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67화 (67/522)
  • # 67

    아이젠 백작 (1)

    마차는 그냥 이곳에 두기로 했다.

    어차피 헨리가 직접 오가기로 한 이상 마차는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떠날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말을 출발시키기 직전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음?”

    마치 좀비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눈밭에 던져두었던 페인트 상단 직원들이 눈 속에 반쯤 파묻혀 얼어 죽어 가고 있었다.

    “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헤글러, 가서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외투도 없이 몇 시간이나 바깥에 방치해 두었으니, 이 정도면 피떡이 된 문케와 어느 정도 공평해진 셈이었다.

    모든 건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다.

    헨리는 동상에 걸려 빌빌대는 직원들을 보았지만 조금도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들 뛰어라.”

    “이랴!”

    헨리는 말 뒤편에 직원들을 주렁주렁 매단 뒤 검문소까지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검문소에 도착한 헨리는 번트와 함께 미루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다시금 나누기 시작했다.

    “생각은 좀 해 보셨습니까?”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번트가 헨리의 제안을 따를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택권을 내준 이유는, 번트 스스로가 복수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번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제 마음은 헨리 경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헨리 경.”

    “예?”

    “이왕 이렇게 된 거, 헨리 경께서 저 대신 직접 아이젠 백작에게 저놈들을 인계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대신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인계해도 되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수도에 보조 인력을 요청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말입니다.”

    아이젠 백작.

    지금은 비록 오베르 후작을 물 먹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지만, 사실 한때는 그놈 또한 오베르 후작과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앙귀족 놈들 중 한 명이었다.

    ‘음…… 간만에 그놈 낯짝을 봐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어차피 언젠간 목을 칠 놈들 중의 하나이긴 했다.

    그래서 헨리는 기꺼이 제안을 승낙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공무가 바쁘신 분이신데 당연히 제가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번 일을 밀리언 용병단에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한 보수 또한 마땅히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보수는 필요 없습니다. 대신 제 부탁을 두 가지만 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탁요?”

    “예,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그 정도야 뭐 얼마든지 들어드려야죠. 말씀만 하십시오.”

    번트에게는 아직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까지 받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헨리는 대신에 다른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언제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나중에 소장님의 힘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때가 되면 딱 한 번만 저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수문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번트라면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셀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부탁이었다.

    이에 번트는 헨리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하하하,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반드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부탁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부탁도 비교적 간단한 것입니다. 소장님, 혹시라도 추방민들의 머릿수를 헤아리기 위해 추방촌에 가시게 되면, 그곳에서 목격하신 것들을 묵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추방촌에 말입니까?”

    “제가 그곳 사람들과 인연이 조금 있어 의식주에 편의를 좀 주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번트에겐 일부러 자신이 헨리의 제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물론 헤글러를 포함한 추방민들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해 두었으니, 그 사실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번트는 곧 자신의 서명과 인장이 찍힌 ‘포로 인계 대리 위임서’라는 거창한 추천서를 발급해 주었다.

    “그럼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대답과 함께 헨리는 마차 한 대에 도적단 시체와 페인트 상단 사람들을 한꺼번에 욱여넣었다.

    “가자, 헤글러.”

    “예.”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였다.

    * * *

    며칠이 지났다.

    살게라에서 멀어질수록 외투는 점점 더 필요 없는 물건이 되어 갔다.

    특히 아이젠 백작의 저택이 있는 ‘쇼난’ 지방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곳인 데다가 사시사철 따뜻한 공기가 돌았기 때문에 추위 걱정은 더더욱 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아이젠 쇼난.

    대대로 능력 있는 무장들을 배출해 낸 전형적인 무골 집안 출신으로, 쇼난가는 통일 전쟁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대가문으로 인정받은 집안이었다.

    하지만 집안사람 대부분이 무골이라 그런 것일까.

    아이젠은 가진 힘에 비해 머리가 멍청하여, 현재는 후작이 된 과거의 두 백작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길게 이어져, 결국 전쟁 당시에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후작으로 진급하지 못했다.

    ‘아이젠 그놈, 여전히 멍청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헨리가 아이젠을 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삼대가문이 되지 못한 아이젠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두 후작들과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함은 불안감이 되고 불안감은 곧 열등감을 낳는다. 그렇게 탄생한 열등감은 판단력까지 흐려지게 만드는데, 헨리는 아이젠의 흐려진 판단력과 열등감을 이용할 속셈이었다.

    “신분 패를 제시해 주십시오.”

    성의 입구에 도착하자 아이젠의 사병이자 쇼난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병이 헨리에게 신분 패를 요구했다.

    아이젠의 사병들은 유난히 덩치가 컸다.

    항상 남자다움을 추구하는 아이젠인지라 그의 사병이 되기 위해선 보통 체격으론 감히 문턱조차 밟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과!”

    헨리의 신분 패를 확인한 병사들이 입성을 허락했다.

    확실히 체격은 좋았다. 하지만 뇌까지 근육인 놈들을 뽑은 건지, 헨리의 별 3개짜리 신분 패를 보고도 병사들은 경례는커녕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쯧쯧, 기르는 개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헨리는 존경을 모르는 사병들의 건방짐에 작게 혀를 차 보였다.

    곧이어 헨리는 영지 중앙에 위치한 아이젠 백작가의 대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의 외관은 웅장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게다가 산을 등지고 앞에는 강이 흐르는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를 잡은 걸 보니, 아무리 찬밥 신세가 되었어도 아이젠은 아이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긴장하지 마.”

    “예, 옙!”

