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엘라곤 (3)
히람은 가까스로 제국 주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히람의 소속을 알아보자마자 곧바로 사제와 마법사를 동원해 치유에 나섰다.
하지만 히람은 치료보다 텔레포트가 훨씬 더 급했다.
“텔레포트, 얼른 텔레포트부터 준비해!”
“하, 하지만 잘린 어깨의 상처가 너무 심하신데……!”
“상관없으니까 빨리!”
한시라도 빨리 계획이 틀어졌음을 살모라에게 알려야만 했다.
잘린 팔을 치료하는 동안 극심한 고통에 혼절할 뻔하였지만 히람의 과잉된 충성심이 그에게 불굴의 의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윽고 응급처치가 끝나고 그의 바람대로 텔레포트가 준비되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웅!
혼자서, 그것도 즉석에서 시전하는 텔레포트는 꽤나 어려운 마법에 속한다.
하지만 준비된 마법진과 충분한 수의 마법사들만 있다면 텔레포트는 비교적 편리한 교통수단이 된다.
파밧!
마법진에 좌표를 입력하자 이동은 금방 이루어질 수 있었다.
* * *
히람은 텔레포트의 여파로 속이 메슥거리고 환부가 욱신거렸지만 서둘러 살모라부터 만나기를 요청했다.
“단장님, 5부대장 히람이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말끔하게 뒤로 넘긴 살모라의 연보랏빛 머리색은 마치 물에 희석시킨 맹독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연상되는 맹독만큼이나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는, 히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전신에 땀을 뻘뻘 흘리는 히람이 단장실에 도착했다.
척.
급박하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히람은 경례를 취했다.
물론 오른팔이 잘렸기에 왼손으로 경례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히람의 어깨를 본 살모라의 눈이 살모사처럼 가늘게 좁혀졌다.
“충성! 단장님을 뵙습니다.”
“……실패했나 보군.”
“죄, 죄송합니다. 임무를 실패한 것에 대한 책임은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히람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정돈된 모습을 보였다.
살모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바쁜 척하며 허둥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살모라가 보던 책을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집어치우고 설명이나 해.”
“그게 실은…….”
히람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보고에 주관적인 의견은 없었다.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들로만 채워진 보고에는 부족한 히람의 실력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오러가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너와 비등하게 검을 겨루었다?”
“그렇습니다.”
“흐음.”
히람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단 부대이긴 했지만 자신의 휘하에 둔 것이었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러도 없는 놈이 대체 어떻게?’
놈에 대한 정보가 한없이 부족했다.
더불어 히람의 정체가 탄로 났다면 일을 맡긴 문케 또한 같은 처지가 됐을 터.
‘처리해야겠지.’
추방민들에게 내려진 보급품은 비록 보잘것없는 것들이긴 해도 엄연히 예산이 책정된 ‘황명’이자 ‘정책’의 일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번 일을 계기로 그동안 황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오베르 후작이나 자신 또한 책임을 피해 갈 수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내 명예도 말이 아니겠지.’
사실, 책임쯤이야 삼대가문 측에서 알아서 무마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에서 가장 으뜸가는 황궁 기사단이 도적질이나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다른 놈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비웃음을 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는 절대 안 되지.’
그리고 살모라는 자존심이 뭉개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살게라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흔적도 없이 치워 버리기로 했다.
판단을 마친 살모라가 비서관에게 말했다.
“3부대장 불러.”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설픈 소드 마스터가 아닌 ‘진짜 실력자’인 3부대장에게 일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진 직후, 가만히 살모라의 눈치를 보던 히람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 단장님.”
“뭐지?”
“저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쟁이 종식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궁 기사단을 포함한 각종 국방력을 키우는 이유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더 이상 검을 잡지 못하는 칼잡이는 제국군 입장에선 쓸모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살모라가 차갑게 말했다.
“팔도 그렇게 됐으면서…… 계속 제국군에 남아 있겠다고?”
“그, 그게…….”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
그런데 보기 드물게도 갑자기 살모라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농담이다. 나는 내 부하를 버리지 않아. 그래도 오른팔이 잘린 건 사실이니…… 히람, 역탑으로 가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역탑은 처음 들어 보는데, 혹시 역탑이 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이런,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 버렸군. 방금 전에 한 말은 잊어버리도록.”
“예, 알겠습니다.”
“아무튼 마탑에 가서 ‘드라칸’이라는 마법사를 찾아라. 내 소개라고 하면 대충 알아들을 거다. 혹시 모르지, 드라칸이라면 너의 잘린 팔을 복구시켜 줄지도?”
대답과 함께 살모라가 뱀처럼 웃었다.
* * *
살론은 헨리가 차려 준 요리를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살게라로 추방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따뜻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가 터질 때까지 음식을 먹은 살론은 이번엔 두 팔과 두 다리를 활짝 벌려 바닥에 드러누웠다.
“세상에…… 이렇게 대자로 뻗었는데도 자리가 남다니…….”
1년 넘게 땅굴 속에 살면서 단 한 번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었던 살론이다.
땅굴 속은 지상보다 따뜻했지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습기가 올라와 금방 옷이 젖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환기를 해 주지 않으면 공기가 메스꺼워졌고, 지네나 개미 같은 땅벌레들이 시도 때도 없이 허벅지 위를 기어 다녔다.
높은 천장, 습하지 않은 바닥, 충분한 공간.
