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
마법의 신 (4)
헨리의 동공이 옅게 떨렸다.
신들의 왕이라니?
세상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걸 이번 싸움을 통해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런 신들에게 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인간을 넘어선 신들에게도 먹이 사슬이나 계급 같은 게 존재할 줄이야.
라가 말했다.
-처음 듣겠지. 그리고 낯설 것이다. 나도 신이 되기 전까진 신들에게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라는 헨리의 반응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가 물었다.
“근데…… 이미 신이 된 것만 해도 초월적인 존재일 텐데, 야누스는 대체 무얼 얻고 싶어서 신들의 왕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이지?”
-그건 야누스만이 알겠지. 내가 야누스와 함께 숭배되었다곤 하나, 그런 이유로 야누스의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라가 야누스에 대해 잘 알았다면 진즉에 헤라리온을 시켜 악의 근간을 뿌리 뽑았을 것이다.
헨리는 생각했다.
‘신이라고 해서 다 전지전능하고 똑똑한 건 아니군.’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이 된 자신조차도 아직 부족한 게 많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 문득 헨리는 야누스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야누스는 그럼 어떻게 됐지? 어찌 보면 신들의 왕에게 도전하려고 반기를 든 셈이나 마찬가지잖아.”
야누스는 아서스가 죽고 새로운 키메라를 그릇 삼아 헨리와 결투를 펼쳤다.
그러나 허무하리만치 단 한 번의 일격에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승리는 쟁취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누스라는 ‘신’까지 소멸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건 말해 줄 수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는 아직 인간계에 몸을 담고 있는 불완전한 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신으로서 알 수 있는 비밀에도 제한이 있다.
“규율이라는 건가?”
“그렇다.”
“그럼 혹시 그 비밀들을 유출시키게 되면 신들의 왕에게 벌이라도 받게 되나?”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신들의 왕에게 벌을 받은 신은 여태껏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왜지?”
-모두들 왕이 정한 금기를 거스르지 않았으니까.
“그럼 야누스가 최초가 되겠군.”
-그것 또한 알 수 없다.
헨리는 더 질문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라가 더 정보를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굳이 바득바득 우겨서 비밀을 알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라가 말했다.
-그러니 헨리, 한 명의 완전한 신이 되어 숨겨진 비밀들을 알고 싶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거추장스러운 육체를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육체의 포기.
그 말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라는 헨리에게 죽음, 즉 자살을 권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헨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무슨 뜻으로 제안하는 건진 잘 알겠다만, 산 자의 입장에선 기분이 좀 더러워지는 제안이군.”
-과연 그럴까? 반대로 이야기하면 너는 죽더라도 명계가 아닌, 신계의 주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셈이나 마찬가진데?
“그렇긴 하지만…… 음? 잠깐만 명계라고?”
명계.
헨리는 명계라는 단어를 통해 순간적으로 헥터를 떠올렸다.
헨리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 땅에 부활하였으나 결국은 헨리를 위해 죽은 비운의 검사.
어찌 보면 헥터는 헨리로 인해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헨리는 헥터에게 다시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헨리가 물었다.
“혹시…… 내가 신이 되면 명계에도 간섭할 수 있는 힘이 생기나?”
-네가 명계와 관련된 신이라면 그렇겠지.
“명계와 관련된 신…… 그렇다면 왠지 나는 간섭할 수 없을 것만 같네.”
-대답하지 않겠다.
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헨리는 그의 표정을 통해 자신이 죽어 완전한 신이 되어도 명계 쪽엔 간섭할 수 없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헥터에겐 더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쯧, 여러모로 곤란하네. 신이 되어서도 명계에 간섭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신이 될 이유가 없으니까.’
그저 몹시 미안할 따름이었다.
헨리는 질문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수 분의 시간이 지나자, 그런 헨리를 지켜보던 라가 물었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책임?
“응, 내가 현세에 남아 있는 이상, 내가 처리해야 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
-허…… 그것 참 이해할 수가 없군.
“뭘?”
-대체 네가 책임질 게 뭐가 있지? 넌 인류의 원수였던 아서스를 죽이고 야누스를 그 땅에서 쫓아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책임을 더 지겠다는 것이냐?
“넌…… 아니다, 됐다.”
헨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라가 자신과 같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해서 녀석 또한 자신과 같은 인간 출신의 신일 거란 보장은 없다.
그래서 헨리는 녀석에게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에 대해 강요도 기대도 하지 않기로 했다.
헨리가 하려던 말을 흐지부지 시키자 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 줄은 몰랐군. 헨리, 잘 생각해 봐라. 넌 신이다!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이룰 수 없는 그런 존재란 말이다!
“알아. 그런데 그게 왜?”
-이 답답한 놈! 네가 완전한 신이 되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불완전한 신일 때와는 다룰 수 있는 힘의 격이 달라진단 말이다!
“그래서?”
-이 멍청한……! 네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 진 안다. 그러니 그 걱정거릴 해결하려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신이 되어 네가 책임지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는 게 더 낫다는 걸 왜 모르느냐!
“글쎄, 과연 그럴까?”
-뭐?
“난 생각보다 욕심이 많거든. 그리고 완전한 신이 되면 현세에 함부로 강림도 못 한다면서? 그럴 거면 차라리 현세에 발을 붙이고 있을 때 모든 걸 해결해 놓고 가는 편이 훨씬 낫지. 신이 되어서도 만약 해결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그땐 정말로 아무런 방법이 없잖아?”
