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하즈 시장 (1)
쉬이익!
헨리를 등에 태운 제이드가 중력에 의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속도에도 헨리와 제이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지상에 곤두박질쳐 피 곤죽이 되기 직전, 헨리는 그제야 나지막이 주문을 읊조렸다.
“페더 폴.”
마법이 시전되자 제이드의 몸체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이에 제이드는 우아한 모습으로 사뿐히 바닥에 착지해 보였다. 마치 페가수스처럼.
“수고했다.”
푸릉.
보통의 말이었다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결코 수행하지 못했을 명령이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헨리의 명마 개조술을 거친 몸.
절벽이 아닌 불구덩이 속이라 할지라도 거침없이 뛰어들 것이다.
헨리는 제이드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뒤 말 등에서 내려왔다.
‘못 본 사이에 훨씬 더 아름다워졌군.’
눈앞에 펼쳐진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호수였다.
그리고 그 호수 위에는 물빛을 닮은 반딧불이와 이름 모를 정령들이 요정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푸릉.
마력이 충만한 곳이었다.
헨리는 이곳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기 전에 오랜만에 발견한 ‘마력의 보고’에서 여분의 마력을 충원하기로 했다.
양지바른 곳을 찾은 헨리가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스스슷.
명상을 통한 정신의 집중은 금방 극의에 다다랐다.
확실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자연이 주를 이루는 곳이라 그런지 마력의 밀집도가 도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헨리는 전신의 통로를 개방시켜 금방 주변과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지고 난 뒤 캄캄한 어둠이 찾아왔을 때쯤, 헨리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됐다.’
과연 속삭임의 호수였다.
반나절이 채 안 되는 시간으로 헨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력을 체내에 축적시킬 수 있었다.
“리버스 그래비티.”
역중력 마법.
명상을 마친 헨리가 호수를 향해 손을 뻗어 보이자 고요하던 호수 물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과!
요동치던 호수는 곧 헨리의 마력을 그릇 삼아 허공에 떠올랐다. 대단한 장경이었다.
이윽고 호수에는 한 줌의 물방울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헨리는 텅 비어 버린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찰박, 찰박.
물에 젖은 흙이 신발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헨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정수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들어왔을 때쯤, 헨리는 바닥에서 익숙한 형태의 투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깊게도 파묻혔네.’
그것은 실더의 투구였다.
호수 속에서 위스퍼링을 지키던 실더는 무른 바닥 때문인지 어느덧 머리만 남겨놓은 채로 바닥 깊숙이 파묻힌 상태였다.
“……다했고수 안동그.”
파삭.
주문을 외우자 실더의 몸체가 허물어졌다.
헨리는 그 안에 든 나무 함을 집어 든 뒤 천천히 호수 밖으로 걸어 나왔다.
딱!
그리고 뭍으로 나왔을 때, 헨리는 손가락을 튀겨 역중력 마법을 해제시켰다.
콰과과!
거대한 파도가 쓰러지듯, 엄청난 굉음이 고요했던 숲 전체를 덮쳤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호수 바깥으론 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만큼 헨리가 세밀하게 마력을 운용하였기 때문이다.
‘상쾌하군.’
일부러 거창한 마법을 사용했다.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마력을 마음껏 운용해 보고 싶은 것이 그 이유였다.
호수가 다시 잠잠해지자 헨리는 그제야 나무 함을 열어 보았다.
딸각.
나무 함 속에는 예상대로 하늘색 보석으로 만들어진 ‘위스퍼링’이 들어 있었다.
헨리는 그것을 착용한 뒤 천천히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인간이야, 인간!
-쟤는 누군데 왜 우리 구역에 와서 난리야?
-얼른 내쫓아!
-설마 그걸 노리고 온 건 아니겠지?
위스퍼링을 착용한 직후, 귀걸이에 걸린 커뮤니케이징 마법 덕분에 호수에 사는 생물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엘리라곤 님의 알이 여기에 있다는 걸 절대로 들켜선 안 돼.
-그래그래, 그러니까 얼른 쫓아내자고!
흘러가듯이 들려온 말소리였지만 헨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엘리라곤이라고?’
엘리라곤은 물의 정령들 중에서도 최상위 개체에 속하는 존재였다.
게다가 정령들 사이에서도 꽤나 보기 힘든 용의 모습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선 엘리라곤을 수룡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거…… 장난감 하나 주우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하게 됐군.’
정령들은 자연에서 태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드물게도 후손을 남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이번에도 부모는 없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체인 엘리라곤은 보이지 않았다.
정령들은 후손을 남겼다고 해서 부모의 마음을 갖고 알을 보살피진 않기 때문이다.
학파에선 이를 두고 상급 정령이 단순히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거나 주체하기 힘든 힘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라고 추측했다.
‘뭐가 됐든 엘리라곤의 알은 내가 가져가 주마.’
생각지도 못한 목표가 생긴 헨리는 정보 수집을 위해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위스퍼링을 착용했다고 해서 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지, 어쩌지? 정말로 알을 빼앗기는 거 아냐?
-아닐 거야! 저 인간은 호수 밑에 있던 다른 물건을 가지러 온 것 같던데?
-그럼 도굴꾼?
-그럴지도 몰라, 생긴 것부터가 고약하게 생겼잖아?
곤충과 잎사귀, 하물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까지 지저귀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8할이 쓸데없는 말들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정보를 수집하는 것보단 필요한 정보를 발설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테니까.
“클레버.”
-예, 주인님.
슬그렁.
헨리는 체스트를 개방시켰다. 위치는 왼쪽 손바닥 안.