헨리가 지어 준 대저택은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곳의 공기는 모닥불을 피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햇살 아래에 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살론은 이 모든 것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추방민들 모두가 살론과 같은 생각을 했다.
“휘유, 드디어 다 끝났네.”
헤글러는 헨리가 쏟아 놓고 간 것들의 정리를 이제야 끝마칠 수가 있었다.
정리를 마친 헤글러는 이윽고 벽에 기대앉아 행복해하는 추방민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힘들었던 과거 시절을 떠올렸다.
‘단장님이 아니었다면…… 나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겠지.’
모시던 백작을 두들겨 패고 밀리언 용병단에 들어오기까지 거의 알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헤글러는 여태껏 추방민들이 어떠한 고생을 겪어 왔을지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헨리가 위대해 보였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을 줄이야.’
처음에는 단순히 준남작 출신의 실력자인 줄로만 알았다.
헨리라는 이름 또한, 대륙이 넓으니 단순히 동명이인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추방민들 앞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것을 본 헤글러는 좀처럼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단장님께서 그 위대한 대마법사님의 제자였을 줄이야…….’
제국의 현자라 불렸던 전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
그는 개인 마법사 한 명의 발전으로 나라 전체가 발전한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따로 수제자를 두지 않은 것 또한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숨겨진 제자가 바로 자신이 모시는 단장이라니……. 헤글러는 다시 한 번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더불어 그 정도 되는 남자가 자신을 ‘자신의 사람’이라고 표현해 주었으니. 헤글러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했다.
“흐흐흐…… 단장님께 충성을 맹세해야지.”
“오냐, 기억해 두마.”
“어, 엇? 다, 단장님?”
고개를 숙이고 실실 웃고 있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헤글러의 혼잣말에 대꾸했다. 헨리였다.
헤글러는 기척도 없이 등장한 헨리를 보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언제 오신 겁니까?”
“방금 전에.”
“문 열리는 소리는 안 들렸는데요?”
“마법사인 걸 밝혔는데 내가 문을 왜 써?”
“아…….”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헤글러는 왠지 모르게 그 말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뀨?
“어, 어?”
헨리의 대답에 감탄하고 있던 찰나, 헤글러는 헨리의 어깨 위에 갑자기 등장한 낯선 파충류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다, 다, 단장님! 그, 그게 뭡니까?”
평생 동안 마물 한번 보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놀라는 것 또한 당연했다.
이에 헨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정령 처음 봐?”
“정령……요?”
“이 녀석의 이름은 엘라곤이다. 최상급 물의 정령 엘리라곤의 새끼인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능력은 아직 미미해.”
헤글러는 살면서 정령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마저도 하급 정령사가 다루는 하급 정령이었다.
헤글러는 신기한 눈초리로 연신 엘라곤을 살폈다. 물론 용기가 없어 감히 만져 볼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식수 공급이랑 이것저것 해결했으니까 전부 모시고 밖으로 나와.”
“알겠습니다!”
헨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추방민들은 잠깐이나마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헤글러와는 달리 이러한 경험을 자주 접해 왔던 사람들인지라 그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이윽고 저택 안에 있던 사람 전부가 헨리를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린 순간, 헨리를 제외한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냐?”
“하…… 이게 무슨…….”
현관문을 열자마자 추방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호수 위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마치 온천을 방불케 하는 호수 위로 살게라의 함박눈까지 떨어지자, 생각지도 못한 절경이 연출되었다.
“호수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 살게라는 원래 지형 대부분이 화산 지대였습니다.”
“화산 지대요?”
“대부분이 휴화산들이긴 한데……. 아무튼 그 덕분에 살게라의 지하수는 보시는 바와 같이 냉수가 아닌 온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 북쪽에 있는 호수는요?”
“거긴 말씀하셨던 얼음의 정령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건 존재했습니다. 뭐…… 지금은 이 녀석이 먹어 치워서 그곳도 온천이 되었지만요.”
헨리는 추방민들에게 굳이 엘라곤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헨리는 원래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들을 모두 해결한 직후, 북쪽 호수의 물을 저택 앞으로 끌어 오는 물길 작업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엘라곤이 헨리의 의도를 알아채고 헨리의 바짓가랑이를 입으로 물고 끌었다.
‘수맥을 찾는 능력이 있을 줄이야.’
헨리의 마력을 먹고 태어난 놈이라 그런지 엘라곤과 헨리 사이의 교감은 보통의 정령사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우수한 편이었다.
아직은 엘라곤의 나이가 어려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는 못 되었지만, 벌써부터 이 정도의 교감 능력을 보이는 걸 보면 충성심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무튼 헨리의 의도를 알아챈 녀석은 저택 바로 앞에 수맥을 찾아 주었고, 헨리는 마법을 이용하여 추방민들을 위한 제2의 호수를 저택 앞에 만들어 주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식수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호수 근처에 우물도 만들어 놓았으니 식수는 그곳에서 이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추방민 모두가 다시 한 번 고개 숙이며 헨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페인트 상단이 아닌 제가 직접 상단을 꾸려 여러분들을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해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거든요.”
새로운 상단에 대한 소식까지 전한 헨리는 비로소 대략적인 준비를 모두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아이젠 백작한테 놈들을 넘기는 것뿐인가?’
드디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죄책감을 떨쳐 낼 수 있게 되었다.
헨리는 남은 이들과 함께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기도를 마친 후, 헤글러와 함께 살게라를 벗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