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
신 (5)
‘야누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존재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헨리는 즉시 신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언제든지 야누스의 공격을 되받아칠 수 있게끔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야누스는 등유처럼 끈적이는 기름 웅덩이 안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멀끔하게 빚어졌던 야누스의 머리가 다시 허물어졌다.
손이 커졌다가 줄어들었으며 때때로 가슴이 부풀었다가 무너지기도 했다.
야누스는 점액질 가득한 기름 그 자체였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헨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형체를 변화시키는 야누스를 응시했다.
‘이게 대체…….’
혹 야누스의 형상을 흉내 낸 주신의 피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놈으로부터 느껴지는 미약한 신력은 분명히 야누스의 것이 맞았다.
그래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헨리는 제멋대로 커졌다가 줄어드는 녀석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놀란 감정이 추슬러졌다.
감정이 추슬러지자 헨리는 야누스가 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주신의 암시일까?
하지만 주신은 헨리 앞에 야누스를 보여 줌으로써 헨리에게 대체 무엇을 알리고 싶은 것일까?
도저히 주신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주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눈앞의 야누스는 여전히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하며 비명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헨리는 그런 야누스를 계속해서 관찰했다.
처음에는 야누스가 왜 저러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뱉는 소리는 비명과 신음, 그리고 정확힌 발음이라 할 수 없는 막연한 괴음뿐이었다.
그렇게 지켜보기를 한참, 헨리는 문득 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신에게 도전하려 했던 야누스는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칸의 눈을 통해 라를 만났을 때, 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다.
오래된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헨리는 눈앞의 야누스가 진짜 야누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놈은…….’
끝없이 괴로워하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녀석.
헨리는 그제야 야누스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했다.
따지고 보면 눈앞에 있는 야누스 때문에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그가 고통받고 있는 꼴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신기했다.
아니, 묘했다.
맹신자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따지고 보면 눈앞의 야누스에게 분노해야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야누스를 보고 있자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녀석이 고통받고 있어서일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단 좀 더…….’
똑똑-
그때였다.
분명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문이 어느새 헨리의 뒤편에 떡하니 나타나 있었다.
금색 문고리가 달린 계단 밑에서 보았던 그 문 말이다.
그리고 노크 소리는 분명히 문의 바깥쪽에서 들려 왔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헨리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나 바깥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헨리는 문을 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끼이익-
처음에 문을 열 때 들었던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그리고 문을 완전히 젖혔을 때, 헨리는 하마터면 검을 뽑아 들 뻔했다.
“이, 이게 무슨……!”
“안녕?”
팔뚝에, 아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친절하게 노크를 하고 헨리를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헨리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남자는 헨리와 똑같은 외형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의복까지 말이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란 헨리와는 달리 눈앞의 헨리는 한없이 태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는 익숙한 모양새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다음 여전히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는 야누스를 본 후 헨리에게 물었다.
“어때? 이걸 보고 깨달은 건 좀 있나?”
“……뭐?”
“후후, 이건 이제 필요 없는 것 같으니까 다시 집어넣어 두자고.”
말을 마친 남자가 가볍게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지박령처럼 바닥에 붙어 있던 야누스가 다시 검은 안개가 되어 유리병 속으로 들어 갔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야누스의 마지막 흔적까지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익숙한 모양새로 코르크 마개를 집어 유리병의 입구를 닫았다.
그리곤 그걸 다시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탁자 위에 야누스를 올려 둔 남자가 말했다.
“이제 그만 놀라고 앉지 그래? 나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것 아니었나?”
“할 얘기? 할 얘기라면 설마…… 설마 당신이?”
“그래, 내가 바로 주신이다, 모든 신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와 똑같은 껍데기를 가진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주신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플갱어한테서도 보지 못한 헨리의 분신을, 주신에게서 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솔직히 좀 놀라웠다.
헨리는 잠시간 입을 반쯤 벌렸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설마 이 허름해 보이는 집이 주신의 신전일 줄이야.
헨리는 주신의 제안대로 주신의 건너편에 앉았다.
차는 없었다.
그래서 헨리가 직접 차를 준비했다.
뭐라도 마시지 않으면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고맙군.”
차 한 잔을 건네받은 주신이 눈썹을 찡긋거리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기분이 묘했다.
거울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헨리가 애써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자 기색을 눈치챈 주신이 말했다.
“큭큭,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난 늘 방문자의 얼굴을 빌려 쓰곤 하지. 매번 같은 방식을 채용하고 있긴 하지만 방금 지은 너의 그런 표정 때문에 이 짓을 그만둘 수가 없어.”
“거…… 여러모로 악취미네요.”
헨리는 처음에 결심한대로 주신에게 나름대로의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주신 또한 그에 걸맞게 예를 갖추어 주는 듯했다.
주신이 말했다.
“그래, 천신을 죽이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지? 참 독특한 녀석이야. 너의 가슴속엔 화밖에 들어 있지 않는 게냐, 헨리?”
예상대로 주신은 헨리의 행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신은 헨리의 행보에 대한 감상평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헨리가 말했다.
“제 사정이야 뭐, 줄곧 지켜보셨을 테니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널 나무라려는 게 아니다.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이지. 넌 너무 폭력적이야. 폭력은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결국 언젠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것이냐?”
