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준비된 역전극 (5)
찰박.
“으음…….”
오베르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의해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부서질듯이 아팠다.
태어나서 이만큼의 매질을 맞아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오베르는 특별히 모든 가족들의 순서가 끝나고 제일 마지막 순서에 가장 오랫동안 매질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오베르는 그 과정에서 네 번이나 기절하고 열두 군데의 골절상을 입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매질을 견디게 하기 위해 신전에서 판매하는 힐링 포션을 몇 병이나 강제로 들이켜야만 했다.
정신을 차린 오베르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독방에 갇힌 듯 주위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어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도 없을 거라 여겼던 방 안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건네 왔다.
오베르는 황급히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자그마한 철창과 함께 어둠 속에 얼굴이 가려진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냐!”
육체에 쌓인 고통만큼, 오베르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러나 예민하기 짝이 없는 오베르에 비해 남자는 한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간수.”
“간수라고……?”
“독방에 갇힌 너를 감시하고 있으니 간수가 아니면 뭐겠나?”
“네, 네놈도 역적의 가족이더냐?”
“아니, 나는 말 그대로 간수다, 제국에서 파견한.”
“제국에서 파견됐다고?”
“그래.”
제국에서 파견됐다는 말에 오베르는 순간, 머릿속에 한 줄기의 희망이 스쳤다.
“이, 이봐! 자네가 공무원이라면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분명히 자네도 흥미로워할 만한 그런 제안일 거야.”
“제안?”
“편지 한 통만. 아, 아니! 편지 두 통만 외부에 있는 이에게 전해 줘.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내 숨겨진 재산 전부를 자네에게 주겠네.”
오베르는 이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 저 간수를 매수하지 못한다면 이 출구 없는 지옥에 갇혀 평생 동안 추위 속에 썩어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재산이라고?”
“그래! 그 돈이면 웬만한 귀족들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 만한 액수라고 내 장담하지. 못 믿겠으면 숨겨 놓은 돈부터 확인해 봐도 좋네!”
오베르의 제안에 남자는 얼마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오베르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좋다. 하지만 돈부터 먼저 확인하고 편지를 전해 주도록 하지.”
“현명한 선택이야. 돈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일단은 먼저 종이와 펜부터 좀 줄 수 있겠나?”
“그러지.”
종이와 펜을 넘겨받은 오베르는 냉기가 가득한 독방 바닥에서 꾸득꾸득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반드시, 반드시 이곳에서 나가 아이젠 그놈에게 복수하리라……!’
어떤 자세를 취해도 아플 만큼 온몸이 피멍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방 안이 어두워 글씨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베르는 이곳에 나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편지를 완성하였다.
이윽고 편지가 완성되자 오베르는 두 장의 편지를 남자에게 내밀며 말했다.
“하나는 아서스 공작, 하나는 알프레드 후작에게 전해 주게.”
“알겠다. 그럼 이제 돈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좋다. 내가 가진 영지 중에 ‘모몬트’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의 ‘한센 영감’에게 내 재산을 비밀리에 맡겨 두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가서 한센 영감에게 알은체를 하면 돈이 있다는 걸 보여 줄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
“뭐?”
“이미 너의 몰락 소식은 제국 전체에 퍼졌다. 그런 상황에서 영감이 고분고분하게 너의 숨겨진 재산을 돌려준다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한센 영감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니?”
“한센 영감은 오래전에 마탑에 의뢰하여 만든 연금체의 일종. 그러니 나를 배신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다.”
“그럼 녀석이 연금체라면 명령어가 필요하겠군.”
“명령어는 두 사람의 답장을 가지고 오면 알려 주도록 하겠다.”
“그건 곤란하지. 역적의 편지를 잘못 전해 줬다가 모함이라도 받으면 네놈이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알겠다.”
간수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지금으로썬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재 오베르에게 있어 간수는 유일한 희망이자 기회인 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오베르가 말을 이어 나갔다.
“한센 영감에게 ‘소금물이 먹고 싶다’라고 하면 알아서 보물을 내줄 것이다.”
“좋다. 편지는 우선 보물부터 챙긴 다음에 전해 주도록 하지.”
거래를 마친 남자는 오베르의 편지를 넘겨받은 뒤 독방을 나섰다.
독방을 나서자 익숙한 미남자가 간수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됐어?”
“예상대로입니다. 바로 매수를 시도하더군요.”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잡혀 들어왔으면서도 머리 굴리는 건 여전하군그래.”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는 거겠죠. 아무튼, 놈을 죽이지 않고 따로 가두어 둔 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철창 너머에서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추고 있던 간수는 다름 아닌 헨리였다.
크림슨 가문 전체가 살게라로 이송될 무렵, 헨리 또한 미리 소식을 접하고 살게라에 먼저 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든 건 뭐야?”
“편지입니다. 아서스와 알프레드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고발령에서 도움도 못 받았다더니, 설마 아직도 한패라고 생각하는 건가?”
“비장의 수라도 감추어 뒀나 보죠, 뭐. 그래도 나름 별명이 책략의 오베르였던 사내입니다.”
“책략은 개뿔, 머리 좀 굴릴 줄 안다는 놈이 아이젠 따위한테 먹혀?”
미남자는 반이었다.
반 또한 크림슨가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었기에 헨리와 함께 살게라로 넘어온 것이다.
“다른 놈들은 좀 어때요?”
“전부 다 지하 감옥에 가둬 놨어.”
“한 방에요?”
