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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87화 (87/522)

# 87

변수 (1)

모몬트에 들르기 전, 헨리는 먼저 아이젠의 저택에 방문하여 얼굴을 비쳤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그래, 오베르 그놈들은 잘 해결하고 왔고?”

“최대한 오래 살려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백작님을 능멸한 죄질을 생각하면 몇십 년을 살게라에서 썩게 해도 모자랍니다.”

“역시 자네야. 하나를 시키면 열을 해내니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를 또 어디서 구하겠나?”

“믿어 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베르가 몰락함과 동시에 헨리가 쇼난가에서 가지는 입지는 절대적인 위치가 되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들을 헨리가 직접 준비하여 아이젠의 입에 떠먹여 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뒷방 늙은이 신세였던 아이젠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화려한 멍청이’라는 별명 대신 ‘잠룡’이라는 새로운 별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잠룡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그 덕분에 쇼난가의 저택에는 유례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근심 걱정이 말소되었으니 스트레스를 동반한 아이젠의 히스테리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헨리는 아이젠뿐만이 아니라 아직 얼굴도 모르는 저택의 모든 이들에게 수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뜻을 바꿀 생각이 없느냐?”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제 뜻은 확고합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라니, 뭐…….”

헨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이젠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쇼난가의 ‘가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가신이라 하면 가문의 저택에 기거하며 가문 사람들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헨리가 보통의 가신처럼 생활하게 될 경우, 여러모로 행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므로 헨리는 보통의 가신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인 ‘외부 가신’이라는 직책을 택했다.

외부 가신.

저택에 기거하지는 않지만 가문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회의에 참석하여 가문의 정사를 함께 돌보는 직책.

말하자면 가신들 중에서도 서열 2위쯤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말이 서열 2위였지 현재 쇼난가에는 가신이라 할 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아이젠과 그의 자식들을 제외한다면 헨리가 실질적인 이인자인 셈이나 다름없었다.

‘내부 가신이나 외부 가신이나 다 똑같은 가신일 뿐이지.’

그 말인즉슨,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이름 따위가 아닌 쇼난가에서 가지는 실질적인 힘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백작님, 최근 황궁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분위기? 황궁 분위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거기라고 뭐 별다를 게 있겠어?”

‘후, 내가 이런 놈한테 당했다니.’

새삼스럽지만 아이젠의 멍청함은 참 한결같았다.

그래서 대화를 나눔에 있어 간혹 답답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차라리 한결같이 멍청한 게 낫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에 헨리가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다시금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오베르가 쫓겨났으니 이제 대후작 자리가 하나 남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에 따른 다른 대가주들의 분위기를 여쭙는 것입니다. 혹시 알프레드 후작이나 아서스 공작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습니까?”

“아, 맞아! 알프레드 그놈이 경고 같은 걸 하긴 했어. 대후작 자리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이야. 참 건방진 놈이야, 제깟 놈 주제에 감히 나한테 경고라니.”

아무래도 아이젠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헨리가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남은 삼대가문주들은 백작님의 승작을 별로 탐탁찮아 한다는 게 확실해졌군요.”

“그놈들이 탐탁지 않아 하면 뭐, 자기네들이 어쩔 거야? 어차피 나 이외엔 승작할 사람도 없는데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당연힌 신경 쓰셔야지요.”

“왜?”

“대가문주가 되기 위해선 황제의 동의는 물론이고, 다른 대가문주들의 동의 또한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승작 직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얘기인데, 실세인 삼대가문주들이 백작님의 승작을 불편해한다면……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좀 곤란한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폐하는 이미 나에게 마음이 기울었고 내 밑에 있는 두 백작 놈은 나와 같은 무장 집안이니 위아래가 확실하거든.”

아이젠의 호언장담을 듣던 헨리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평생을 남들 위에서 호령만 하고 살아서 그런지 대인 관계에 대한 이해나 정치에 대한 분석력이 애보다도 못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백작님.”

“뭐가 아니야?”

“삼대가문주들과 백작님의 관계는 이미 과거에 한번 틀어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 입장에서는 사이가 안 좋은 백작님을 후작으로 들이는 것보다는 다른 백작들을 후작으로 들이는 것이 오히려 다루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러니 신경을 쓰셔야 한다는 겁니다.”

“흠흠, 역시 자네는 훌륭한 인재야. 자네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헨리가 핵심을 짚어 주자 아이젠은 그제야 자신의 안일함을 깨닫고 헛기침과 함께 헨리를 칭찬했다.

이에 헨리는 아이젠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다시금 말을 골라 주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백작님을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로 올려다 드리는 게 제 꿈입니다.”

“흐흐, 넌 역시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구나. 아무튼 네 말마따나 곧 있으면 공석이 된 대후작 자리에 대한 인사 건으로 대가문주들의 소집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백작님께서 비록 공을 세우셨다고는 하나 그것 이외엔 모든 것이 불리합니다. 그러니 백작님께서 먼저 선수를 치시지요.”

“선수를 치다니?”

“어차피 삼대가문주들과 황제의 협의 하에 대후작을 뽑는다면 백작님께서 먼저 공정한 과정으로 대후작을 뽑자고 건의를 하는 겁니다.”

“내가 먼저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차피 대외적으로는 공정한 심사 끝에 뽑는다고 하겠지만 내적으로는 치열한 정쟁과 눈치 싸움이 벌어질 게 분명할 터. 그렇게 되면 백작님께서 절대적으로 불리해지십니다. 그러니 심사 과정이 평범한 과정으로 흘러가게 두는 것보다는 폐하의 흥미를 자극하여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혀 다른 방법이라……. 혹,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느냐?”

