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
마법의 신 (3)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군.’
너무 태연자약하게 행동하기에 헤라리온의 죽음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헤라볼라는 전혀 모르는 듯 헨리에게 아들의 생사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헨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짧은 고민 끝에 쉬이 대답했다.
“일…… 생겼지. 그것도 아주 큰일이.”
헨리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죽은 아비에게 아들의 부고를 전하는 문제였기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헨리는 부고를 알리는 입장이었기에 자신이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곧 무너질 상대를 위로해 줄 수 있을 테니까.
헨리의 대답에 헤라볼라는 잠시간 말을 아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렇군.”
두 사람은 헤라리온의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직접적인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볼라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음을.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야 하는 헨리의 어려움을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분위기가 금방 슬픔에 젖어 촉촉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건조했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헤라볼라였다.
“라 님께 자네의 방문을 알리도록 하지.”
뒷말은 없었다.
헤라볼라는 헨리의 용건에 따라 움직였다.
헨리는 그 배려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볼라의 공간에 곧 헤라볼라가 모습을 감추었다.
헨리는 묵은 숨을 토해 내며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서툰 녀석 같으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 녀석이 지금 슬픔을 참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톡 건드리면 왈칵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하지만 헨리는 그러지 않았다.
애써 슬픔을 참고 있는 놈을 자극하는 건 그다지 좋은 행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녀석이 울음을 터뜨리면 용건을 미루고 녀석의 슬픔이 잦아들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이 맡은 직책인 라의 보좌관답게 자신의 상관을 찾아온 손님에게 제대로 된 예우를 갖추었다.
시간이 지나자 헤라볼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헤라볼라가 헨리에게 말했다.
“손잡아.”
헤라볼라의 요청에 헨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시야가 번쩍이더니 이내 새로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새롭게 펼쳐진 공간에는 헤라볼라가 없었다.
대신 테이블 하나와 두 개의 의자가 있었고 그 의자 중 하나에는 매의 머리를 가진 라가 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아서스와 야누스를 쓰러뜨린 직후 그토록 라와 아이린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라는 그런 헨리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헨리를 반겨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헨리가 짜증을 내진 않았다.
도리어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의 예상대로 헤라볼라를 찾은 것이 맞는 행동이었으니까.
헨리는 라가 자신을 반기자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라의 건너편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라와 마주 앉은 헨리가 말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묻고 싶은 것? 좋아, 편하게 말해 봐.
“감사합니다, 라 님. 혹시 당신도 헤라볼라가 그랬던 것처럼 제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까?”
-뭐? 크하핫!
헨리의 질문을 들은 라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전에도 보았지만 맹금류의 한 종류인 매가 사람처럼 화를 내고 웃는 모습이란 그저 신기했다.
웃고 싶은 만큼 웃은 직후, 라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헨리, 넌 마법의 신이다.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나와 같은 신이라는 뜻이지. 너와 내가 같은 선상에 있는데 어떻게 내가 네 머릿속을 들여다본단 말이더냐?
“그렇군요. 그럼 혹시 아이린 님께서 당신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당신이 아이린보다 더 높은 존재이기 때문입니까?”
-아니, 그건 그냥 걔 성격이 원래 그래.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딱히 경어를 사용할 필욘 없겠군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과 저는 같은 자격을 가진 신이고, 제 성격은 아이린과 같지 않으니 저 또한 굳이 경어를 사용할 필욘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렇군.”
라의 동의가 이루어지자 헨리는 곧바로 경어 사용을 그만두었다.
이는 헨리가 준비한 조그마한 복수였다.
이곳까지 자신을 발걸음하게 한 것에 대한 복수.
물론 복수라고 하기엔 소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라의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라의 표정을 본 헨리가 되려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됐다.
이제 와서 경어를 사용하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그래서 라는 좀 황당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라가 이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자 헨리는 곧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잘됐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난 너희들의 부탁대로 아서스를 쓰러뜨렸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까지 발걸음을 해야 하지?”
헨리는 용건의 포문으로 역시나 가장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이에 라가 한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설명해 주도록 하지.
오해.
헨리는 오해라는 말을 한번 곱씹은 후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 모습을 본 라가 말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곳까지 발걸음하게 된 것이 몹시 섭섭한 모양이로군. 좋아, 이해해. 하지만 자네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마다 현세에 강림할 수 있는 게 아냐.
“무슨 뜻이지?”
-신이 된 우리는 기본적으로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현세에 강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해. 우리가 대중없이 현세에 강림해 인간사에 사사건건 관여하게 된다면 인간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테니까.
라의 설명을 들은 헨리는 잠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답변에 대해 다시 질문했다.
“상관이 있나?”
-뭐?
“혼돈에 빠진다는 것. 솔직히 너희한텐 상관없는 일이잖아? 너흰 이미 신이야. 그런 상황에서 인간계가 무슨 대수라고 그런 약속을 지키는 거지?”
-그 말, 지금 무슨 뜻이지?
헨리의 질문에 라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라의 목소리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날 선 목소리 덕분에 주변의 공기 또한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피부로 느껴지자 헨리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색을 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깨 위에 달린 게 사람 머리통이 아니라 새대가리라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나 봐?”
