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엘라곤 (2)
착각이 아니었다.
고깃덩어리가 폭발하듯, 헨리의 왼쪽 팔뚝은 정말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헨리는 그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물속을 부유하는 자신의 살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잉크가 번지듯이, 팔뚝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물속에서 천천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장관이었다.
그리고 헨리의 핏물이 옅어질수록 그 사이에 숨겨져 있던 엘리라곤의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
알은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크기는 어느새 성인 주먹보다 더욱 큼지막해져선 호수 물을 끊임없이, 그리고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빨아들인 물속에는 체내에 고여 있던 마력도 있었고 맹독이나 다름없는 헨리의 핏물도 섞여 있었다.
호수 물을 빨아들인 알은 점점 더 몸집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휘오오오오……!
기괴한 소용돌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치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용돌이가 멈춘 그 순간, 밝게 빛나던 알은 하나의 빛이 되어 호수 가득히 광명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이에 너무나도 눈부신 나머지 헨리는 넝마가 된 팔뚝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폭발하여 넝마가 된 팔뚝이 트롤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재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헨리는 완벽하게 복원된 자신의 손가락을 까딱거려 보았다. 전혀 위화감이 없는 자신의 손이 분명했다.
‘설마…… 방금 전의 빛 때문에?’
물의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치유의 힘을 타고난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저놈이 엘리라곤의 새끼라고 한들 고작해야 알일 뿐이었다.
그런 알이 내뿜은 빛 때문에 팔뚝이 치료될 정도라니, 헨리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마침내 광명이 잦아들었다.
헨리는 잦아든 광명의 끝에서 알이 아닌 새끼 용을 닮은 새로운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새끼 용인 해츨링을 닮았지만 해츨링은 아니었다.
최상급 물의 정령들 중에서도 수룡이라고 불리는 엘리라곤. 녀석은 정령들 중에서도 특히 더 보기 힘들다는 ‘드래곤’의 형상을 지닌 엘리라곤의 새끼였다.
-큐우우웅…….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뜨는 엘리라곤.
녀석은 비대하게 팽창했던 알의 크기에 비해 마치 강아지처럼 조그맣고 앙증맞은 크기로 태어났다.
푸드드드득-!
엘리라곤은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몸 전체를 털었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바닥에 착지하여, 땅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연녹색을 띠고 있고 사족보행을 하며, 날개와 꼬리를 가진 저 모습은 분명한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자태를 가진 엘리라곤이 보인 행동은 마치…….
‘……개?’
……한 마리의 개를 연상케 했다.
그러기를 한참, 엘리라곤은 마침내 어느 한 지점에서 앞발을 이용하여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헨리는 그런 엘리라곤의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큥!
‘음?’
앞발로 땅바닥을 얼마나 파헤쳤을까?
녀석은 충분히 땅바닥을 파헤친 후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깊게 파인 구멍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동안 끙끙대더니 마침내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입에 물고서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저건!’
이에 팔짱을 끼고 가만히 지켜보던 헨리의 눈동자가 솥뚜껑만큼 확장되었다.
그것은 ‘정수’였다.
그것도 순수한 대자연 속에서만 발생한다는 ‘대자연의 정수’!
헨리도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그런 정수를, 엘리라곤은 태연스럽게 찾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를 발견한 순간, 그제야 헨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것 때문에 호수가 얼었던 모양이군.’
대자연의 정수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의 기운이 쌓여야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아마도 헨리의 예상이 맞는다면 저것은 ‘얼음의 정수’가 분명할 것이다.
‘살게라 특유의 냉기가 호수 밑바닥에 누적되었던 모양이야. 어쩐지 계속해서 호수가 얼더라니…….’
덕분에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그작!
“어, 어!”
엘리라곤이 갑작스레 입에 물고 있던 정수를 씹어 삼켜 버린 것이다.
이에 헨리 또한 너무 놀란 나머지 입 밖으로 육성이 튀어나와 버렸다.
‘저, 저 귀한 걸……!’
정령의 알만큼이나 귀한 것이 바로 대자연의 정수다.
그런 보물을 갓 태어난 엘리라곤이 씹어 먹어 버렸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지사.
그런데 엘리라곤이 정수를 집어삼킨 직후였다.
우우우웅……!
엘리라곤의 몸 전체가 다시 한 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크리스털을 연상케 하는 푸른 빛이었다.
서서히 빛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라곤의 모습이 다시 보였을 때, 엘리라곤의 외형은 처음에 보았던 것과는 좀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있었다.
‘진화?’
진화라는 말이 어울릴 듯싶었다.
강아지 정도밖에 안 되던 엘리라곤은 어느새 다 자란 고양이만큼 덩치가 커져 있었다.
그리고 연녹색으로 빛나던 비늘은 어느새 진한 청록색이 되어 있었고, 이마에는 2개의 뿔이 조그맣게 돋아나 있었다.
진화를 마친 엘리라곤이 다시 한 번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털었다.
-큥!
몸 털기가 만족스러웠던지 녀석은 흡족한 표정이 되어 이윽고 헨리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
헨리는 잠자코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녀석이 헨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순간.
-뀨우우우.
엘라곤이 헨리의 발목에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것은 명백한 애교였다.
‘다짜고짜 팔뚝부터 날려 버릴 땐 언제고…… 그래도 둥지는 알아본다 이건가.’
비록 모체가 되는 엘리라곤에 의해 태어난 알이었지만 정령들에겐 부모와 자식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엘리라곤이 헨리에게 보이는 행동은 부모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부화시켜 준 ‘둥지’에 대한 애착에 가까웠다.
