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칼리번의 군부 상인 (1)
살게라의 독방에 갇힌 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동안 오베르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죽지 않을 만큼만 배급되는 식량과 이가 시리는 추위, 그리고 꾸준한 매질.
마지막으로 분리된 가족들에게 매일같이 오베르의 잘못을 읊어 줌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모두 오베르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효과는 뛰어났다.
그리고 인간은 참 간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생을 오베르 덕에 호의호식하며 살았으면서 이제는 그 분노를 모두 그에게로만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충분히 깊어졌을 때쯤, 헨리는 오베르와 가족들을 합방시켜 철저하게 오베르의 마음을 짓밟도록 했다.
그러나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오베르는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남은 전 재산과 맞바꾸어 간수에게 편지의 전달을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 편지들만 전달된다면 난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다, 반드시!’
하지만 그 편지가 두 사람에게 전달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편지의 전달을 부탁받았던 헨리는 현재 샤하트라에서 헤라리온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비가 끝나는 대로 헥터 경과 함께 비발디 타운으로 물건들을 보내겠습니다.”
헨리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헤라리온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교역품을 포함한 다른 이야기들은 밤새도록 실컷 나누었으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아참, 그리고 헥터에게도 전해 주시겠습니까? 마법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끝마쳤을 때, 헨리는 그제야 헥터에게 성형술을 시전해 주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코룬의 육체에 행한 작업이라 그런지 난이도 자체는 반에 비해 헥터가 훨씬 더 높았다.
그리고 헥터는 수술이 끝난 후, 회복을 취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당부를 마친 헨리는 이윽고 텔레포트를 시전하였다.
“그럼.”
우웅!
짧은 목례와 함께 광휘가 번쩍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 * *
헨리가 도착한 곳은 칼리번 요새에서 멀지 않은 어느 한적한 숲속이었다.
‘간만이군.’
칼리번의 영역에 도착한 헨리는 과거의 추억을 곱씹으며 요새의 정문으로 이동했다.
“어이, 거기. 동작 그만.”
정문 앞에 다다른 순간, 아니나 다를까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이 제지했다.
이에 헨리는 품속에서 신분패를 꺼내 정문에 설치된 망루로 던져 넣었다.
“어, 어?”
이번에도 헨리는 순수한 완력만으로 신분패를 던져 넣었다.
이에 당황하며 신분패를 집어 드는 병사.
병사가 집어 든 신분패에는 청명하게 빛나는 세 개의 푸른색 별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이, 이건!”
심지어 신분패의 뒤편에는 이셀란의 인장과 함께 칼리번 요새의 심벌이 그려져 있었다.
“소, 소, 소장님!”
당황한 병사가 신분패를 가지고서 휴게실에서 체스를 두고 있던 허번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성문 옆에 난 비밀 통로가 개방되며 허번트 경비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충성! 이게 누구십니까? 헨리 공이 아니십니까?”
반갑게 헨리를 맞이하는 허번트.
고작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 복무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특임 대장으로서 엄청난 업적들을 세운 이력이 있었기에 요새에서는 아직도 간간이 헨리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경례로 화답하는 헨리.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직후 허번트가 물었다.
“그런데 전역하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셀란 일대장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대장님을요? 하하,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이셀란 일대장님은 더 이상 일대장이 아니십니다.”
“그럼요?”
“이제는 부사령관님이십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뜻밖의 호재에 헨리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동안의 이셀란은 귀찮음을 이유로 일부러 진급을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부사령관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은 호재이기도 했지만 좀 의외의 소식이기도 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자세한 이야기는 부사령관님께 직접 들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검문검색도 없이 이렇게 쉽게 들여보내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 공이라면야 충분히 괜찮습니다.”
일사천리였다.
과거의 영광을 바탕으로 헨리는 자질구레한 절차 없이 쾌속으로 이셀란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일대장실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크기의 건물이었다.
헨리가 안내 병사와 함께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위층에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리이이이!”
쿵! 쿵! 쿵! 쿵!
거대한 발소리와 함께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그.
부사령관이 된 이셀란이었다.
‘패기 넘치는 건 여전하군그래.’
한결같아서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는 불길함을 감지했다.
이셀란이 계단을 내려오고 복도에 발을 디딘 이후에도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속도를 드높이며 등에 찬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이런!’
위험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에 헨리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어 유성처럼 떨어지는 그의 검을 막아 세웠다.
카아앙!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복도 전체를 가득히 메웠다.
이셀란은 금방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헨리의 빈틈을 공략했다.
캉! 캉! 카앙!
쏟아지는 칼질.
투핸디드 소드를 몽둥이 다루듯이 휘두르는 그의 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흠!”
숨을 짧게 집어삼킨 후 강하게 이셀란을 압박하기 시작하는 헨리.
헨리는 순식간에 주변에 원을 그렸다. 그러면서 수비하는 척하더니 이내 다시 날카롭게 검을 뻗어 헥터의 검술을 취했다.
