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준비된 역전극 (4)
하늘은 여느 때와 같이 푸르렀다.
하지만 하늘 아래에 펼쳐진 빈센트 지방은 오베르에게 있어 살아 있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끝이구나…….’
두 번째 고발령에서 아이젠에게 패한 직후, 어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오베르는 하루아침에 역적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마에 찍힌 선명한 역적의 낙인.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개국공신 파의 식솔들에게 찍었던 낙인이었는데 그 낙인을 자신의 이마에 새기게 될 줄은 몰랐다.
“흐흐흑, 흐흑…….”
자신의 뒤를 따라 걷는 크림슨가의 여식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울음소리가 모여 앞서 나가는 자신의 등짝에 비수를 꽂는 것만 같았다.
괴로웠다.
원수였던 개국공신 세력의 씨앗을 완전히 말리려 했던 것뿐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하물며 아서스 공작과 알프레드 후작은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아이젠을 향한 뜨거운 분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그런 놈한테 감히…….’
허울만 좋은 멍청이라고 중앙귀족 시절 때부터 무시해 왔던 아이젠이었다. 그런 아이젠의 농간에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오베르는 다시 한 번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살게라로 호송 중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명이 떨어진 직후, 빈센트 지방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오베르는 황궁의 지하 감옥에 쭉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식솔들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주요 부서마다 각자 한자리씩 꿰차고 있던 그들은 가주에 의해 한순간에 역적이 되어 버렸고, 연유도 모른 채 살게라로 추방당해야만 했다.
영지민들이 나와 동물들을 구경하듯 자신과 식솔들을 구경했다.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치욕스럽고 부아가 치밀었음에도 이젠 정말로 오베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베르 크림슨 후작은 어명이 떨어진 그 순간부터, 크림슨 후작이 아닌 그냥 ‘오베르’가 되어 버렸으니까.
* * *
며칠에 걸쳐 이동한 끝에 오베르와 식솔들은 드디어 살게라의 입구인 슬란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베르는 자신이 없애려고 했던 슬란 협곡의 검문소장, 번트와 마주할 수 있었다.
죄인들을 호송해 온 호송대장 랄트가 번트에게 경례하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눈엔 내가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냐?”
“죄송합니다.”
“흐흐, 죄송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이번에 데리고 온 놈들, 정말로 소문의 그놈들이 맞아?”
“그렇습니다. 전직 대가문주, 오베르 크림슨 후작과 그의 식솔들입니다.”
호송대장 랄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선두에 서 있던 오베르의 수갑을 잡아 이끌어 번트 앞에 내던졌다.
“크윽!”
최소한의 식량으로 며칠 동안 강행군을 거친 탓에 발바닥엔 물집이 가득했고 발목에는 새파란 멍들로 빼곡했다.
그러나 랄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번트는 그런 오베르를 보며 차갑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말이 정말이었을 줄이야…….”
며칠 전, 여느 때와 같이 한가로이 술을 마시고 있던 번트는 물자 공급을 위해 방문한 헤글러에게 뜻밖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삼대가문 중 하나인 크림슨 가문이 역적 집안이 되어 살게라로 추방되어 오고 있다는 것.
믿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번트는 헤글러가 전해 준 헨리의 친필 편지를 받았음에도 좀처럼 현실을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오베르의 몰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콧대 높던 오베르가 바닥에 처박혀 있는 꼴을 보니 번트는 그제야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란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차갑게 미소 짓던 번트가 무릎을 굽혀 오베르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오베르의 눈빛은 여전히 독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과연, 전직 대가문주 오베르였다.
하지만 오베르의 서슬 퍼런 독기를 본 번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꼴에 사자 새끼 흉내를 내는 건가? 그 건방진 눈빛,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빠악!
충고를 끝으로 번트는 있는 힘껏 오베르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크크크, 저놈 얼굴에 주먹 한 방 먹일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날아가는 기분이구먼그래!”
상쾌했다. 그리고 통쾌했다.
번트는 자신의 주먹에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오베르를 보며 그제야 목젖이 드러나도록 괄괄하게 웃어 보였다.
“네놈과는 시간을 두고 좀 더 즐기고 싶지만 나보다 네놈을 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야. 통과!”
번트는 의미심장한 인사말과 함께 추방민들을 통과시켰다.
휘오오오!
임무를 마친 랄트와 호송대는 이제 그만 수도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추방촌까지 안내를 맡은 검문소의 병사는 묵묵히 선두에 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눈발은 어느새 굵직한 함박눈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굵직한 함박눈은 설산의 칼바람과 뒤섞여 금방이라도 자신들을 파묻을 것 같은 눈보라로 변해 버렸다.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든 상황 속에서 설피를 신은 병사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추방촌에 도착한 순간, 병사가 말했다.
“안내는 여기까지다. 그럼.”
“뭐, 뭐라고?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추방촌이라면서? 이봐! 이봐아!”
거대한 철 기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
그런 곳을 추방촌이라고 소개한 병사는 오베르의 거친 항의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게 무슨…….”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좋지 못한 날이었다. 게다가 옷가지도 마땅히 챙겨 오지 못하여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처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살게라의 차디찬 바람 소리는 어느덧 자신들을 잡아먹으려는 맹수의 얼음처럼 끊임없이 눈보라를 뱉어 냈다.
“이렇게 끝나다니…….”
절대 권력가였던 자신이 눈 속에서 얼어 죽는다는 비참한 말로.
