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과거 청산 (1)
반은 텐으로부터 텐의 정보기관이 조사한 은거 고수들에 대한 명단을 넘겨받았다.
‘세 명이라…….’
꽤 오랫동안 시간을 들인 것치곤 머릿수가 적은 듯했다.
하지만 양보다는 질이라고, 꽤 오랫동안 시간을 들인 만큼 확실한 정보들이라 믿고 반은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비발디 타운을 떠났다.
물론 헤글러와 함께 말이다.
“스승님, 지금 어디로 가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헤글러는 반과 단둘이 있을 때면 부단장이나 형님이 아닌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과거라면 몰랐을까, 이제는 그편이 훨씬 더 입에 붙었기 때문이다.
“비밀이다, 이놈아.”
“……알겠습니다.”
헤글러의 호기심은 헨리가 반에게 의문의 종이를 건네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것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반은 묘한 웃음만 지어 보일 뿐, 한 번도 속 시원히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
다그닥다그닥.
반은 종이에 적힌 약속 장소와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적당한 때에 출발했군.’
여유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약속 장소에는 손님들이 먼저 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이동하던 중, 반이 물었다.
“헤글러.”
“예, 스승님.”
“니아가 올해로 몇 살이었지?”
“이제 네 살이 되었습니다.”
“한창 귀여울 때지.”
“저에겐 전부인 아이입니다.”
“니아가 전부면 소나 씨는?”
“물론 소나도 그렇습니다. 저에겐 제 가족들이 전부이고 제일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네 가족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단장님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데 왜 아직도 익스퍼트야?”
“그건…….”
선임 병사가 후임에게 흔히들 하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시답잖은 농담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농담들 속의 대부분에는 반의 헤글러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이에 반이 말했다.
“헤글러.”
“예, 스승님.”
“넌 좋은 놈이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말고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되어라.”
“물론입니다. 항상 명심하고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평소에도 조언을 많이 해 주는 반이었기에 헤글러는 이번에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궁금하냐?”
“궁금합니다. 사실 이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검술을 연습해야 하는데 무작정 저를 끌고 가고만 계시니 무척 궁금합니다.”
“후후,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다. 마침 약속 장소에 거의 다 오기도 했고 말이야.”
“설마, 지금 가는 곳이 수련을 위한 그런 곳입니까?”
“수련이라,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다행인 것 같습니다. 스승님께서 수련이라고 하실 정도면 분명히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마침 저기 보이는군. 오호, 게다가 손님들도 진작 와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손님…… 말씀이십니까?”
손님이라는 말에 헤글러의 고개가 정면으로 향해졌다.
“……!”
그리고 헤글러의 시선이 그곳에 닿은 순간, 헤글러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스, 스승님?”
“왜? 반가운 얼굴들이 아니더냐?”
시선이 닿은 곳에는 꽤나 익숙한 문양의 깃발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덱스터가의 깃발이었다.
그리고 덱스터가를 이끄는 디알로 백작.
그는 과거에 헤글러에게 팔 하나와 다리가 부러진, 헤글러의 아내, 소나를 겁탈하려 한 적이 있던 쓰레기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사병들과 함께 진을 치고 헤글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헤글러?”
호리호리한 인상을 가진 그가 여우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헤글러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이에 헤글러가 말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크크크, 겁먹은 모양이로군.”
비아냥거리는 소리.
그럼에도 헤글러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헤글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반을 쳐다보며 물었다.
“스승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저자들은 분명히…….”
“그래, 네가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고 도망친 디알로 백작이지.”
“그걸 아시면서도……!”
“헤글러.”
“예, 예!”
날카롭게 변하는 눈빛.
반이 약간의 살기를 담아 헤글러의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이어지는 반의 물음.
“설마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더냐?”
“거짓말이라니요? 저는 스승님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기 가서 지저분한 과거를 청산하고 와라. 항상 떳떳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한 건 바로 네놈이었으니까.”
‘설마 처음부터……!’
그제야 헤글러는 이 모든 상황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깨끗하게 청산해야 하는 법.’
헨리가 반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에 반이 뒷말을 덧붙였다.
“우리의 발목이나 잡는 놈은 필요 없다. 그러니 죽을힘을 다해 과거를 청산해라.”
반은 마치 낭떠러지로 자식을 밀어 넣는 사자의 그것처럼 말했다.
차가운 말이었다.
이에 헤글러는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억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오랫동안 디알로 백작을 피해 도망쳐 왔건만, 안전하다고 생각됐던 바람막이가 자신을 궁지로 밀어 넣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다, 단장님께서 대체 왜? 내가 저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아셨을 텐데, 대체 왜……?’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들은 어떻게 알고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단장이 덱스터 백작과 내통한 것일까?
아무리 용병단이 확장되면서 더 큰 힘을 원한다고는 했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식으로 통보를 내린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내와 딸은 텐의 저택에서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허무하게 개죽음을 당한다면 남은 가족들의 미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가 싫었다.