슈아아악!
챙캉!
이셀란의 목젖을 노리고 찔렀다.
이에 이셀란이 황급히 검날을 세워 기습을 막아 냈다.
칼끝과 칼날이 맞부딪혔다.
팽팽한 힘겨루기.
이윽고.
챙캉!
검을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리는 이셀란.
그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녀석, 그동안 마냥 놀지만은 않았나 보군.”
“……격한 건 여전하시군요.”
살기가 담겨 있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이셀란 정도쯤 되는 검사들은 살기를 하나의 도구쯤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흐흐, 드디어 마음이 바뀐 것이냐?”
“무슨 마음…… 말씀이십니까?”
“재입대를 해서 내 뒤를 잇겠다는 그런 마음 말이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그냥 안부나 여쭐 겸 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싱거운 놈! 인사는 이쯤하면 됐으니 올라가서 차나 한잔하자꾸나.”
격한 환영식이 끝났다.
환영식이 끝나자 복도의 프론트를 담당하던 병사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더욱더 거대해진 집무실.
부사령관의 집무실은 일대장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호화로웠다.
그리고 그 집무실의 한편에는 티니가 앉아 있었다.
티니를 발견한 헨리가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티니 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웃는 낯으로 인사말을 건네는 헨리와는 달리 티니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년이었다.
1년 동안이나 꾸준하게 헨리를 유혹했지만 헨리는 끝끝내 그녀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어색한 기류를 확인한 이셀란이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티니에게 말했다.
“흐흐, 불쌍한 것.”
“……조용히 하세요, 부사령관님.”
“불편하면 잠시 나가 있어. 그 정도 배려는 내가 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불편하다니요? 저는 지금 부사령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크크크크, 그래그래. 그럼 가서 냉수나 좀 내와.”
새침하게 돌아서는 티니.
그것을 본 헨리 또한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이윽고 쇼파에 앉은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쪽은 이셀란이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아직 전역한 지 반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말이야.”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장님을 뵙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더군요.”
“그런 놈이 날 버리고 홀랑 제대를 해? 그런 말은 입에 침이나 바르고 지껄여라!”
“하하, 입술은 충분히 촉촉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아무튼…… 그래서,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냐? 정말로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설마 벌써 도움이라도 필요한 게냐?”
“역시 대장님이시라면, 아니 이젠 부사령관님이시군요. 부사령관님이시라면 바로 알아봐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셀란과는 겉치레적인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이에 헨리는 칼리번 요새에 방문한 목적을 말했다.
“제가 이번에 자그마한 상단 하나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칼리번 요새에 드나드는 정기 교역상 자리 한자리를 좀 내주셨으면 합니다.”
“군부 상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냐?”
“상인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마물의 숲에서만 채취되는 재료들이 저에게 꼭 필요해서 말입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교역상 자리를 내 달라고?”
“그렇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이셀란.
그리고.
“그학학학학!”
이어서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이셀란.
그 웃음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미친놈. 다짜고짜 와서 군부 상인 자리를 내 달라고 하면 내가 덥석 내줄 줄 알았더냐?”
“솔직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그학학학!”
더 크게 웃어젖히는 이셀란.
헨리는 과장하지도, 꾸미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화법이 이셀란을 다루기엔 더 좋았으니까.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알겠다! 내 특별히 한자리 마련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부사령관님.”
“크크크, 그래그래. 그나저나 네 이야기는 들었다. 이번에 아이젠 그놈을 후작으로 만든 것이 바로 네놈이라면서?”
“……예?”
생각지도 못한 언급에 헨리는 깜짝 놀랐다.
이에 이셀란이 다시 한 번 괄괄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놀란 표정하고는. 왜, 내가 그 정도 정보력도 없을까 봐서?”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정보다. 녀석, 그렇게 출세를 목 놓아 부르더니 전역을 택한 이유가 있었군그래.”
헨리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아이젠의 가신 자격으로 황궁 연회에 참석하긴 하였으나,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아 사실상 참석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온종일 요새에 있을 이셀란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더더욱 의아했다.
“이놈 이거, 표정을 보아하니 이야기가 길어지겠어? 그럼 간만에 술이나 한잔하지. 티니! 난 이만 퇴근해도 괜찮겠지?”
“……언제부터 저에게 허락을 구하셨습니까?”
“맞아, 그러니 수고 좀 해 줘.”
부사령관이 된 이셀란은 훨씬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된 듯싶었다.
그러나 속 편하게 말하는 이셀란과는 달리 헨리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할 이야기가 많아지겠군.’
요새에서만 지냈을 것이 분명한데 대체 이셀란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헨리는 무식하게 쏟아부어야 하는 이셀란과의 술자리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분 좋게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가자고. 이번에 옮긴 집에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술들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이셀란의 관사.
관사에 도착한 헨리는 가장 먼저 허리띠부터 풀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