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변수 (2)
‘정령의 알?’
마치 흑요석을 연상케 하는 둥글고 시커먼 구체.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저것은 분명한 정령의 알이었다.
‘저게 왜 여기서 나와?’
의아했다. 이곳은 오베르의 비밀 창고인 데다 정령들이 좋아할 만한 특수한 자연환경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정령의 알이라고 확신한 까닭은 엘라곤이 입에 물고 있는 저 동그란 물체에서 엘라곤의 알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종류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라곤이 먼저 반응한 걸 보면 정령의 알인 건 확실한데…….’
정령의 알을 찾은 엘라곤은 마치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한 강아지처럼 입에 알을 물고서 헨리에게 다가와 얼굴을 비벼 댔다.
헨리는 그런 엘라곤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기특한 녀석.”
정령이 정령에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듯, 정령이 정령의 알을 찾아내는 것 또한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정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쉽게 정령의 알을 찾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정령의 알을 느끼기 위해선 알에 대한 뛰어난 교감력을 필요로 했는데 아무래도 엘라곤에겐 그런 종류의 교감력을 좀 타고난 듯했다.
‘게다가 희귀하기도 엄청 희귀하고 말이야.’
운이 좋았다.
평생에 한 번 발견할까 말까 한 정령의 알을 벌써 2개나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품에 안긴 엘라곤이 입을 벌려 알을 내밀었다.
‘근데 이런 알이 있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데…….’
알을 받아 든 헨리는 라이트에 그것을 비추어 보며 알의 정체를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헨리가 가진 지식들 중에는 이것과 대조될 만한 정보가 없었다.
‘결국 그 수밖엔 없나.’
마력을 다루고 원소학을 공부하는 마법사들은 정령사와 그 성질이 비슷하여 이론적으로는 정령을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공식과 법칙을 이용하여 정령을 다루는 것이었기에 전문 정령사들만큼 뛰어나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전생의 헨리는 전문 정령사들만큼의 친화력과 재능을 갖추지 못해 상대적으로 정령에 대한 관심이 덜했다.
물론 관심을 깊게 가지지 않았을 뿐이지 헨리가 정령학에 아예 손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지하 창고의 크기를 가늠해 본 뒤 엘라곤을 역소환한 후 창고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냐느없 도무아 게. 라너오 리이, 헴엣.”
우웅!
주문과 마법진이 맞물리며 이계의 존재가 소환되었다.
소환된 존재는 바로 ‘교환의 정령, 스칼’.
이윽고 헨리의 눈앞에 반인반수의 형상을 한 두꺼비 인간, 스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냐?
“반가워, 스칼.”
-자주 불러 준다더니 왜 이렇게 오랜만에 불러?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전생 직후, 이미 한 번의 거래를 진행하였기에 스칼은 제법 익숙한 태도로 헨리에게 알은체를 했다.
이윽고 스칼이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번엔 그나마 사람 사는 집 같은 곳에 있더니, 그사이에 쫄딱 망해 버리기라도 한 거냐?
“쓸데없는 소리. 사설은 각설하고 이거나 좀 봐 줘.”
차나 한잔하면서 사담이나 늘어놓을 시간은 없었다.
헨리는 곧바로 흑요석을 닮은 정령의 알을 스칼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건…….
“아는 물건이야?”
-정령의 알이군.
“그건 나도 알아.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알인지를 묻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뭐라고?”
-정말이야. 이게 정령의 알인 건 느낌으로 대충 알겠는데 어느 놈의 알인지는 나도 모르겠는걸. 이렇게 생긴 알은 나도 난생처음 본다고.
“농담이라면 사양하지. 인간계의 모든 것을 관찰하는 네놈이 모르는 것이 있다고?”
-확실히 ‘인간계의 것’은 내 전문이지. 하지만 이건 인간계의 것도, 자연계의 것도 아닌데?
“그럼?”
-이 녀석도 나와 같은 이계의 냄새가 난다.
“이계?”
-그래. 생긴 게 음침하게 생겨서 명계인지, 이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인간계의 것은 아니야.
