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업그레이드 (3)
‘이런 썩을 놈이……!’
생각지도 못한 놈이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헨리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소식이 썩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알렌 님, 수리하러 가기 전에 일단은 저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천천히 다녀오세요. 그동안 저는 여기서 못 다한 수련을 하고 있겠습니다.”
알렌의 배려에 헨리는 근위병과 함께 성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성문을 개방했다.
그러자 문 앞에는 정말로 킹턴이 검을 뽑아 든 채 서 있었다.
“헨리 님!”
‘헨리 님?’
성문이 개방되고 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킹턴은 대뜸 생전에 쓰지 않던 존칭을 갖다 붙이며 헨리에가 달려왔다.
당황스러움에 손바닥을 보이는 헨리.
거리를 두어 달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헨리 님! 헨리 님께서 무슈에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저 킹턴, 이곳까지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예?”
킹턴의 말투는 마치 충신이 왕에게 하는 그런 종류의 어투였다.
그래서 심히 당황스러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헨리의 모든 것을 못마땅해하던 이가 바로 킹턴이 아니었던가?
그런 킹턴이 갑작스레 무슨 이유로 이런 저자세를 취하는 것일까?
이에 헨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놈 봐라?’
헨리는 먼저 꾀죄죄한 그의 행색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헨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샬롯 고원에 있는 키메라 군단의 토벌에 참여하지 않고 하이랜더에 잔류했다.
그리고 사도의 침공으로 하이랜더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사도와 맞서 싸운 바할드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랜더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무래도 바할드뿐만이 아닌 듯 했다.
“하하!”
이에 헨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킹턴답다고 해야 하나?
녀석은 완벽한 기회주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의 침공으로 하이랜더가 멸망한 지금, 가문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은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바로 그나마 생존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헨리에게 붙어먹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미소와 함께 손을 비비던 킹턴이 잠시 움찔거렸다.
그 또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킹턴은 얼굴에 철판을 두른 듯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두 손을 모아보였다.
킹턴이 말했다.
“헨리 님! 저 킹턴, 비록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직 아서스를 벨 수 있는 이 튼튼한 육체와 강건한 정신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 극악무도한 아서스를 해치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기회?”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역시!”
“근데 왜 날 찾아와?”
“예, 예?”
당황하는 킹턴.
이에 헨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서스는 여기 없어. 샬롯 고원이나 어딘가에 있겠지. 그리로 한번 가 봐.”
솔직히 말해서 헨리에게 킹턴은 그다지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쓸모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전생에서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인물이다.
박쥐 같은 놈.
헨리가 딱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딱 잘라 거절하는 헨리의 단호함에, 킹턴은 식은땀을 흘리며 부연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헤, 헨리 님! 뭔가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제 말은 제가 직접 아서스를 베겠다는 게 아니라 헨리 님을 도와 강성한 군대로……!”
“필요 없다.”
“하, 하지만……!”
“내게 기사는 차고도 넘쳐. 네놈 따위가 없어도 아서스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
진심이 담긴 거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헨리는 어떻게든 아서스를 쓰러뜨릴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한 달 안에 헨리가 아서스를 죽일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사실 킹턴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이윽고 헨리가 차갑게 시선을 뿌리며 말했다.
“더 할 말 없지?”
“헤, 헨리 님!”
“먹고살 방도가 궁해져서 날 찾아온 모양인데…… 그런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골랐어.”
물론 바할드 다음으로 강력한 기사이니만큼 쓸모를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킹턴은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손을 끊으려는 것이었고.
헨리가 단호하게 거절해 보인 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 참, 만에 하나 이 시간부로 또 소란을 피운다면 그땐 정말로 가만있지 않겠어.”
다른 이도 아니고 헨리의 경고다.
헨리 정도 되는 사내라면 정말로 자신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을 알기에 킹턴은 더 이상 헨리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헨리.”
다시 무슈로 돌아선 헨리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로난이었다.
로난은 성문 밖으로 걸어 나와 뒤돌아 오는 헨리 앞에 섰다.
“로난, 무슨 일이야?”
로난에게 자신을 가로막은 이유를 묻는 헨리.
그러자 로난이 답했다.
“헨리, 동기로서 부탁이 있어.”
“부탁? 설마 킹턴을 받아 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맞아.”
“이유는?”
“포람의 검술이 필요해.”
로난이 헨리를 막아선 이유.
그리고 킹턴을 받아 줘야만 하는 이유.
헨리에게 부탁을 하는 로난의 사정은 비교적 간단하고 담백한 것이었다.
이에 헨리는 고민했다.
‘음!’
로난 또한 운 좋게 사도의 침공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사도와 맞닥뜨렸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사도의 힘을 감당하기엔 아직 로난의 힘은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로난 또한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킹턴을 받아들여 달라고 헨리에게 부탁한 것이다.
‘역시…… 아무래도 같은 검술을 쓰는 사람이 편하다는 건가?’
로난의 검술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즉, 로난에게 검술 그 자체에는 이제 큰 의미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터 이후의 경지는 오롯이 오러의 운용 방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맥도웰이나 반 같은 고등 기사들을 스승으로 붙여준 것이고.