-욕심이 지나치다! 현세는 네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넌 그런 흐름을 멋대로 흩트려 놓으려는 것이지 않느냐!
“그렇겠지. 하지만 그 또한 내가 불완전한 신이니 가능한 거 아니겠어?”
헨리는 라가 알려 준 논리 내에서만 근거를 들었다.
또한 라는 헨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 토론은 어찌 됐든 헨리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조언을 해도 헨리에게 통하지 않자, 결국 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섭섭한 마음을 지우지 못해 맹금류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부라리며 헨리를 흘겨보았다.
헨리는 자신을 흘겨보는 라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더 알려 줄 게 없으면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난 불완전한 신이라 신력의 소유, 그리고 내 신도들의 기도를 듣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궁금증은 다 해결했나 보군.
“일단은 그런 셈이지, 뭐. 아무튼 조언은 고마워. 큰 도움은 못 됐지만 적어도 궁금증들은 해소했으니까.”
-……죽음을 미룬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헨리.
“글쎄, 내 생각엔 찝찝한 마음의 짐을 남겨 두고 죽는 게 신이 되서 더 후회가 될 것 같은데.”
-……알겠다.
“좋아. 그럼 내가 완전한 신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리고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죽기 전까지 네가 아끼는 샤하트라에 대한 문제도 전부 다 해결해 줄 테니.”
헨리는 라를 위해 특별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헨리의 특별한 작별 인사를 들은 라는 그 당찬 포부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헨리가 물었다.
“근데 나가는 문이 어디지?”
번쩍!
질문을 끝마치자마자 눈앞이 번쩍였다.
헨리는 섬광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헨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영혼의 무덤이 안배된 동굴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뻣뻣하긴.”
라의 미소를 본 헨리는 자신 또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칸의 눈으로부터 등을 돌린 후 무슈로 돌아가기 위해 텔레포트를 사용하려 했다.
“아 참,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헨리는 텔레포트를 발동시키기 전, 다시 등을 돌려 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 네 아들의 장례는 그 어떤 영웅보다 성대하고 후하게 치러 줄 테니까. 그리고 네 아들의 명성이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솜씨 좋은 음유시인들을 데려다가 사가(Saga)를 지어 주마.”
헨리는 무슈로 떠나기 전, 아들을 잃은 어느 융통성 없는 아버지를 위해 몇 가지 약조를 했다.
그리고 약조를 끝마친 후, 헨리는 조그마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갈게. 다음에 보자.”
코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헨리는 자신의 눈앞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미소와 함께 작별 인사를 전했다.
헨리의 인영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 * *
“……제기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넉넉히 받아 온 보급품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고 새로운 보급을 받기 위해 하이랜더로 보낸 대원들은 며칠째 소식이 없었다.
정문에는 구역에 상관없이 수많은 마물들이 폭주해 날뛰고 있었고, 후문에는 좀비를 닮은 시민들이 미친 사람처럼 성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고립.
현 칼리번 요새에 딱 어울리는 단어였다.
“사령관님…….”
“왜?”
“또 자살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래.”
이셀란은 여느 장교의 보고를 듣고서 안색을 굳혔다.
더 이상 칼리번 요새에는 군인 정신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수록 병사들이 느끼는 심적 고통은 말루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역병처럼 떠도는 소문은 이미 수많은 자살자들을 만들어 냈다.
특히 병사들의 잇따른 자살에 도화선을 지핀 것은 다름 아닌 전 사령관의 자살이었다.
이셀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령관이 자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셀란이 사령관이 됐다.
어찌 됐든 요새를 이끌어 갈 최고 지휘관은 필요했으니까.
그렇기에 상황이 나빠질수록 이셀란이 느껴야 하는 심적 부담감 또한 배가되었다.
그러나 이셀란은 병사들 앞에서 함부로 힘듦을 내색할 수 없었다.
전 사령관이 자살한 마당에 자신까지 이상 증세를 보이면 촛불처럼 남아 있던 사기마저 사라져 버릴 테니까.
이셀란은 많이 여위어 있었다.
보급물자가 부족해지자 자신이 먹을 식사까지 줄여 가며 병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이셀란 한 사람의 식사를 조금 줄인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쿠어어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후문을 두드리고 있는 맹신자들이 성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이셀란은 여전히 맹신자들의 정체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을 좀비라고 불렀다.
곧이어 해가 졌다.
이셀란은 지는 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마물의 숲은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마물들이 폭주했어도 깨지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깨질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해가 지고 달이 뜨자, 마물의 숲으로부터 모골이 송연해지는 울음소리가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키아아아아!
-꾸어어어어!
-퀴에에에에!
목소리만 들어도 어느 마물인지 짐작이 갈 법한 대형 마물들의 울음소리였다.
그것은 요새의 병사들에게 있어 새롭게 군림한 악몽이었다.
악몽은 낮보다 더 많은 수의 자살자들을 만들어 냈고, 그래서인지 이제 요새의 군인들에게 밤은, 더 이상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이셀란도 선잠을 잤다.
저 빌어먹을 울음소리와 더불어 하루 종일 심신에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지독한 불면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잠도 늘 선잠 아닌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 사령관님!”
병사 한 명이 다급한 얼굴을 하고서 숨을 헐떡이며 이셀란을 찾아왔다.
이에 이셀란은 잔뜩 충혈된 눈을 뜨며 천천히 대꾸했다.
“……무슨 일이지?”
“후, 후문이 뚫렸습니다!”
“……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병사의 말 또한 사실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뜬 지금, 절대 뚫리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후문이 갑작스레 함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