“그럼 특수계란 말이겠군.”
-네놈들 말로 하자면 특수계의 특수 정령이 맞겠지.
“이런…….”
그 스칼조차 모르는 녀석이라고 하자 헨리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이에 스칼이 말했다.
-아쉬우면 ‘정령학자’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인간 놈들 중에는 우리에 대해 연구하는 놈들도 좀 있으니까.
정령학자. 정령사임과 동시에 정령에 대해 깊이 공부하는 정령사들의 지식인을 뜻했다.
“그건 안 돼.”
-왜?
“현재 정령사 쪽은 알프레드 그놈이 전부 독식하고 있는 상태다. 함부로 이런 정보를 흘렸다간 금방 알프레드 그놈 귀에 들어갈 게 뻔해.”
-알프레드라면…… 그 알프레드 이더웨더? 맞아, 그놈도 정령사였지? 꽤 유능한 정령사였던 걸로 기억해. 근데 너네, 앙숙이었던가?
“정확히는 원수 관계지.”
-그럼 어쩔 수 없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없는 정보를 지어내서 팔 순 없잖아?
스칼은 양심적인 장사꾼이었다.
녀석은 더 이상 거래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이내 곧 자취를 감추었다.
‘정령학자 외엔 별수가 없나?’
헨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조사는 불가피하다 여긴 헨리는 엘라곤을 품었을 때처럼 왼쪽 팔뚝에 알을 집어넣은 다음 모몬트를 벗어났다.
* * *
며칠 후, 헨리가 예상한 대로 황궁에선 공석이 된 대후작을 다시 뽑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준비는 충분했다.
어떤 질의응답이 나오든 간에 아이젠이 충분히 대화를 주도할 수 있게끔, 요 며칠간 혹독하게 아이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물론 헨리가 아이젠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저택의 모든 이들이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독불장군으로 유명한 그 아이젠을, 헨리는 아이를 다루듯이 너무나도 쉽게 다루어 낸 탓이다.
국좌 앞에 다섯 명의 대신과 황제가 모였다.
아서스 공작이 비어 있는 오베르의 자리를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찌 됐든 오베르는 먹이사슬에 도태된 것뿐이었으니까.
이윽고 황제가 말했다.
“그래. 이제 후작 자리가 하나 남게 됐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고민할 게 있나? 이번에 아이젠 백작이 공을 세웠으니 아이젠 백작이 후작으로 승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은데?”
황제는 무릎에 궁녀를 앉힌 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이에 알프레드 후작이 말했다.
“폐하, 그것은 옳지 못한 처사입니다.”
“뭐라?”
폭군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삼대가문의 일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황제는 눈썹 한쪽을 치켜들었을 뿐, 달리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왜 옳지 않지?”
“폐하, 오베르가 물러난 대후작 자리는 대백작보다 더더욱 국정에 힘을 쏟아야 하는 자리이옵니다. 한데 능력이 아닌 단순한 공로로 그 자리를 치하하신다면 반드시 제국의 운영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대는 꼭 아이젠의 능력을 못 미더워하는 것 같군.”
“못 미더워하기보단 다른 백작들 또한 여태껏 출중한 능력을 보여 주었기에 동등한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등한 기회라…….”
실버 잭슨 에드워드 2세.
시야가 편협하고 머리에 든 것이 없으며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둔한 폭군이었다.
하지만 무능한 자일수록 그럴듯한 수식어와 탁상행정을 좋아하는 법. 그렇기에 이번에 황제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동등한 기회’였다.
“흠,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알프레드의 몇 마디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이젠의 승작에서 모두의 기회로 그 틀이 전환되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조금도 낯빛을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노련한 현자처럼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후, 대화의 빈틈이 생기자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폐하, 저 또한 알프레드 후작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오, 그게 사실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무릇 여기 모인 대가문주들이라 함은 제국의 발전을 위하여 수많은 귀족들 중에 대표로 뽑힌 이들. 그렇기 때문에 대후작 같은 중요한 자리를 단순한 공로의 치하로 임명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오오…… 역시 자네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충신일세.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 마음씨가 그리도 깊은가?”