“하하, 저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이런 잔소리를 듣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글쎄요, 그동안 제 방식으로 이룩한 일에 대한 후폭풍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 부분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크크크,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주신의 화법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혼내는 듯하면서도 농을 던지는 것 같고, 헛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말에 뼈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간 안부 같은 쓸데없는 잡담들이 오갔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지만 이상하게 헨리는 초조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주신과의 대화에 매력을 느껴 한동안 잡담을 즐겼다.
잡담을 나누던 중 주신이 물었다.
“그래, 그런 의미에서 궁금하군. 불완전한 신이 아닌 완전한 신이 된 소감이 어떤가?”
“소감, 말씀이십니까?”
“그래. 따지고 보면 진짜 신이 된 이후 날 만나기 위해 쉴 틈 없이 달려오지 않았나?”
주신의 말대로였다.
헨리는 천신을 죽이기 위해 진짜 신이 되는 과정을 선택했다.
그렇게 진짜 신이 된 이후엔 다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렇기에 헨리는 불완전함을 탈피하고 완전한 신이 된 직후, 완전한 신이 된 기분을 제대로 만끽해 보지도 못했다.
또한 이렇듯 신이 된 소감을 물어봐 준 이도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주신이 처음이었다.
헨리는 주신의 물음으로 인해 그제야 진짜 신이 된 것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얼마간의 고민 끝에 헨리가 말했다.
“글쎄요. 현재의 저에게 신이라는 위상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된 터라, 사실대로 말하자면 성취감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너의 이명이 ‘마법의 신’인데도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생각해 보면 헨리가 마법의 신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아서스를 잡기 위해 궁리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헨리는 인류를 대표하는 대마법사였고, 가장 뛰어난 마법사임과 동시에 대륙의 운명을 짊어졌던 인류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의 막중한 책임감이 현재의 헨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헨리의 대답을 들은 주신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의 삶은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삶이겠구나.”
“후회와 미련이라니요?”
“그렇지 않느냐? 나는 너의 시작을 알고 있다. 너는 우연찮게 얻은 새 인생을 오롯이 복수를 위해 사용했고, 천신을 죽이고 날 만나러 오는 그 순간까지도 복수심에 젖어 있지 않았느냐? 또한 인류를 대표하는 대마법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양심과 어쭙잖은 정의감에 사로잡혀 새 삶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돌본 적이 없지 않느냐?”
주신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헨리의 두 번째 인생을 되짚어 주었다.
그리고 헨리는 주신의 말을 끝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헨리는 왠지 모르게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다고?’
헨리는 주신이 한 말들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우연찮게 기연을 얻어 새 인생을 살게 되었으나, 복수에 눈이 멀어 새로운 인생 전부를 오롯이 복수하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아서스를 죽임으로써 복수에 온점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주신의 말대로였다.
알량한 양심과 어쭙잖은 정의감.
그 두 가지가 여태껏 헨리를 움직이게 했던 실질적인 원동력이었다.
이에 헨리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누구도 여태껏 짚어 주지 못했던 사실을, 생판 처음 보는 주신에게 지적당할 줄이야.
헨리는 그제야 놀란 눈초리로 주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다가 얼른 표정을 감추었다.
그 모습을 본 주신이 말했다.
“쯧쯧, 솔직하지 못하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헨리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꼭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다가 어른에게 들킨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애써 담담한 척 표정을 숨기고 싶었지만 주신이 나긋나긋하게 던진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헨리의 입에서 두 단어가 맴돌았다.
‘알량한…… 어쭙잖은…….’
두 단어 모두 뜻 자체가 별로다.
그래서 더더욱 인정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신의 말대로였다.
헨리는 모든 마법사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최초의 마법의 신이 되었지만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치곤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또한 한평생을 꿈꿔 왔던 9서클의 경지를 이루었을 때도 기쁜 마음보단 허무함이 컸다.
헨리가 터득한 아홉 번째 서클은 단순히 마신에게 부여받은 차원의 힘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헨리의 육체 스스로가 진화한 것이었으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쯤, 헨리는 더 이상 표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동시에 갈 곳 잃은 시선이 혼란 속에서 방황했다.
헨리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건너편에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헨리 자신이 있었다.
일순 소름이 돋았다.
건너편의 헨리가 말했다.
“그래. 너는 내게 시간의 힘을 빌리러 왔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까지 말이야. 아니, 마지막엔 결국 죽고 말았으니 결국 목숨까지 바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셈이로군.”
건너편의 헨리는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한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너는 정말로 내게서 시간의 힘을 빌려 맹신자들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나?”
주신의 물음에 헨리는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공이 확장됐고 머릿속에서 활화산이 터지는 듯 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났다.
건너편의 헨리는 여전히 무심한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통이 죄여오는 듯했다.
건너편의 헨리가 말했다.
“시간의 힘. 오냐, 네 바람대로 딱 한 번 빌려주도록 하마. 하지만 그전에 다시 한번 묻겠다. 겨우 손에 넣은 시간의 힘을 가지고 맹신자들을 치료한다면, 그것이 정녕 네가 바라는 진정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저, 저는……!”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질문 속에 담긴 물음은 폭풍과도 같았다.
헨리는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천천히 성대를 조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말했다.
“그, 그것은…… 제 진정한 소망이……아닙니다…….”
헨리는 진심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