헨리는 헛웃음과 함께 강아지를 들어 올리듯이 엘리라곤을 들어 올렸다.
-뀨?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강아지 같았다.
헨리는 용의 모습을 한 주제에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고 있는 엘리라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이름은 앞으로 엘라곤이다.”
-뀨우!
헨리는 모체가 엘리라곤이었으니 그 이름을 따 가볍게 엘라곤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윽고 헨리는 엘라곤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우웅-!
사용된 마법은 ‘속성 검사’라고 불리는 친화력 테스트의 일종으로, 주로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쓰이는 것이었다.
궁금했다.
최상급 물의 정령이면서 태어나자마자 얼음의 정수를 통째로 집어삼켰으니 어떠한 힘을 내포하고 있을지, 몹시도 궁금했다.
그런데 속성 검사를 진행하던 중, 헨리는 뜻밖의 힘을 발견하고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허, 이놈 보게?’
속성 검사 결과, 엘라곤은 학생으로 비유하자면 거의 타고난 천재나 다름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엘라곤의 몸속에서 아주 진한 네 가지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려 네 가지 속성이라니…… 이런 놈은 나도 처음 보는군.’
먼저 엘라곤은 모체가 되는 엘리라곤의 힘을 이어받았으니 아주 강력한 ‘물’의 속성을 타고났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얼음의 정수를 섭취하는 바람에 물과는 좀 비슷하되 약간 다른 성질에 해당하는 ‘얼음’의 속성까지 타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엘라곤의 재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라곤은 알의 부화 조건들 중의 하나인 ‘충분한 수분 공급’을 위해 혈액이 충만한 헨리의 팔뚝으로 옮겨졌다.
우연은 여기서 발생했다.
수분 공급을 위해 팔뚝에 집어넣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헨리의 피는 베놈의 심장을 집어삼킨 탓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맹독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엘라곤은 부화하기 직전까지 그 피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맹독’의 힘까지 타고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독도 아닌 무려 ‘베놈의 심장’에서 나온 독이었기 때문에, 엘라곤은 순수한 독의 정령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독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우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헨리의 팔뚝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속삭임의 호수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엘라곤은 헨리의 팔뚝으로 옮겨져 독하디독한 핏물에 담기면서 독성뿐 아니라 다른 능력도 얻었다.
알 속에 있던 엘라곤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령이었으므로 맹독에 중독되지는 않았지만, 물의 정령 특유의 치유력은 독한 핏물에 반응하여 쉴 틈 없이 치유력을 발산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헨리의 마력이 끊임없이 소비되었지만 헨리는 그 전까지 속삭임의 호수에서 명상을 통해 충분한 양의 마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덕분에 엘라곤의 치유력은 헨리의 체내에서 끊임없이 단련되었고, 그 결과 물 속성 특유의 치유력이 아닌 ‘엘라곤 자체의 치유력’이라는 새로운 힘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헨리는 그러한 사정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만큼 엘라곤의 힘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진, 그야말로 기연에 가까운 힘이었다.
“그럼 앞으로 한번 잘해 보자.”
-뀨!
과정이야 어찌 됐든 헨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전력을 손에 넣은 것은 확실했다.
어부지리로 호수의 비밀까지 파헤칠 수 있었던 헨리는 이윽고 몸무게를 가볍게 하여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첨벙!
얼음의 정수가 회수된 탓인지, 어느새 호수 표면의 얼음은 거짓말처럼 모두 녹아 있었다.
덕분에 헨리는 가볍게 호수를 벗어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볼일은 해결한 것 같고…… 그럼 이제 슬슬 저택까지 수로를 한번 파 볼까?’
헨리는 호수의 비밀과 진화된 엘라곤까지 손에 넣었으니 슬슬 원래의 계획을 실행키로 했다.
헨리는 호수까지 오면서 체크해 두었던 길목들을 떠올리며 물길 내기에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헨리는 제국 건설 당시에 발휘했던 토목 지식들을 떠올리며 최적의 물길을 선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정한 물길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본 직후, 헨리는 본격적인 공사를 위해 호수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음? 이것들 전부 왜이래?”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호수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헨리는 호수 표면 가득히 떠올라 있는 수백 마리의 죽은 물고기 떼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 헨리의 눈에 이상한 현상이 포착되었다.
“김?”
김. 그것은 김이 확실했다.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가 되고, 그 수증기가 찬 공기를 만나 작은 물방울이 엉겨 눈에 보이게 되는 현상.
헨리는 호수 전체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왜?’
헨리는 호숫가로 다가가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따뜻했다.
호수 안에 있던 물고기가 갑작스럽게 떼죽음을 당한 이유는 한없이 차가웠던 호숫가가 갑작스럽게 가열되었기 때문이었다.
‘얼음의 정수가 회수된 직후, 호수 표면에 있던 얼음이 녹고 호수 물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은 이상 현상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원래 이 호수의 진짜 모습인 ‘온천’이었던 것이다.
‘설마 이 넓은 호수 전체가 온천이었을 줄은…….’
어쩌다가 온천 바닥에 얼음의 정수가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원래부터 온천이었던 이 호수에 얼음의 정수가 맺히기 시작하면서 온천이 식어 평범한 호수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당황스러웠다.
이제야 겨우 식수 공급을 위한 물길을 다 짜 놓았는데 온천이라니.
갑작스러운 온천의 등장에, 헨리는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식수로 사용하려 했던 호수가 온천이 되었으니 새로운 식수원 또한 다시 찾아야만 했다.
‘우선…… 물고기들부터 건져야겠지?’
헨리는 한숨과 함께 익은 물고기들부터 건져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