“과찬이십니다, 폐하.”
청산유수같이 쏟아지는 아이젠의 언변에, 다른 대가주들은 다시 한 번 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놈 뭐야?’
‘저놈이 원래 저렇게 말을 잘했다고?’
‘잠룡이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겉모습만 화려한 멍청이.
사교계에서 붙은 아이젠의 별명이었다.
하지만 오베르를 집어삼킨 직후에 붙은 별명은 다름 아닌 ‘잠룡’이었다. 멍청이에서 잠룡으로 둔갑한 아이젠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흐흐흐, 확실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며칠 동안 감행된 헨리의 스파르타식 교육 덕분이었다.
하지만 고지식할 줄 알았던 아이젠을 가르치기란 의외로 쉬웠다. 그도 그런 것이 저번 고발령을 기점으로 아이젠은 이제 똑똑이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게 어떠한 맛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약 같은 것이었다. 한평생 남들 위에 서서 아랫것들을 호령하며 살았다지만 그것은 단순한 위치 차이에 발생하는 우위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가문주들 같은 똑똑이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과시 중의 과시였다. 그리고 과시의 쾌락을 아는 아이젠에게 있어 헨리의 교육법은 마약 같은 희열을 낳고 있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백작이 저리 말해 주니 마음이 한결 편하군. 모두들 백작의 성품을 본받도록 하시오.”
“예, 폐하.”
“자, 그럼 이젠 어떻게 대후작을 뽑는 게 좋을지 한번 의논해 보도록 하겠소. 좋은 방법들을 알고 있다면 눈치들 보지 말고 편안하게 말들 해 보시오.”
기분이 한껏 좋아진 황제는 마음 편히 이야기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가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한들, 실질적으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삼대가문주와 아이젠 정도였다.
이에 아이젠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오오, 당연히 되고말고. 그대는 좋은 의견이라도 있소?”
“어차피 엇비슷한 기량이라면 정식으로 결투를 가려 그 기량을 가늠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결투를 통해 기량을 가린다?”
“그렇사옵니다. 어차피 개개인의 능력이 비슷하다고 사료되면 차라리 공정한 결투를 통해 기량을 가리는 것이 옳은 처사임을 아뢰옵니다.”
결투.
아이젠의 입에서 ‘결투’라는 말이 나오자 다른 대가주들의 눈이 다시 한 번 동그랗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모두 다 제각각이었다.
‘머리를 좀 썼군.’
삼대가문주들은 대번에 아이젠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공정한 결투라는 핑계로 자신들의 개입을 막으려는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알프레드가 목소리를 드높이며 말했다.
“백작! 지금 폐하 앞에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오! 결투라니! 백작은 지금 대가문주들끼리 칼을 겨누자는 것이오?”
알프레드가 황급히 아이젠의 의견을 저지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아이젠은 미리 교육받은 대로 대꾸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뭐, 뭣?”
“어차피 저희가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종목을 나누어 신사적으로 대결을 하자는 것뿐인데, 그것이 어찌 서로에게 검을 겨눈다는 것입니까?”
“그, 그런!”
“크학학학학!”
그때였다.
두 사람의 논쟁이 과열되려던 찰나, 황제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폐, 폐하?”
“크흐흐흑, 좋아, 아주 좋아! 백작, 말 한번 잘했소. 그것 참 재미있는 생각이로군. 크크크큭!”
황제는 진심으로 웃었다.
아이젠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아이젠이 여세를 몰아 근거를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는 그저 이 기회에 저의 능력을 확실하게 폐하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뿐이옵니다.”
“그대의 진심은 잘 알겠소! 그러니 이번에 있을 대후작 승작전은 백작의 말대로……!”
헨리의 계획대로 황제의 취향을 제대로 건드린 아이젠은 계획대로 일을 성공시키는가 싶었다.
그런데 황제가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곁에서 대기하던 환관이 갑작스레 황제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황제의 눈이 부릅떠졌다.
“뭣이? 반란이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