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도화선 (4)
왈레드가 쓰러지자마자 실라이온이 역소환되며 태풍이 휘몰아치던 응접실에 다시금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헨리는 팔이 잘린 채 기절한 왈레드보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개입된 헥터에게 우선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헥터!”
-짹짹!
힘차게 대답하는 헥터.
대답을 마친 헥터는 곧바로 응접실을 빠져나가 코룬으로 육체를 갈아입고는 다시금 모습을 내비쳤다.
이에 헨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헥터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헥터! 지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화가 났다.
어차피 왈레드를 제압하려 했던 것은 맞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개입되어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는 이렇게 돌발 상황이 생기거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헥터가 뒷통수를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뭘 화를 내고 그래? 어차피 너도 검을 뽑으려고 했잖아?”
“그것은 엄연히 사전에 미리 계산해 둔 계획된 행위였다. 그리고 너는 내 계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헨리가 크게 화를 내자, 헥터는 그제야 헨리의 눈치를 보며 머쓱하게 사과했다.
“알았어, 알았어!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가 잘못했다.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테니 이쯤에서 그만 화를 푸는 게 어때?”
“좋다. 다음부턴 이런 식의 돌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았어, 알았어! 그보다 저놈, 저대로 그냥 놔둬도 괜찮겠어?”
헨리의 야단에 민망해진 헥터는 얼른 화제를 왈레드에게로 돌렸다.
왈레드는 잘린 어깨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에 헨리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엘라곤을 소환했다.
“엘라곤.”
-뀨?
“저 녀석 좀 치료해 줘.”
-뀨!
엘라곤은 어느새 훌륭한 응급 키트가 되어 있었다.
이윽고 따스한 빛이 왈레드의 잘린 팔을 감싸 안자, 분수처럼 피를 뿜던 왈레드의 팔이 말끔하게 지혈되었다.
이에 헨리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헥터를 질책했다.
“헥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돼! 만에 하나 이 녀석이 죽기라도 했으면 그때는 어쩔 뻔했어?”
“팔 잘린 건 괜찮고?”
“팔 하나쯤이야 없어도 사는 덴 지장이 없지만 죽어 버리면 수습이 안 되잖아.”
“알겠으니까 그만 좀 잔소리해. 어찌 됐든 사고는 안 쳤잖아?”
“후, 그래. 그보다 너는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있었던 거냐?”
“말은 똑바로 하자. 이곳에서 먼저 쉬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어. 그런데 갑자기 너희가 들어온 거지.”
헥터의 말은 사실이었다.
헥터는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참새의 육체를 빌려 낮잠을 청할 곳을 찾던 중 우연찮게 이곳에 들어와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말을 말지…….”
이에 헨리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자 헥터가 물었다.
“그보다 저놈은 누구이기에 다짜고짜 나타나서 궐련을 구걸하냐? 저 자식, 혹시 거지냐?”
“거지는 아니고 알프레드 이더웨더의 장남이다.”
“알프레드 이더웨더라면…… 전에 말한 그 삼대가문의 대후작?”
“그래, 그놈.”
“말세로군! 대후작씩이나 되는 놈의 장남이 저렇게나 약골이라니.”
“네가 너무 강한 거겠지. 아무튼 그런대로 나쁘지 않게 일이 풀렸어. 혼자서도 처리해도 됐겠지만 마침 네가 개입했으니 차후에 너를 증인으로 세우면 되겠군.”
“증인? 무슨 증인?”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 혼자서 팔이 터졌다는 식으로 덮어씌울 생각이거든.”
“뭐? 이럴 거면 아까 성질이나 부리지 말든가…….”
확실히 헥터는 좋은 증인이 될 수 있었다.
헥터는 현재 샤하트라의 대리인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이니, 제삼자로서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무리 참새한테 팔이 뜯긴 거라고 사실대로 설명해 봤자 믿을 턱이 있나?’
터무니없는 진실을 입증하기보다는, 차라리 믿기 쉬운 거짓으로 덮어씌우는 것이 훨씬 더 간편했다.
이윽고 헥터가 물었다.
“그럼 이제 저놈을 데리고 알프레드한테 가면 되는 건가?”
“아니, 아이젠에게 간다.”
“아이젠? 그놈한테는 왜?”
“나에게 칼을 들이밀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만들어졌으니 확실하게 준비해서 알프레드를 건드려야지.”
준비는 끝났다.
제대로 된 명분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남은 일은 아이젠에게 왈레드를 데리고 가서 알프레드를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이로써 드디어 알프레드 사냥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 * *
“……그래서, 이놈이 갑자기 혼자서 폭주하더니 이 꼴이 됐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헨리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기절한 왈레드와 함께 쇼난가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아이젠에게 기절한 왈레드를 보여 주며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이젠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삼대가문주들 중 하나인 이더웨더가의 장남의 팔이 잘렸다.
그것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가신과의 트러블을 통해서 말이다.
이는 분명히 큰 문제였다.
이윽고 헨리의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아이젠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의외의 반응이었다.
분명히 아이젠이라면 ‘자신의 소중한 가신’이 공격받은 것에 대해 대뜸 화부터 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이젠은 예상과는 달리 한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설마?’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헨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 자리의 풍경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여태껏 만년 백작으로 지내 오던 아이젠이 이제는 삼대가문주씩이나 되었으니 뒤늦게나마 점잔을 빼려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이젠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알프레드 이놈이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그럼 그렇지.’
