 무술 정돈 할 줄 안다.

그러나 그것도 진짜들에겐 별 볼 일 없는 호신술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육체가 앙상하든 말든 헨리는 과거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으니까.

“쿨럭, 쿨럭!”

그 순간, 기침이 났다.

텁텁한 기관지 때문이었다.

헨리는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깨달을 수 있었다.

헨리는 서둘러 근처의 내갑을 입고 로브를 걸친 뒤 자신의 유일한 보구, ‘세상의 지혜’인 ‘위즈덤’을 찾았다.

위즈덤은 구석에 잘 세워져 있었다.

위즈덤을 집어든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신선한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며 텁텁했던 기관지를 말끔하게 청소해 주었다.

헨리는 기관지에서 나온 이물질을 입에 한껏 모아 소리 나게 퉤 뱉었다.

먼지인지 뭔지 모를 검은 것들이 가래와 함께 바닥에 탁 붙었다.

이어서 헨리는 방문 밖으로 나갔다.

후우웅!

두터운 가죽으로 된 막사의 문을 걷어내자, 거친 바람이 막사 안으로 불어닥쳤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따가웠다.

또한 하늘은 보랏빛이었으며 주변엔 헨리의 녹색 막사와 비슷한 막사들이 즐비해 있었다.

막사들을 본 헨리는 치솟는 입고리를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에 쥔 위즈덤을 꽉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왔구나, 정말로 돌아왔어……!”

따가운 공기와 보랏빛 하늘.

이곳은 마물의 숲이었다.

그리고 현재 헨리가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3급 구역.

공기보단 독소가 더 짙어서, 수많은 사제들이 애써 정화의 결계를 쳐 두어 간신히 호흡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현재의 헨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비루한 몸뚱이와 더불어 베놈의 심장을 먹지 않아 맹독에 한없이 취약한 상태였다.

“충성. 대마법사님, 일어나셨습니까?”

“아아…… 그래.”

감회에 젖어 있는데 인근을 순찰하던 경계병이 헨리에게 경례를 올려붙인다.

헨리는 자연스럽게 경례를 받아 주었다.

병사가 말했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좀 더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간 맞춰서 제가 깨워 드리겠습니다.”

“그럴까?”

“예, 그러십시오.”

병사의 권유에 헨리는 그제야 머릿속 회로가 제 할 일을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헨리가 병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깨워 줄 필욘 없어.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쇼, 충성.”

병사는 의례적으로 경례를 하고 사라졌다.

헨리는 다시 막사 안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마물의 숲의 지도와 그것을 본 떠 만든 전략 지도, 그리고 군단의 온갖 병력을 축소해 만든 모형들이 올라가 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에는 수많은 잉크 자국들이 번져 있었다.

헨리의 기억에 의하면 이것들은 한 명이라도 더 우리 군의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매일 같이 머리를 쥐어짜 내던 증거였다.

헨리의 시선이 지도를 훑었다.

현재 헨리가 있는 곳은 3급 구역.

1급 구역은 물론이고, 마계의 틈까지 닫아 본 적이 있는 헨리에게 이런 지도 따윈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다.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잡구들이 아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 대신 헨리는 가죽 커버로 만들어진 하드커버 노트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그런 다음 깃펜을 집어 들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계획표를 짜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시간이 부족하면 다음 날 밤에 또 쓰면 될 일이다.

이제 헨리에겐 장미빛 미래만이 남아있을 예정이었으니까.

여전히 치솟은 입꼬리와 함께 헨리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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