과연 이보다 더욱 비참한 최후가 있을까?
오베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 속에 무릎을 꿇자, 함께 온 식솔들도 절망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대로 끝은 무슨.”
사람의 목소리.
병사는 이미 돌아갔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오베르는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사람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위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오베르는 목소리가 알려 주는 대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사람 한 명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사, 사람……!”
“예? 사람이라뇨? 그게 무슨……?”
모두가 오베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오베르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에는 눈보라만이 쏟아질 뿐, 아무것도 없었다.
휘오오오!
다시 한 번 몰아치는 강풍.
쏟아지는 눈보라에 고개를 들었던 이들 모두가 다시금 고개를 내리고 몸을 움츠렸다.
“멍청한 놈.”
그러나 오베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점점 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형상을.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보일 때쯤, 오베르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촤아아악!
“어푸, 푸! 푸흡!”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오베르와 가족들이 황급히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곳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이 아니었다. 눈 한 송이 내리지 않고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어느 정체 모를 방 안이었다.
“……여긴?”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얼굴이 어두컴컴하여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젖은 양동이가 들려 있었으며 정신을 차린 직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자신들에게 쏟아진 물은 분명한 ‘온수’였다.
‘온수?’
얼어 죽을 것만 같은 추위 속에 있다가 온수를 끼얹으니 잠깐이나마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분명히 기분 나빠야 할 물벼락이 따뜻하게 느껴지자, 기분 나쁘기는커녕 한 번 더 온수를 끼얹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물벼락만 맞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오베르의 아들들 중 장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밧줄?’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손과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온수로 잠시나마 풀렸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대, 대체 누구십니까?”
장남이 질문하는 동안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이 황급히 식솔들의 머릿수를 확인했다.
머리가 똑똑한 집안이니만큼 상황 판단이 빨랐던 것이다.
다행히 빠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하나의 인영 뒤에서 또 다른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물을 부은 사람이 말했다.
“부어.”
촤아악!
명령 한마디에 또다시 온수 세례가 이어졌다.
몇 차례 더 쏟아지는 물벼락들.
몸이 데워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불안감은 곱절로 상승하는 듯했다.
결국 불안감에 몸서리치던 차남이 오베르처럼 쇳소리를 토해 내며 말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우리한테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차남은 장남과는 달리 우악스러운 성격을 지닌 사내였다.
차남이 짜증과 함께 날카롭게 소리치자 첫 번째 인영이 그제야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내 이름은 토리안이다.”
“토리안……?”
“당연히 들어 본 적 없겠지.”
“저, 정체를 밝혀라! 우리가 감히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뭐라고? 푸하하하!”
몰락한 귀족의 배짱에, 토리안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 전체가 허를 젖히며 크게 웃어 보였다.
“멍청한 놈들, 자기들이 아직도 과거의 신분인 줄 알고 있다니……. 가엾기도 해라.”
“뭐, 뭐라고?”
“우리들 중 일부도 과거에는 그랬지. 지금은 죽어서 더 이상 못 보지만 말이야, 그것도 바로 네놈들 손에.”
“그, 그게 무슨! 우리가 죽였다니!”
“부모의 죄는 곧 자식이 짊어지는 법. 우리는 1년 전에 오베르가 쫓아낸 추방민들이다.”
“추방민이라면…… 설마!”
“이제야 기억나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우리는 네놈들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다. 네놈들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네놈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 줄 생각이거든. 그럼 저놈부터 시작하지.”
딱!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어두컴컴했던 방 안이 밝아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년 전에 역적의 누명을 쓰고 살게라로 쫓겨난, 개국공신들의 살아남은 가족들이었다.
빡!
식솔들은 미리 준비한 박달나무 몽둥이로 오베르의 차남부터 실컷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급소는 피하고 뼈가 부러지지 않게,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을 줄 수 있게끔, 토리안 일행은 있는 힘껏 오베르의 차남을 두들겨 팼다.
“커, 커허억…….”
모진 매질 끝에 차남이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토리안이 말했다.
“깨워.”
촤아악!
기절한 차남에게 쏟아지는 냉수.
그 덕분에 차남은 다시금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린 차남에게 토리안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멋대로 기절하면 곤란하지. 아직 한참이나 멀었는데 말이야. 포션 줘 봐.”
이어서 토리안은 차남의 입에 신전의 힐링 포션을 들이부었다.
강제로 삼켜지는 회복 약.
힐링 포션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피멍으로 가득했던 차남의 몸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시 쳐.”
눈보라 속에서 편안히 얼어 죽기엔 그들의 가장이 저지른 죄악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래서 살아남은 식솔들은 온수와 포션을 이용하여 최대한 원수들의 숨을 붙여 놓았다.
“커허어억!”
차남의 두 번째 기절.
이에 토리안이 말했다.
“다음.”
수십 명에 달하는 크림슨가 전체에 행해지는 매질.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인척까지 모두 잃은 식솔들의 매질은 팔이 저리고 몽둥이가 부서질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순서인 오베르에 다다랐으나, 그는 험한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두 번이나 기절하고 말았다.
이에 토리안이 다시 한 번 찬물을 들이부어 오베르의 의식을 일깨우며 말했다.
“네놈은 특히 더 각오해야 할 거다, 이 개자식아.”
그들은 더 이상 연약한 추방민이 아니었다.
오베르가 살게라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들은 하얀 지옥이라 불리는 살게라의 악마가 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