이변은 없었다.
고뇌의 흔적인 줄로만 알았던 잠깐의 침묵은, 고뇌가 아닌 분노를 삭이는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이에 헨리는 안심했다.
그리고 헨리의 의도대로, 아이젠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하나뿐인 유능한 가신’을 하마터면 잃을 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아이젠이 헨리에게 물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너는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예, 다행히 목숨은 겨우 건졌습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헨리는 최대한 아이젠의 분노를 자극시킬 수 있는 단어들을 골라 성심성의껏 그를 자극했다.
“알프레드 그놈은 옛날부터 그런 놈이었지. 온갖 잘난 척이나 점잖은 척은 자기 혼자서 다 떨더니……. 이것 보라고! 결국은 지 자식새끼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는 놈이잖아?”
“맞는 말씀이십니다.”
“내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프레드 그놈한테 죗값을 물을 것이야!”
효과는 굉장했다.
헨리는 자신을 걱정하는 아이젠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평소에 알프레드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들을 늘어놓는 아이젠을 보며 헨리는 만족스러울 만큼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아이젠이 할 일은 본격적으로 알프레드를 만나 말다툼을 벌이는 것뿐.
그런데 그때였다.
“으음…….”
기절한 왈레드를 두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드디어 왈레드가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왈레드는 옅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어, 어?”
평소라면 쉽게 몸을 일으켰겠지만 지금은 마치 술을 먹은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왈레드는 그제야 자신이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이유가 왼팔이 사라졌기 때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내 팔이!”
“시끄럽다!”
팔이 사라졌다는 섬뜩한 현실에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왈레드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다름 아닌 아이젠의 호통이었다.
이에 왈레드는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헨리와 아이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아이젠 백작, 아, 아, 아니! 아이젠 후작님?”
호랑이 같은 아이젠의 얼굴을 확인한 왈레드는 격한 당황스러움에 그만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그 모습마저도 심히 꼴 보기가 싫은 나머지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다.
“칭얼대지 마라, 왈레드!”
이에 왈레드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팔이 사라진 것도 서러운데, 자신의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는 아이젠이 눈앞에 있으니 말문이 막히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쯧쯧, 한심한 놈 같으니.’
좀 전까지만 해도 헨리에게 궐련을 달라며 행패를 부리던 놈이, 아이젠 앞에서는 마치 범 앞의 하룻강아지처럼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아이젠은 남자답다고도 볼 수 있는 귀족 특유의 자만과 호쾌함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강자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왈레드를 보고 있자니, 저놈도 결국엔 아비를 뒷배로 두고 행패나 부리는 소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젠은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힌 왈레드에게 다시 한 번 차가운 일갈을 날렸다.
“울지 마라!”
“네, 넷!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왈레드, 네놈이 감히 내가 아끼는 가신의 집에 찾아가서 궐련을 달라며 행패를 부렸다면서?”
“아, 아, 아닙니다, 후작님! 저는 단지 저놈이 제 동생을 상대로 괘씸한 거짓말을 하여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시끄럽다! 그래도 네놈은 끝까지 변명뿐이로구나!”
“아, 아닙니다, 후작님! 전 정말로 사실만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애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는 왈레드.
이에 아이젠이 다시 한 번 호통쳤다.
“시끄럽다! 헨리는 그저 내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네놈은 헨리가 내 대리인인 걸 알면서도 감히 상급 정령을 소환했다고 들었다! 그 말인즉슨, 넌 애초부터 내 가신을 죽일 뜻을 품었다는 뜻! 내 말이 틀렸더냐!”
우지끈!
결국 화를 조절하지 못한 아이젠은 왈레드가 누워 있는 침대 바닥을 주먹으로 분질러 놓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침대.
아이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가 상당했다.
덜덜덜덜…….
그 투기는 한낱 왈레드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털썩!
과도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왈레드가 또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쯧, 또 기절한 것이냐? 한심한 놈 같으니…….”
이에 아이젠은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껄끄러운 혹평을 남겼다.
헨리는 아이젠이 말을 끝낸 직후, 곧바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무엇이 감사하다는 것이냐?”
“후작님께서 시키신 일이라며 제 잘못을 감싸 주신 것 말입니다.”
“됐다. 어차피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면 이편이 훨씬 더 일을 처리하기엔 용이하다. 그리고 헨리.”
자신은 시킨 적도 없는데 자신이 시킨 것이라고 헨리의 허물을 덮어 준 아이젠.
이어서 그가 말했다.
“너는 내가 가진 최고의 보물이다. 그러니 너의 잘못은 곧 나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기죽지 마라! 네가 당당하게 행동해야 내 체면 또한 사는 것이다.”
“후작님……!”
“됐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얼른 나갈 채비를 하여라. 마음 같아선 저 꼴도 보기 싫은 놈의 목을 당장이라도 치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간 정말로 일이 커지게 될 테니 알프레드에게 넘겨줘야 하지 않겠느냐?”
헨리는 좀 전의 격려로부터 자신을 향한 아이젠의 진심 어린 총애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헨리는 쑥스러움에 자리를 벗어나는 아이젠의 뒤통수를 향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나와 줘야 나중이 더 재밌어지는 법이지.”
믿음이 깊을수록 배신에 대한 상처 또한 배가된다.
그러나 어느 방향이 됐든 간에 헨리에겐 그저 우스운 연극 놀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