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68화 (68/522)

# 68

아이젠 백작 (2)

성문이 개방되자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이젠 백작가의 위용이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크기의 정원.

이곳이 만약 아이젠 백작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숲속이라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

주거지의 크기는 집주인의 힘을 과시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헨리의 눈에는 그저 쓸데없는 사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따가닥따가닥.

말을 타고 한참을 이동한 끝에, 헨리는 드디어 현관으로 추정되는 저택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백작님을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베디칸의 말투가 하대에서 경어로 바뀌었다.

분하긴 했지만 헨리의 말마따나 귀빈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베디칸이 사라진 직후, 헤글러가 헨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단장님.”

“왜?”

“여기 이 건물 말입니다…… 대가문의 저택치곤 좀 작은 감이 있지 않습니까?”

“이건 저택이 아니야.”

“예? 그럼 여긴 어딥니까?”

“아마도 여긴 응접실일 거다.”

“……예?”

저택인 줄로만 알았던 건물이 알고 보니 손님 접대용 응접실이었단다.

헨리는 무심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헤글러는 상식을 벗어나는 응접실의 크기에 가만히 입술을 벌렸다.

“백작이…… 다 같은 백작이 아니군요.”

“그렇지. 그래도 명색이 대가문이니까.”

“근데 단장님, 엘라곤은 어디 있습니까? 아까부터 보이지가 않아서요.”

“여기에.”

헨리는 대답과 함께 손목에 차고 있는 푸른색 손목 보호대를 보여 주었다.

“예? 그게 엘라곤이라고요?”

“정령은 생물체가 아니야, 엄연히 따지면 영체에 가깝지. 그래서 활동하지 않을 땐 이런 식으로 힘을 비축해 두는 게 보통이야.”

게다가 엘라곤은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짧았다.

헤글러의 질문에 답변해 주기를 한참, 이윽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마차 한 대가 응접실 앞에 멈춰 섰다. 거대한 크기의 마차였다.

이윽고 불곰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덩치의 아이젠이 마차에서 내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이 녀석도 이셀란 과였지.’

아이젠은 이셀란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근육이 인상적인, 탄탄하고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이윽고 2미터에 달하는 아이젠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헨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이냐?”

베디칸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은 심기가 불편한 듯 짜증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용병 찌꺼기 놈 주제에 제국군 인장이 달린 편지 한 장 가졌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놈이 감히 누구의 병사를 건드린 것인지는 아느냐?”

그 또한 진성 무골 출신인 만큼 소드 마스터의 경지는 진즉에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 보니 살기가 듬뿍 담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의 숨통을 옥죄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반보다는 못하군.’

확실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압적인 기백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자신의 검이었던 반과 비교하자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이에 헨리 또한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꾸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께서 아끼시는 개인 줄 알았다면 주먹을 쓰지 않고 말로 타일렀을 텐데, 워낙에 사나워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헨리의 대답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헤글러와 베디칸의 눈동자가 일순간 확장되었다.

그 누구도 아이젠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네 이놈!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에 베디칸이 뒤늦게 목소리를 드높여 역정을 내려던 순간.

“으학학학학!”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아이젠.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웃음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오직 헨리만이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

용기, 투지, 강함, 용맹 등등, 아이젠은 진성 무골 출신인 만큼 강인한 것을 좋아했다.

사내의 강인함을 최고로 쳐주는 그였기에 남들에게는 건방지다고 생각되는 헨리의 태도를 오히려 ‘용맹함’으로 인정해 준 것이었다.

“간만에 간덩이가 부은 놈을 다 보는군. 그래, 네 말이 맞다! 말 안 드는 개새끼는 두들겨 패야 제맛이지!”

그 거대한 베디칸도 감히 아이젠을 상대로는 헨리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주인의 낯선 모습을 본 베디칸은 그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듣도록 하지.”

역설적이게도, 헨리는 전생의 원수에게 환대를 받으며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 * *

응접실은 웬만한 일반 귀족들의 저택보다도 크고 화려했다.

옥으로 된 테이블과 최고급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는 물론이고, 각종 명화에 비단으로 수놓인 양탄자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이젠은 재물에 대한 욕심과 더불어 보여 주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재산을 과시함으로써 상대를 기선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헨리에겐 조금도 통하지 않는 수법이었지만.

이윽고 응접실을 담당하는 시종들이 한 잔에 몇십 골드를 호가하는 값비싼 차들을 내왔다.

‘차 맛도 모르는 놈이 이딴 식으로 세금을 낭비하다니.’

아이젠 백작은 황궁 사교계에선 이미 겉모습만 화려한 멍청이로 유명했다.

그 증거로 현재 시종이 내온 차는 가격만 더럽게 비싸고 맛은 개똥보다 못한 제품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허영과 사치의 결정판!

하지만 차 한 잔으로 아이젠 백작이 여전히 한결같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헨리는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이러한 종류의 얼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헨리의 띄워 주기가 시작되었다.

“역시 소문대로 입맛이 까다로운 분이시군요. 이렇게 귀한 차를 여기서 맛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하하하! 뭘 좀 아는 놈이군.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감이 딱 왔다, 넌 나와 같은 부류라는 걸.”

‘지랄하네.’

약간의 립 서비스를 얹었을 뿐인데 아이젠의 기분이 과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삼대가문에 들지 못한 이후로 아이젠의 히스테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가는 상황.

그 때문에 저택의 모든 이들이 아이젠의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헨리처럼 시원시원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아이젠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헨리는 그렇게 한동안 시답잖은 이야기로 아이젠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비록 삼대가문은 아니었지만 남은 대가문들 중에 가장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그이니만큼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가 넌지시 여기에 온 목적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백작님, 사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백작님께 좋은 칼 한 자루를 선물해 드리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칼이라고?”