헨리는 손바닥으로부터 성검을 뽑아 들었다.
“파이어.”
헨리는 뽑아 든 성검에 불꽃을 피워 올려 거대한 화염검을 만들어 냈다.
효과는 굉장했다.
자연발화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좀처럼 불꽃 구경하기 힘든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끼아아악! 불이야! 불이라고!
-저놈 갑자기 왜 저래!
-니가 고약하게 생겼다고 해서 그렇잖아!
-안 돼! 불바다가 되면 우리 모두 불에 타 죽을 거야!
-엘리라곤 님의 알도 불타 버릴 거야!
-어쩌지? 어쩌지? 물푸레나무 뿌리에 엘리라곤 님의 알이 있잖아! 나무를 옮겨야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포와 걱정이 한가득 쏟아져 나왔는데, 개중에는 헨리에게 필요한 말들 또한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물푸레나무 뿌리라고?’
어느 잡초가 이야기한 것을 정확히 들은 덕분에 필요한 정보를 획득한 헨리는 즉시 불꽃을 거두었다.
‘물푸레나무를 찾으면 되겠군.’
식물도감을 통째로 외운 헨리였다. 그런 헨리에게 물푸레나무의 구분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라이트.”
헨리는 어두워진 호수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물푸레나무는 물가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나무.
이 근방에 물가라곤 속삭임의 호수밖에 없었으므로 호수를 한 바퀴 돌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저거네.’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크기의 물푸레나무가 보였다.
나무는 덩치에 걸맞게 거대한 뿌리를 선박의 닻처럼 호수 속에 뻗고 있었다.
-안 돼!
-물러가라! 인간 놈아!
-제발 모른 척해 줘!
물푸레나무와 가까워질수록 동식물들의 절규 또한 한층 더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들의 절규가 커질수록 헨리는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자신이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을.
이윽고 물푸레나무 앞에 선 헨리가 뿌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홍해가 갈라지듯 호수가 갈라지고 물속에 잠긴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그리고 헨리는 볼 수 있었다, 굵직한 나무뿌리 사이에 끼워진 청명한 빛깔의 푸른 보석을.
엘리라곤의 알을 발견한 헨리는 그것을 냉큼 주워 들었다.
그런 다음 동식물들의 비명을 차단하기 위해 서둘러 위스퍼링을 떼어 냈다.
‘한결 낫군.’
위스퍼링을 떼어 내자 호수는 다시금 고요한 평화를 되찾았다.
헨리는 주워 든 엘리라곤의 알을 라이트에 비춰 보았다.
‘역시 정령의 알이야. 아름다워.’
알은 엄지손톱 크기로 잘라 놓은 하늘색 유리 파편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표면은 매끄러웠고 감히 생명체의 알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정령의 알은…… 이로써 두 번째인가.’
정령의 알을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생의 헨리조차도 평생토록 딱 한 번 접해 봤을 만큼 정령의 알은 몹시 희귀한 것이었다.
‘역시 부화시켜야겠지?’
시장에 내다 팔 경우, 임자만 잘 만난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정령의 알이었다.
하지만 이미 돈이라면 차고 넘치게 벌었다.
그리고 한낱 돈 때문에 이렇게 귀한 것을 내다 팔 헨리가 아니었다.
‘이게 정말로 엘리라곤의 알이 맞는다면 이 녀석의 미래는 무궁무진하다.’
고위급 정령사들조차도 쉽게 계약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엘리라곤이었다.
그런 엘리라곤의 후손이니만큼 잘만 육성시킨다면 반드시 강력한 존재가 되어 미래에 보탬이 될 것이다.
‘물의 정령이니만큼 물과 마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겠지.’
전생에 한번 정령의 알을 부화시켜 본 적이 있었던 터라 기본적인 지식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환경을 갖추어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헨리는 얼마간 고민하던 끝에 오른쪽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샤프.”
마법이 발동되자 헨리의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날카롭게 변했다.
헨리는 날카롭게 변한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팔뚝을 조그맣게 갈라냈다.
찌익.
살이 갈라지고 피가 흘렀다.
헨리는 갈라진 상처 사이로 엘리라곤의 알을 집어넣었다.
“힐.”
알을 집어넣은 헨리는 상처를 손으로 감싸 쥔 다음 회복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왼쪽 팔뚝에는 피가 흘렀던 흔적만이 남게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마력이 충만하고 지속적인 수분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
헨리는 그 장소로 자신의 몸을 택한 것이다.
혈액 또한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제이드.”
푸르릉!
뜻밖의 보물을 손에 넣은 헨리는 갈라진 호수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플라이.”
그런 다음 앙켈만으로 떠나기 위해 제이드와 함께 다시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 * *
이틀이 지났다.
원래대로라면 사흘은 더 걸릴 거리였지만 쉬지 않고 달려온 끝에 헨리는 마침내 이틀 만에 앙켈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충성! 귀인을 뵙습니다!”
신분 패를 확인한 입구의 병사들이 즉각 헨리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 덕분에 헨리는 이번에도 줄을 서지 않아도 됐다.
‘앙켈만도 오랜만이네.’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제법 짭조름했다.
주변이 온통 바다뿐이니 소금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전생에 헨리는 머리가 갑갑할 때면 이따금씩 앙켈만의 짠 내를 맡으러 내려오곤 했었다.
바다에서 나는 짠 내가 묘하게 머릿속을 진정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주인님.
얼마간 앙켈만의 공기에 심취해 있을 때, 잠자코 있던 클레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헨리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지?”
-저…… 바다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데, 한 번만 구경을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뭐라고?”
클레버의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