“응. 네가 시킨 대로 남녀노소 상관없이 전부 다 한 방에. 근데 왜 굳이 한 방에 가둬 놓은 거냐?”
“그렇게 해야 자기들끼리 생각이 좀 맞춰지죠.”
“생각이 맞춰지다니?”
“저들은 모두 오베르의 실수 때문에 귀족에서 역적이 된 자들입니다. 게다가 고통받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원망의 대상이 필요한 법인데, 오베르만 따로 동떨어져 있다면 당연히 화살이 오베르에게로 향하겠죠.”
“잔인한 놈. 오베르를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시키겠다?”
“저희들이 받았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며칠 동안 방치해 두면서 오베르에 대한 잘못을 되새겨 주면, 오베르는 저희들의 손이 아니라 가족들의 손에 맞아 죽게 될 겁니다.”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의 정점에 가까운 집안일수록 화목함보다는 서열에 의해 친목이 나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서열이 뭉개진 집안을 이용하여 오베르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파괴시킬 생각이었다.
“오러 유저들은요?”
“전부 맥을 끊어 놨어. 앞으로 오러는커녕 물건 집기도 힘들 거다.”
더불어 크림슨가 대부분이 머리만 똑똑한 수재 집안이긴 하나 간혹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이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들은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모조리 맥을 끊어 놓았다.
“아이젠이 살게라를 담당하게 됐고 그 살게라의 관리를 제가 맡게 되었으니, 이제 살게라는 철저하게 우리들의 땅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놓고 하고 싶은 것들 하세요.”
“당연히 그래야지. 그나저나 넌 역시 대단한 놈이야. 어떻게 살게라를 감옥으로 이용할 생각을 다 할 수 있지?”
“저도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다. 그럼 이제 편지부터 한번 확인해 볼까요?”
이윽고 두 사람은 오베르가 건넨 2개의 편지 중 알프레드의 것부터 확인해 보았다.
“……이게 전부라고?”
“그런 것 같은데요?”
절박한 상황이니만큼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종이 가득히 담아 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알프레드, 나를 살게라에서 꺼내 준다면 오래전부터 탐내던 나의 그것을 너에게 주도록 하겠다.
“오래전부터 탐내던 것?”
과연 오베르였다.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평생 살게라에서 썩어야 할지도 몰랐는데 녀석은 몇 마디의 문장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마쳤기 때문이다.
“배짱부리는 거야, 뭐야? 그나저나 그건 또 뭐고?”
“아무래도 알프레드가 오베르에게 탐내던 것이 있던 모양입니다.”
“삼대가문씩이나 되는 놈들이 못 구해서 안달인 물건이 있다고?”
“아마도 물질적인 건 아닐 것 같습니다. 돈으로 구할 수 있다면 진즉에 구했겠지요.”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다음은 아서스의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지금 당장 문제를 풀어낼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이어서 아서스 공작의 것을 한번 확인해 보았다.
-공작님, 저를 이곳에서 꺼내 주신다면 저번에 공작님께서 제안하신 계획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한 번 공작님의 충실한 개가 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음…… 그래도 이번 편지에서는 좀 절실함이 느껴지네요.”
“망할 놈들이……! 자기들끼리만 아는 말들로 적어 놓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라고?”
알쏭달쏭한 글귀에 반이 덜컥 화를 냈다.
이에 헨리는 턱을 매만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후작들이 공작의 손발이라는 것은 어차피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오베르가 아서스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보류한 적이 있다는 건 그만큼 그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오베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얘긴데…….’
헨리는 알프레드의 것보다 아서스의 것에 더 큰 흥미가 생겼다.
‘알프레드는 그렇다 쳐도 아서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조사해 봐야겠어.’
내용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가짜 답장 같은 걸 만들어 오베르를 떠볼 순 없었다.
게다가 그 똑똑한 오베르가 거절할 만한 제안이라면 분명히 국익에 도움이 되는 그런 종류의 제안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손쉽게 제거할 수도 있겠어.’
헨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삼대가문의 멸문과 현 황제의 죽음.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황제’와 같은 유용한 장기짝은 최대한 오랫동안 이용해야만 했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헨리가 말했다.
“이 건에 대해선 좀 더 머리를 굴려 보도록 하죠. 그럼 우선은 대가로 받게 된 오베르의 숨겨진 재산부터 찾으러 가 볼까요?”
“얼마나 주기로 했는데?”
“글쎄요? 정확한 액수는 못 들었지만 웬만한 귀족 놈들 재산보다는 많이 준다고 했으니 꽤 넉넉하지 않을까요?”
“삼대가문씩이나 되는 놈이 재산 같은 건 대체 왜 숨겨 놓는 거야?”
“뒤가 구리니까 그렇겠죠. 그리고 고관직 인물들은 주기적으로 재산 검증을 받지 않습니까?”
“그랬던가? 난 워낙에 없이 살아서 말이지.”
“뭐, 어찌 됐든 덕분에 단물은 우리가 빨아먹게 생겼지만요.”
“위험한 곳이야?”
“아뇨, 오베르의 영지 중에 모몬트라는 작은 마을이 있답니다. 거기에 재산을 은닉해 뒀다고 하니 혼자서 빠르게 갔다 오도록 하겠습니다.”
“저놈들은 어떡할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대신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과 꾸준한 치료, 그리고 주기적인 매질과 정신 파괴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놈들한테 받은 만큼만 돌려줄 테니까.”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헨리는 반에게 이들의 처분을 맡긴 뒤 천천히 살게라를 벗어났다.
모몬트에 들르기 전에 먼저 얼굴을 내비쳐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