하지만 그런 스승들을 소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킹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헨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헨리는 로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에 로난 또한 피하지 않고 헨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심이군.’
그리고 헨리는 로난의 두 눈으로부터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읽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양아버지에 대한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성장을 향한 진심어린 갈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로난의 진심을 읽은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로난의 진심을 이해한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런 이유라면 수락하지.”
“고마워.”
“대신.”
헨리는 로난의 부탁을 수락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쓸모없는 목숨을 구제해 준 것이니 네가 저놈의 쓸모를 만들어 놔. 너만을 위한 쓸모 말고, 이곳 무슈에 머무르는 동안 모두를 위한 쓸모를 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좋아, 그럼 네가 데리고 가.”
헨리는 조건을 달았고 로난은 그 조건을 수락했다.
그리고 로난은 자리를 벗어나려는 헨리에게 감사의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기에 헨리는 로난에게 킹턴을 맡겼으니 더 이상 킹턴에 대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헨리는 이곳을 벗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킹턴을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킹턴.”
“예, 예! 헨리 님!”
“부디 내가 우려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러지.”
경고를 마친 헨리는 다시금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원래 하려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다시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스, 스승님!”
“음?”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헨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하울이었다.
“하울?”
“예, 예! 하울입니다!”
하울을 발견한 헨리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깜짝 놀란 목소리로 하울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하울은 심히 군기가 든 모습으로 쭈뼛쭈뼛 헨리 앞에 나타났다.
‘맙소사, 하울이 살아 있었어?’
헨리가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거슬렁거의 침공으로, 왕궁이 궤멸되면서 헤라리온과 비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예상을 깨고 하울은 버젓이 살아 있었다.
‘설마 클레버가?’
당시의 헨리는 거슬렁거의 행태에 몹시 분노하여 생존자의 구출을 전적으로 클레버에게 맡겼다.
그리고 워낙에 경황이 없다 보니 클레버가 구한 생존자에 누가 껴 있는지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에 하울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렇게 무슈로 온 하울은, 지금은 아는 이 한 명 없이 무슈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헨리는 자신의 무신경함에 하울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하, 하울, 너…… 괜찮니?”
헨리의 어색한 물음.
그러나 하울은 그 어색한 물음 속에서 느껴지는 최소한의 온정에 그제야 긴장을 풀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어어! 스승님!”
“미, 미안하다, 하울!”
아무래도 알렌을 데리러 가는 것은 좀 더 미루어야 할 듯싶었다.
헨리는 우선 서럽게 우는 하울을 달래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하울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케일과 쉰 명에 달하는 샤하트라의 견습 마법사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헨리는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알렌과 함께 이 아이를 설탑으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탑에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지금으로썬 그게 상책이다.’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태평하게 하울이나 가르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하울의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아직 하울은 배워야 할 기초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게다가 왕궁이 궤멸되면서 하울에겐 아무런 연고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설탑에 뿌리를 두고 미래를 도모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이 아이는 누굽니까?”
“하울이라는 아이인데 샤하트라에서 가르치던 제 제자들 중 한 명입니다.”
“하울이라고 합니다.”
헨리의 소개에 하울은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헨리가 하울을 데리고 수련장에 나타난 까닭은 간단했다.
헨리는 알렌을 포함해 하울까지 살게라의 설탑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헨리는 이 같은 사실들을 간단히 요약하여 알렌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설명을 모두 들은 알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뭐, 저야 동행하는 데에는 상관없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즉시 설탑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웅!
빛무리가 번쩍였고 이윽고 세 사람의 신형이 광휘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 * *
“로난, 정말 고맙다. 제아무리 포람의 성을 버렸다고는 하나 역시 너란 놈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달랐어.”
헨리가 사라진 직후, 로난과 단 둘이 남게 된 킹턴은 곧바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로난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에 로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뭐, 뭐?”
“내가 헨리에게 당신을 구제시켜 달라고 한 까닭은 나의 성장에 너의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니까.”
“그, 그게 무슨……! 로난!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말버릇?”
호통 치는 킹턴에게, 로난은 찌푸린 미간 사이로 날카로운 시선을 뿌렸다.
엄청난 살기였다.
“내 말 잘 들어. 앞으로 한 달 동안 내 실력을 네놈보다 훨씬 더 월등하게 만들어 놓지 못한다면 너를 이곳 무슈에 더는 발붙일 수 없게 만들어 주겠어.”
“그, 그런……!”
로난의 경고에 킹턴은 이윽고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로난의 살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무슈에서 자신을 쫓아낼 헨리의 힘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윽고 로난이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하루 8시간씩 내게 검을 가르쳐라. 그리고 8시간은 무슈를 위해 봉사해라. 그리고…….”
조용히 킹턴에게 의무를 가르치는 로난.
이윽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너를 내 부관으로 둘 테니 앞으로는 내게 경어를 사용하도록.”
과거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킹턴을 자신의 부관으로 고용한 로난이 통쾌함에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