이에 헤글러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 반에게 물었다.
“……마, 만약 제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대답과 함께 반이 입꼬리를 슬쩍 당겨 올려 보였다.
차가운 미소.
짓궂긴 해도 항상 따뜻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반의 얼굴이 순식간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느껴졌다.
꿀꺽.
이에 헤글러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십여 명이 넘는 사병들.
헤글러는 본능적으로 저들의 강함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최소한이 상급 익스퍼트 유저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 강해 보였다.
그에 반해 자신은 고작해야 최상급 익스퍼트 유저. 더불어 머릿수도 한 명밖에 되지 않았다.
승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우물쭈물하는 헤글러를 본 디알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헤글러! 나는 너에게 팔이 부러진 이후, 내 인생의 목표를 오롯이 너를 죽이는 것에만 두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한을 풀려고 한다.”
광기가 잔뜩 묻어나는 외침에, 헤글러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낱 평민에 불과한 자신을, 그것도 백작씩이나 되는 귀족이 혈안이 되어 잡으러 다녔다면 그 소문은 이미 대륙 전역에 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맞아, 이게 현실이었어…….’
밀리언 용병단에 입단한 직후, 헤글러는 승승장구하는 헨리를 보며 더 이상 디알로에게 쫓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속 편한 착각이었음을 오늘에서야 다시금 깨달았다.
헨리가 승승장구하여 대후작의 가신이 된 것은 순전히 헨리의 위상이 드높아진 것이지, 자신의 위상이 드높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헤글러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헤글러를 보며, 디알로가 혀로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크흐흐, 헤글러! 난 너를 절대로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네놈을 산채로 붙잡은 다음 네놈이 보는 앞에서 네 처와 딸년을 잡아다가 차례대로 겁탈한 뒤 돼지우리에 던져 주마. 킬킬킬킬.”
여우 같은 웃음 속에는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교활함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자칫하면 그 말이 머지않은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헤글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무너졌다.
또한 그럼에도 반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어느 방향이든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에 디알로가 외쳤다.
“크흐흐흐! 그럼 그동안 얼마나 잘 먹고 다녔나 영양 상태부터 한번 확인해 볼까? 웨튼! 살롬! 너희들이 한번 확인해 봐라.”
“예!”
디알로가 준비한 병사들은 최소가 상급 익스퍼트 유저들이었다.
마음 같아선 소드 마스터들로 추격 부대를 꾸리고 싶었으나 마스터급 유저들은 최하급이라 할지라도 부르는 게 값인지라 아쉬운 대로 익스퍼트급 유저들을 잔뜩 고용했다.
열두 명의 병사들 중 앞으로 나서는 웨튼과 살롬.
두 사람은 각자 해머와 롱 소드를 사용하는 상급 익스퍼트 유저들이었다.
우득.
우드득.
잔인하기로 소문난 웨튼과 살롬은 이인조로 활동하는 용병들이었다.
먼저 이름이 호명된 두 사람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윽고 웨튼이 목 관절을 휘휘 돌려 보이며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지 실력 한번 보자고.”
“크흐흐흐, 내 해머로 정강이부터 짓이겨 주지.”
눈에 난 상처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걱!
툭, 투두둑, 툭.
“……!”
번쩍이는 푸른색 광명이 잠깐 스치더니 웨튼과 살롬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광명의 정체는 반이었다.
“이, 이 무슨……!”
이에 디알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네노오옴!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아!”
핏줄을 세우며 고함을 치는 디알로.
그의 외침에 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대꾸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귀가 썩을 것 같아서 말이야. 방금 벤 두 놈은 내 두 귀를 썩게 만든 벌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고 싶다면 잠자코 입 다물고 하자고.”
“뭐, 뭐라고?”
“왜? 불만 있어?”
격분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반을 노려보는 디알로.
그러나 그는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살기를 가진 눈빛.
고작 시선을 마주쳤을 뿐인데 하마터면 심장이 내려앉을 뻔하였기 때문이다.
‘제, 제기랄……!’
자존심보다 본능이 앞섰다. 그랬기에 분해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웨튼과 살롬의 잘린 목구멍으로부터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쏟아진 핏물이 웅덩이가 되어 바닥에 고였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무너졌던 헤글러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말았다.
“스, 스승님?”
순식간에 벌어진 순간이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두 사람의 목이 잘리고 난 뒤였다.
이에 디알로의 다른 병사들이 두 사람의 시체를 치웠다. 하지만 헤글러는 그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시험이다! 지금 이것은 단장님과 부단장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의 목이 잘리고 난 뒤에야 헤글러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헤글러는 그제야 미약하게 떨고 있던 칼끝을 멈출 수가 있었다.
“간다.”
헤글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또한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먼저 선전포고를 외치며 이제 겨우 열 명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흔적들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내던졌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것을 본 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