“예. 이 추천서가 바로 그 칼자루입니다.”

아이젠은 그제야 번트의 추천서를 확인해 보았다.

잠시 후,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아이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게 사실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로 도적단으로 위장한 바이퍼 기사단을 궤멸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헨리는 이 기회에 자신의 능력까지 충분히 어필해 두기로 했다.

“아무리 말단 부대라지만 그 바이퍼 기사단이 당했다고? 그것도 고작 네놈 한 명에게?”

“그렇습니다.”

잠깐의 침묵. 그러나 곧 아이젠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쩐지……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나를 앞에 두고서도 그리 당당했던 게지.”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모름지기 사내로 태어났으면 거대한 배짱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바이퍼 놈들을 깨부순 건 아주 잘한 일이다! 네가 국위 선양을 한 것이야!”

바이퍼 기사단이 오베르 후작의 줄을 잡았다는 건 황궁 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아이젠은 더더욱 통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얼마 뒤, 아이젠이 호탕한 웃음을 거두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번트 그 녀석, 황궁에 직접 신고해도 됐을 텐데 왜 하필 나에게 찾아온 거지?”

아이젠이 아무리 멍청해도 번트가 헨리 쪽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좌천을 당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베르 후작과 아이젠 백작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도 황궁 내에선 유명한 사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소스를 제공한다는 건 목적이 뻔히 보이는 짓이었다.

이에 헨리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오히려 어설프게 포장하려 했다간 역효과만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네놈이?”

“그렇습니다. 백작님과 후작님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건 이미 제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 더불어 번트 검문소장 또한 현재의 삼대가문 가주님들과 지독한 악연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삼대가문이 아니라 중앙귀족이었던 나까지 싫어하는 거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제안드린 겁니다. 공동의 적을 두었다면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료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라?”

“제가 칼리번 요새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배우길, 인생에 영원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더 큰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어제의 원수와도 손을 잡는 것이 진정한 군자라고 했습니다.”

“흐음…… 그건 맞는 말이지. 애송이 주제에 제법 그럴듯한 말을 하는구나.”

예상은 적중했다.

헨리의 화법은 아이젠의 취향을 건드리는 것에 성공했고, 더불어 아이젠을 납득시키기까지 했다.

“들을수록 재밌는 놈이로군.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대가문의 가주쯤 되는 인물이 이름을 물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기억해 두겠다는 뜻이다.

이에 헨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헨리 모리스. 제 이름은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뭐?”

헨리는 아이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헨리가 자신의 이름을 대답하는 순간, 아이젠은 헨리에게서 죽은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가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을 했다.

오싹.

아이젠은 순간, 팔뚝에 닭살이 돋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이에 헨리가 냉소를 띠며 대답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정식은 아니었지만, 헨리는 드디어 전생의 원수에게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릴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기분이 흡족해진 헨리는 분위기가 더 틀어지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여 화제를 전환시켰다.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도 이런 이름 때문에 자주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곤 합니다.”

“썩 유쾌한 이름은 아니구나.”

“하하,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잘못이 있다면 그런 이름을 지어 준 너의 부모에게 있겠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래도 우연치곤 꽤나 소름이 끼치는군.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단 말이야. 번트 그놈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네놈은 왜 그런 제안을 한 거지?”

이름 때문이었을까, 아이젠의 태도가 급격히 날카로워졌다.

이에 헨리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말하기 시작했다.

“백작님 때문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보시다시피 저는 준남작가 출신에 검술 아카데미도 나오지 못한 변변찮은 놈입니다. 게다가 칼리번 요새에서 의무적으로 복무를 했다지만 출세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내 눈에 들기 위해 번트에게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헨리는 이번에도 아이젠의 취향을 건드릴 수 있을 만한 맹랑한 대답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이젠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찝찝한 놈이로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져서 소름이 돋는단 말이야. 나는 이런 쪽으론 감이 꽤 좋은 편이거든. 아무튼 선물은 잘 받도록 하지. 그리고 네놈과 번트가 원하는 대로 황제 폐하께서 보시는 앞에서 오베르도 톡톡히 망신 주도록 하고……. 하지만 말이야.”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아이젠이 눈빛을 차갑게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네놈은 찝찝해서 안 되겠어. 베디칸!”

“예, 백작님!”

“이놈에게 후한 포상을 내려 줘라. 이놈이 만족할 만한 아주 후한 포상으로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아이젠이 계산이 아닌 감으로 판단을 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헨리 모리스라는 이름이 아이젠에겐 매우 꺼림칙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이미 아이젠의 뜻은 확고했다.

이에 헨리 또한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안면을 익혀 두었으니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헨리는 처음부터 많은 것을 쥘 생각은 없었기에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과식은 몸에 안 좋아.’

더 맛있는 식사를 위해, 오늘은 여기까지만 먹기로 한 것이다.

* * *

앙켈만에 도착한 반은 헨리가 일러준 대로 하즈에게 운영 팀을 인계해 주었다.

협약서를 확인한 하즈는 기재된 항목들을 면밀히 검토한 뒤 즉시 협약을 체결하였고, 운영 팀 또한 즉시 앙켈만의 재정 감사를 시작하였다.

결과는 훌륭했다.

비는 돈이 없음은 물론이고 낭비되는 예산도 거의 없을 만큼 도시는 매우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덕분에 반 앞에서 체면을 차린 하즈는 다시 한 번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헨리가 말했던 ‘격려금’ 또한 자랑스럽게 수령해 갈 수 있었다.

이로써 반은 헨리가 시킨 일을 모두 끝마쳤다.

볼일을 마친 반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비발디 타운으로 복귀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