    헨리는 잔뜩 얼어 있는 헤글러를 넌지시 독려해 주었다.

    하지만 헤글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족을 후려 패고 도망친 신분이었기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저택의 입구에 들어서자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이 헨리를 막아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아이젠 백작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신분 패를 보여라.”

    헨리는 신분 패와 함께 B급 용병 패를 내밀어 보였다.

    “준남작? 장교? 용병? 이건 또 무슨 놈의 잡종 나부랭이야?”

    이놈은 좀 전의 경비병보다 더한 놈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먼저 점잖은 말투로 자비를 베풀었다.

    “말조심해라.”

    “뭐라고?”

    “네가 백작가의 대문을 지킨다고 해서 백작은 아니잖아.”

    “이 건방진 새끼가!”

    휘웅!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화를 참지 못한 병사는 급기야 쥐고 있던 창을 거꾸로 들어 몽둥이 휘두르듯이 휘둘렀다.

    그러나.

    서걱!

    헨리는 강철로 만들어진 병사의 창 자루를 단칼에 베어 냈다.

    그런 다음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병사의 갑옷을 베어 냈다.

    절걱!

    두껍게 덧대어진 체인 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의 갑옷은 가죽이 잘리듯이 깨끗하게 갈라졌다.

    상처는 없었다. 그만큼 헨리의 검술은 세밀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병사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헨리는 그런 병사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놈한테 경비를 맡기다니…… 밥이 아까운 개일세.”

    “뭐, 뭐라고? 너, 너 이 새끼가! 네가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쯧쯧, 개보다 멍청한 놈이었군.”

    “뭣들 하고 있어! 죽여 버려!”

    병사 한 명이 모욕을 당하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사병들이 벌 떼처럼 튀어나왔다.

    헨리는 무리 지어 달려오는 병사들을 보며 가만히 혀를 찼다.

    ‘꼭 맞아야 말을 듣지.’

    사람 말을 듣지 않는 개한테는 자고로 매가 약인 법이었다.

    저택의 입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구경꾼들이 점점 더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들 자연스럽게 헨리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쯧쯧, 누군진 모르겠지만 불쌍하게 됐구먼.”

    “까불 상대가 없어서 백작님의 사병들한테 까불다니…….”

    “젊은 친구 같은데, 최소한 앞으로 두 발로 걸어 다니지는 못하겠군.”

    백작의 사병들은 영지 내에서도 제법 난폭하기로 유명한 놈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헨리의 일방적인 참패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구경꾼들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밀리지…… 않는다고?”

    “아냐, 자세히 좀 봐.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압도하고 있는데?”

    “지금 설마 갑옷만 깔끔하게 베어 낸 거야?”

    묘기에 가까운 동작들이었다.

    헨리는 여전히 생채기 하나 만들지 않고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병사의 목덜미에 발 차기를 꽂아 넣었을 때였다.

    “커헉!”

    털썩.

    잘린 갑옷과 창 자루들이 사방에 즐비하고 피떡이 된 병사들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헨리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에 난투극을 구경하던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짝짝짝짝!

    “우와,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이야…… 아까 얼핏 듣기로는 용병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저게 그 말로만 듣던 S급 용병인가?”

    “아닙니다, 저희 밀리언 용병단은 아직 B등급 용병단입니다. 혹시라도 의뢰하실 일이 생긴다면 저희 밀리언 용병단을 찾아 주십시오.”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 있던 헤글러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홍보에 나섰다.

    헨리는 옆에서 사병 수십 명을 해치우고 손바닥을 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슈우우욱! 콰직!

    “음?”

    그 순간, 오러가 실린 창이 화살처럼 날아와 헨리가 있던 자리에 꽂혔다.

    물론 헨리는 그것을 가볍게 피해 냈다.

    “베디칸 경비단장이다!”

    ‘경비단장?’

    베디칸이라는 사내가 나타나자 구경꾼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베디칸은 거대한 덩치의 남자였다.

    전신에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것도 모자라 등짝에 창 몇 자루를 화살처럼 짊어지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웬 놈이냐?”

    쇠구슬처럼 무거운 목소리에 위압적인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헨리는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여기 책임자 되십니까?”

    “그렇다면?”

    “백작님을 만나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백작님은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정중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베디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수십에 달하는 자신의 부하들이 구경꾼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제가 만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번트의 추천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신분 검사를 받은 다음 추천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였으나, 병사의 말투가 워낙에 건방진 나머지 추천서의 존재를 잠시간 유보시킨 것이었다.

    헨리가 내민 추천서를 낚아챈 베디칸이 추천서에 찍힌 인장을 확인했다.

    확실한 제국군의 인장이었다.

    베디칸은 미꾸라지처럼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헨리를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히……!”

    “잠깐. 그쪽도 덤비겠다면 굳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후회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뭐라고?”

    “그 편지, 꽤 중요한 편지입니다. 그러니 기 싸움은 이쯤 하고 그만 보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척 봐도 강해 보이는데 굳이 기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경비단장쯤 되는 책임자라면 사리 분별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헨리는 이쯤에서 쓸데없는 분쟁을 멈추기로 했다.

    게다가 헨리의 말마따나 이 편지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헨리 또한 귀하게 대접해야만 했다.

    ‘미꾸라지 같은 놈……!’

    베디칸은 몹시 분했지만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곳의 경비를 책임지는 경비단장이었으니까.

    “크……! 알겠다.”

    “역시 책임자는 다르네요.”

    베디칸의 인내에, 헨리는 드디어 아이젠의 저택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