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발화 (1)
“후우,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털썩.
작열하는 태양 아래.
헤라리온은 여느 때와 같이 헥터가 일러 준 수련법의 할당량을 채웠다.
지독한 일정이었다.
부족한 근력을 보완하기 위해 모래주머니가 잔뜩 달린 옷을 전신에 걸치는가 하면, 보통의 진검보다 몇 배나 더 무거운 수련용 검을 팔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휘둘러야만 했다.
헤라리온은 땀에 젖어 천근같이 무거워진 수련복을 벗어 던진 뒤, 꼴도 보기 싫은 수련용 검까지 모두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 땀을 식혀 주는 선선한 바람을 즐겼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전하.”
“아, 셀렌!”
헤라리온이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눕자 샤하트라의 왕비, 셀렌 칸이 나타나 차게 식힌 물수건과 얼음물을 건네주었다.
꿀꺽꿀꺽.
“크!”
수련 뒤에 먹는 얼음물은 그 어떤 음료보다도 달콤했다.
얼음물을 양껏 들이켠 뒤, 헤라리온이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셀렌에게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아.”
“별말씀을요, 호호.”
헤라리온과 셀렌.
두 사람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정략결혼이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은 천생연분이었다.
헤라리온은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그 증거로 후궁을 많이 두었던 다른 세대의 왕들에 비해, 헤라리온은 다른 여자는 단 한 명도 후궁으로 들이지 않고 오직 셀렌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셀렌은 헤라리온이 진실을 꿰뚫어 보는 ‘라의 눈동자’를 사용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오늘이 그날이시죠?”
“응, 야누스 님께 기도를 드리는 날이지.”
“이렇게 몸이 부서져라 수련하시는데 힘들어서 기도나 올릴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 수련이 고되 보이긴 해도 날이 갈수록 체력이 붙고 있기는 하니까.”
“휴, 그래도 참 걱정이에요. 아무리 헥터 님께서 뛰어난 검사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매일같이 전하를 혹사시키니…….”
셀렌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헤라리온의 힘이 강해지거나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보다는 헤라리온이라는 사람 자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헤라리온이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셀렌, 난 참 행복한 남자야. 너 같은 여자와 평생을 보낼 수 있으니까.”
“전하도 참, 부끄럽게…….”
깨가 쏟아지는 부부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살을 부비며 사랑을 나누다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기 위해 헤라리온이 수저를 든 순간.
“윽!”
“전하!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 낮에 좀 무리를 했을 뿐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을 이러시니 건강이 염려되옵니다, 전하.”
“괜찮아, 괜찮아. 이 모든 게 살이 되고 피가 될 것이라고 스승님께서 그러셨으니까…….”
“안 되겠어요. 오늘 밤에 있을 기도, 저도 함께해야겠어요. 안 그래도 항상 혼자 기도를 진행하셔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참에 저도 전하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그건 안 돼, 셀렌.”
“하지만 전하께선 몸이…….”
“그만해, 셀렌.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야누스에게 올리는 기도.
그것은 오직 샤하트라의 칸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의식들 중 하나였다.
헤라리온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제아무리 비람이나 셀렌이라 할지라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 며칠간 야누스에 대한 셀렌의 집착이 조금 심해진 듯싶었다.
물론 아무리 심해졌다고 해도 ‘평상시’와 비교하자면 귀여운 애교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럴 때마다 헤라리온은 그 의도가 아무리 호의라고 할지라도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해 왔다.
셀렌이 동석을 권하는 이유가 검술 수련 때문에 힘들어진 자신의 체력 때문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셀렌에게 별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곤 애초부터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히잉……!”
헤라리온이 또다시 단호하게 거절하자 셀렌의 입술이 쌜죽 튀어나왔다.
“왜 그래, 셀렌?”
삐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랑꾼의 눈에는 그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법.
이에 헤라리온은 놀리던 숟가락도 내려놓은 채 셀렌을 달래 주기 시작했다.
이에 셀렌이 샐쭉거리며 대꾸했다.
“사실 좀 섭섭해요.”
“어떤 점이?”
“헨리 님이나 헥터 님은 신전에 몇 번이나 출입하게 해 주셨으면서 저는 왜 안 되는 거예요?”
“셀렌 그건……!”
“피, 저도 알아요. 여태껏 전통이 그래 왔다는 거. 그래서 저도 충분히 이해하구 있고요. 하지만 섭섭한 건 섭섭한걸요…….”
사실 신전에 칸 이외엔 아무도 들어가선 안 된다는 불문율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야누스의 힘이 극도로 위험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애초에 처음부터 출입을 금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헤라리온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사실 아무리 야누스 님의 힘이 위험하다 해도 내가 곁에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게다가 주기적으로 행하는 야누스에 대한 기도 의식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야누스의 권능인 ‘죽음의 힘’을 되새기며 권능을 재확인한다든가 야누스 신에게 신선한 공물을 바치는 것이 바로 의식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에 한참을 고민하던 헤라리온은 마침내 큰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알겠어. 그럼 오늘 있을 기도만 좀 도와주겠어?”
“정말요?”
“대신 오늘만이야. 그 이후엔 좀 곤란해.”
“물론이죠. 저는 단 한 번이라도 전하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답니다.”
“고마워,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셀렌뿐이야.”
그렇게 헤라리온은 샤하트라 왕조 역사상, 최초로 야누스의 신전에 여자를 들인 첫 번째 칸이 되었다.