-뭐라고?
“웃기지 말고 잘 들어. 너희가 진짜 인간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으면 조건이고 나발이고 진즉에 아서스의 폭주를 막았어야 되는 것 아냐? 내 말이 틀려?”
어두가 다소 자극적이긴 했지만 헨리로선 충분히 화낼 만한 사안이다.
그렇게까지 인간계의 혼란이 걱정됐다면 조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따질 게 아니라 진즉에 현세에 강림해 아서스를 저지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헨리의 지적에 라는 그제야 가라앉혔던 공기를 거두고 다시금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전에도 말했잖은가? 강림을 통해 녀석을 처리하고 싶어도 나의 대리자였던 헤라리온은 아서스보다 가진 신력의 그릇 크기가 작아서 설사 강림한다 하더라도 녀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야.
“아니, 그건 핑계야.”
-핑계?
“넌 아까 너와 내가 동일선상에 놓인 같은 신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난 왜 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세에 남아 있고, 너는 왜 나와 같은 신임에도 불구하고 현세에 올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난 왜 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와 아이린이 부리는 능력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지?”
헨리의 억양은 조금 흥분해 있었다.
그렇기에 말을 내뱉는 속도가 평소보다 좀 더 빨랐다.
하지만 빠르게 뱉어 내는 말들 속에서 불합리한 의심은 없었다.
헨리가 묻는 질문들은 모두 다 합리적 의심에 해당했고 그렇기에 헨리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솔직한 감정들을 말로 풀어낸 것이었으니까.
헨리가 속사포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날카로운 일침들을 쏘아 대자, 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을 다문 후 얼마간 침묵을 유지했다.
헨리는 그런 라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
마치 기 싸움을 하는 듯 보였지만, 시선을 교환하는 두 시선은 결코 한낱 유치한 힘겨루기 따위가 아니었다.
침묵 끝에 입을 연 것은 라였다.
-충분히 이해한다, 헨리.
“이해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러니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똑바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기 전에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당시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똑똑한 너에게 모든 것들을 알려 주기엔 말이야.
“촉박……? 좋아,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하지. 그땐 확실히 일각을 다투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이젠 우리를 압박하는 모든 것들이 해결되었으니 그땐 촉박해서 미처 하지 못한 말들에 대해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고.”
-좋다. 하지만 이 이야길 시작하기 전에 네가 알아 두었으면 하는 게 있다.
“알아 두었으면 하는 것?”
-그래. 헨리, 너는 마법의 신이 맞긴 하지만 완전한 신은 아니다.
“신이면 신이지, 완전한 신이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완전한 신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이 세상엔 불완전한 신이란 것도 존재한단 말인가?
헨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에 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헨리. 세상의 모든 신들은 육체라는 불완전한 껍질을 탈피하는 순간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계속해 봐.”
-헨리. 너는 분명히 여태껏 세상에 없던 최초의 마법의 신이 맞다. 그리고 세상에 마법이 존재하는 한 너의 존재는 영원할 것이며, 영원히 인간들 사이에서 회자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완전한 마법의 신으로 군림하기 위해선…… 넌 절대로 인간계에 존재해선 안 된다.
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왜 헨리가 완전한 신이 아닌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라의 설명이 끝나 갈 무렵, 헨리는 여전히 찌푸린 미간을 유지한 채 라가 해 준 설명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이 추측한 것에 대해 말했다.
“인간계에 존재하면 안 되는 이유는 설마 내가 인간계에 존재함으로써 인간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인가?”
-그렇다.
추측이 맞았다.
라의 설명에 헨리는 그제야 왜 자신이 신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불완전한 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라가 말했다.
-신들이 가지는 힘은 얼마나 많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뚜렷하게 각인되었느냐에 따라 가지는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력은 신앙심과 비례하는 것이고, 야누스가 아서스를 이용해 신력을 모으려 했던 것이기도 하다.
“잠깐, 그 말은 좀 모순이 있는 것 같은데? 야누스가 정말로 힘을 원했다면 아서스가 아니라 자신을 직접 믿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놈이 원한 건 겨우 그 정도의 힘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힘?”
라가 언급한 그 정도의 힘.
헨리는 여기서 또다시 의아함을 느꼈다.
대륙의 절반이 넘는 인구를 맹신자로 만들었고 그들을 통해 유래 없는 신력을 확보했으면서도 겨우 그 정도의 힘이라니?
헨리가 의아함을 표하자 라가 이어서 말했다.
-야누스는 네가 살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륙, 그리고 다른 대륙들을 넘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자신의 신도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 정도 신도들을 확보해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크기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대체 왜? 이미 신이 됐으면서도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힘을 원했던 건데?”
-진부한 이유다. 힘을 원하는 이들이 으레 그렇듯, 가진 힘을 통해 손에 넣고 싶은 것을 쟁취해 내기 위해서, 그리고 야누스는 그렇게 모은 힘으로 모든 신들을 아우르는 신들의 왕에게 도전하고자 했다. 그것이 야누스가 가진 진짜 야망이었다.
“신들의…… 왕이라고?”
신들의 왕.
낯선 단어의 조합이 헨리의 입안에서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