“결투를 하는 겁니다.”

“결투?”

헨리는 아이젠에게 유리한 심사 과정을 선점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름 아닌 ‘결투’를 택했다.

“그렇습니다. 귀족들 간의 명예로운 결투. 굳이 기어스 같은 거창한 맹약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차피 공정해야 한다면 실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결투가 좋습니다.”

“흐음, 결투라……. 어차피 세 가문 모두 무골 집안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런데 과연 폐하께서 흥미를 보이실까?”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자고로 싸움 구경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지 않습니까?”

헨리의 제안에, 이내 아이젠이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결투가 좋겠군. 그럼 우리 측에선 누굴 내보내면 좋겠느냐?”

“제가 나가겠습니다.”

“네가 직접?”

“이럴 때일수록 직계 혈통이 아닌 저 같은 가신이 나서야지 승리가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알겠다! 역시 네가 있으니 참으로 든든하구나.”

“과찬이십니다, 백작님.”

만일의 경우엔 반도 있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후작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겠군.’

회의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볼일을 마친 헨리는 더 이상 저택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백작님. 그럼 저는 이만 외부에 볼일이 있어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혹시라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당하게 내 이름을 밝히도록 하라. 자네는 이제 든든한 나의 가신이니까.”

“감사합니다, 백작님.”

든든한 우군이 된 원수.

헨리는 그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모몬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헨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텔레포트를 이용하여 모몬트로 이동했다.

‘여기가 모몬트인가?’

거의 산속에 있다시피 한 모몬트 마을.

사실 오베르에게 듣기 전까지 헨리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화전민들이 모여 산다고 했지?’

마을이라기보단 거의 부락에 가까운 규모였다.

헨리는 지나가는 마을 사람에게 한센 영감이 사는 곳을 물어 어렵지 않게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모몬트 마을의 가장 높은 곳.

한센 영감의 집이 위치한 곳이었다.

헨리는 조그마한 초가집 입구에 앉아 있는 늙수그레한 노인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저놈인가 보군.’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등이 굽은 것이 척 보기에도 팔순 노인네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껍데기에 감춰진 진짜 알맹이는 마탑의 자부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금체.

헨리가 영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한센.”

“…….”

“한센?”

“…….”

늙수그레한 모습의 한센 영감은 초가집 입구에 마련된 조그마한 나무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귀가 어두운 노인이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신이 연금체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귀머거리 노인을 연기하는 것.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센 영감, 소금물을 좀 먹고 싶은데?”

“소……금……물……?”

오베르가 알려 준 명령어였다.

헨리가 명령어를 외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센 영감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졌다.

“들어……오십시오…….”

명령어가 입력되자 곧바로 예를 갖추는 한센 영감.

헨리는 느릿하게 말을 잇는 한센 영감을 보고 제법 늙은이 흉내를 잘 구현해 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센 영감이 집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거의 90도 가까이 굽어져 있던 등이 갑작스럽게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래.”

위장용 연기는 이것으로 끝인 모양이었다.

한센 영감은 이윽고 손바닥만 한 초가집의 방바닥을 두들기더니 이내 곧 바닥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 문을 끄집어냈다.

덜덜덜덜.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개방되었고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라이트.”

파앗!

어두컴컴한 지하.

헨리는 먼저 광명의 구체를 지하 창고 속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번쩍!

“오…….”

어두컴컴했던 지하 창고에 광명이 드리우자 광명에 반사된 황금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많이도 모아 놨군.’

오베르가 말했던 대로였다.

지하 창고에 쌓인 그의 은닉 재산들은 웬만한 귀족들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러나 돈이라면 헨리도 만만찮게 소유하고 있었다.

지하 창고를 둘러보던 헨리는 금은보화 이외엔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알자마자 클레버를 소환해 보물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클레버.”

-예, 주인님.

“하나도 남기지 말고 싹 다 챙겨.”

-예, 주인님!

휘오오오!

구경하는 이가 없으니 마음 놓고 체스트를 개방시켜도 됐다.

헨리의 명령에, 클레버는 곧 거대한 크기의 체스트를 허공에 개방시켜 허리케인처럼 방 안의 보물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보물들이 흡수되는 과정에서 서로 몸이 부딪히며 금속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수거 작업은 금방 끝났다.

헨리는 텅 비어 버린 창고를 한 번 더 둘러본 뒤 천천히 창고를 벗어나려고 했다.

-뀨!

“음?”

그런데 그때였다.

사물로 변환시켜 두었던 엘라곤이 갑작스레 진동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뀨우우우!

“뭐야?”

좀처럼 얌전하던 녀석이 갑작스레 발버둥을 치자 차고 있던 팔찌 또한 강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얌전하던 놈이 왜 이래?’

어차피 보는 눈도 없겠다, 헨리는 마음 편히 엘라곤을 소환했다.

-뀨!

청록빛을 뽐내며 모습을 드러내는 엘라곤.

엘라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헨리가 아닌 지하 창고 한구석으로 달려가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헨리는 그런 엘라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하 창고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특수 처리가 된 합판.

하지만 엘라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바닥을 파헤쳤고 결국 합판을 뚫어 버리고 흙바닥을 파헤치는 기염을 토해 냈다.

그리고 파헤치기를 끝마친 엘라곤은 곧 구멍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뀽!

엘라곤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의 입에는 무언가가 물려 있었다.

“……어?”

그것은 다름 아닌 정령의 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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