* * *
“와, 와, 왈레드! 너, 너, 지, 지금 이게 무슨……!”
알프레드는 왈레드를 보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외팔이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는 떨리는 두 손으로 휑하게 펄럭거리는 자기 아들의 왼쪽 소매를 매만졌다.
허전했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급기야 두 눈가의 실핏줄이 터져 버린 알프레드가 진노한 음성으로 아이젠에게 외쳤다.
“아이젠……!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고해야 할 것이다……!”
이에 아이젠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군.”
“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봐, 알프레드, 지금 네놈이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지금 네놈한테 사과를 하러 온 게 아니다.”
“……뭐라고?”
“오히려 사과를 받으러 왔다. 빌어먹을 네놈의 장남이 내 하나뿐인 가신의 집에 쳐들어와 상급 정령을 소환해 행패를 부렸거든.”
“뭐라고? 실라이온을 소환했다고? 왈레드, 저 말이 사실이더냐?”
“그, 그게 실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은 무슨 놈의 사정!”
왈레드가 그에 대한 변명을 하려 하자 아이젠이 버럭 화를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알프레드, 네놈의 아들이 어떤 놈인지는 조금도 관심 없다. 그리고 네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말이야. 하지만!”
쾅!
오러가 실린 강력한 발 구르기.
이에 아이젠이 발을 구른 자리에는 거미줄 같은 얕은 균열이 일어났다.
“머리 위에 달린 게 폼이 아니라면 기본적인 예의는 좀 지키는 게 어때?”
“뭐, 뭐라고?”
“만약에 말이야…….”
이에 아이젠은 당황한 알프레드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만약에 한 번만 더 ‘나의 것’에 위해를 가한다면, 그때는 네놈 피붙이고 뭐고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진심이 담긴 강력한 경고였다.
이에 전후 사정도 모른 채 쉴 새 없이 아이젠에게 말로 폭격을 당하자 알프레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놈 아들 때문에 난장판이 된 내 가신의 집에 대한 피해 보상은 네놈한테 청구하도록 하지. 만약 그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하라고. 뭣하면 ‘결투’도 받아 줄 테니까 말이야.”
이윽고 할 말을 마친 아이젠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등을 홱 돌린 채 헨리에게 말했다.
“가자, 헨리! 이만큼 경고했으면 됐다!”
“예, 후작님.”
“아, 아이젠! 지금 이 무슨……!”
이더웨더가에 방문해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홀연히 떠나 버리는 두 사람.
이에 알프레드가 뒤늦게 아이젠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아이젠은 한 번 더 콧방귀를 뀐 후 순식간에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날 뿐이었다.
“으아아아악!”
멀쩡하던 장남은 하루아침에 외팔이 병신이 됐고, 알프레드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놈에게 영문도 모른 채 치욕을 당했다.
그러므로 알프레드가 고함을 내지르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왈레드!”
쿵!
분노한 알프레드가 있는 힘껏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아이젠이 그랬던 것처럼 거미줄 같은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한 개도 빼먹지 말고 전부 다 낱낱이 설명해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야!”
거칠어진 숨소리.
그렇게 아이젠과 알프레드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선전포고를 내릴 듯한 뜨거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예복으로 갈아입은 헤라리온은 샤하트라 왕조 최초로 자신의 왕비를 야누스의 신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우와……!”
야누스의 신전에 발을 들이기 전, 셀렌은 헤라리온으로부터 신전에 들어간 이후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교육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왕비 최초로 야누스 신전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니 감탄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에 헤라리온은 의식을 거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셀렌에게 주의해야 할 점들을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또다시 당부하지만 셀렌, 의식이 시작되면 말이야.”
“절대로 말을 해선 안 될 것, 그리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 것. 그리고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신전 밖에서 내뱉지 말 것. 맞죠?”
“그래, 맞아.”
나이가 어려 아직 소녀 같을 뿐이었지 그녀는 총명한 여자였다.
이에 마지막으로 당부를 마친 헤라리온은 곧 야누스에게 바칠 제물에게로 다가갔다.
-꿀꿀.
이번 의식에 바쳐질 가축은 다름 아닌 건강한 수퇘지였다.
돼지는 예로부터 풍요와 생명력의 상징이었으니까.
돼지 앞에 선 헤라리온은 이윽고 제물로 바쳐질 돼지를 향해 야누스의 권능을 사용했다.
“Sks r kRma qkato akrkadmf gkse k. R kRmadms qkato akrkadmf gksms s ork quffne k…….”
사아아아…….
주문을 외우자 손끝에서부터 죽음의 기운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야누스의 대표적인 권능들 중 하나인 ‘죽음의 박탈’이었다.
뿜어진 죽음의 기운은 곧 수퇘지를 덮쳤고 야누스의 은혜를 입은 수퇘지는 곧, 눈동자를 뒤집으며 고통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꽤애애액!
비명을 지르는 수퇘지.
죽음의 기운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나 죽음의 권리를 박탈당한 돼지는 쉽게 죽지도 못한 채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사는 몸이 되어 버렸다.
“셀렌.”
“예, 전하!”
의식이 시작되었다.
셀렌은 헤라리온에게 교육받은 대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뒤 제단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에 헤라리온은 비명을 지르는 돼지를 들어다가 신전의 제단 위에 올린 후 야누스를 불러들이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번뜩!
눈을 감고 있던 셀렌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며 ‘아서스’와 같은 붉은색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