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243
해안에서부터 들리는 폭음 소리에 황제는 놀라서 탁자 밑에 숨었다.
그를 모시던 시녀들이 급히 그를 달랬다.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대도독이 대비를 하고 가지 않았사옵니까.
-셀 수 없을 만큼의 마포가 바다를 지키고 있다고 하옵니다.
적들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으며, 1함대를 전멸시켰었다.
원숭이라 할지라도 대비를 할 것이다.
-크흠. 겁을 먹은 것이 아니다. 너희와 숨바꼭질을 하려 했던 것이니라.
-꺄르르르~
이 와중에도 치마폭에 둘러싸여 마음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신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겁을 먹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요 신하들은 황제가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시녀들이 누구의 뒷배로 들어왔겠는가.
쾅쾅쾅!!!
점점 해안에서부터 들리는 광음이 심해져 왔다.
“폐하!! 피하셔야 하옵니다.”
“뭐라아?!!”
“여진. 여진족 놈들이 해안으로 상륙을 했다고 합니다.”
“막으면 되지 않느냐! 황제가 황도를 두고 도망가는 것이 가당키나 하더냐.”
상륙을 해 봐야 얼마나 했겠는가.
“10만에 가깝다고 하옵니다.”
“뭐어어?! 10만?!”
황실 근위대의 숫자는 3만에 불과했다.
그것도 해안포에 배치했기에 뿔뿔이 흩어져 황궁을 지키는 병력은 5천도 되지 않는다.
끼요오오오~~!!!
저 멀리서 야만족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등꼴이 서늘하다.
“마차를 준비했사옵니다. 곧장 강남으로…….”
“빌어먹을 대도독!! 그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어. 그놈도 무능한데 욕심만 많은 간신이었어.”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새만 챙겨서 마차에 올랐다.
타다다다당!!! 쿠우웅! 쾅!!
황궁의 서쪽 입구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
오줌이 마려웠으나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
“폐하. 소녀도. 소녀도 데려가 주시옵소서!!”
“꺼져!! 어딜 감히 황제와 함께 마차를 타려고.”
황제는 마차로 뛰어드는 시녀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그걸로 모자라.
“내 행차를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베어 버려라.”
“존명!”
황제의 호위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었다.
시녀, 신하, 병사, 백성 할 것 없이.
꺄아아아악!!
궁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이 여진족에게 뚫린 모양.
* * *
모든 해안포들이 무력화되었다.
고잉미샤호는 유유히 항구에 정박했다.
끼리릭~ 쿵!
판자가 깔리고 리안이 유유히 내렸다.
매캐한 타는 냄새가 코끝을 툭툭 건드렸다.
화학적인 것이 없는 시대라 나무 특유의 향이 났다.
“모시겠습니다. 폐하.”
기후 백작이 오토호스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백여 명의 정예 기병들과 함께.
이들은 일반적인 여진족들과 다르게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약탈보다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아마도 야인여진 출신들인 듯싶었다.
리안에 대한 경외감이 뼛속 깊이 박혀 있는.
투트트트!
리안은 오토호스를 타고 기후백작을 따랐다.
“황제는 놓였나 보네요.”
“송구하옵니다. 북쪽 관문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황제가 도주한다면 강남으로 갔을 터.
서쪽이나 남쪽 관문을 거쳐 도망갈 것이라는 것이 상식.
그런데, 그 상식을 깨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도중에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었겠지.
“뭐. 상관없나.”
황궁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여진 기병들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어 있는 것들이 더 많았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거슬리시면 멈추게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즁 대륙은 넓고 어설프게 행동했다가는 정복하는 데 시간만 걸릴 뿐입니다.”
공포가 없다면 자비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만약 처음부터 자비를 베푼다면, 새로운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적들의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항복이냐 저항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일단 싸워 보고 불리하면 항복을 택할 테니.
꺄아아아악!
날카로운 여인들의 비명 소리는 황궁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대전에 신하들을 모아 두었습니다.”
황제와 달리 도주한 신하들은 많지 않았다.
많은 신하들이 대전에서 몸을 떨며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리안이 대전에 들어섰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곁눈질로 리안을 바라봤다.
터벅터벅.
귀찮은 듯한 발자국 소리.
그 소리는 대전을 지나 옥좌에 닿았다.
“불편하네.”
다리를 꼬고 삐뚜름하게 앉은 리안은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신하들은 리안의 행동에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옥좌에 앉았다면 통치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모든 신하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국정이 마비될 테니.
여진족들이 이 나라를 다스릴 행정력이 과연 있을까?
“다들 고개를 들어라.”
스르르.
신하들의 숫자가 많다 보니 옷깃이 부딪히는 소리가 모여 부산스러웠다.
그들은 젊어도 너무 젊은 리안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기대를 잔뜩 하고 이곳에 왔건만 영 수확이 좋지 못하군. 군대를 움직인 보람이 없어.”
리안은 경박스럽게 손을 동그랗게 모아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대번에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챘으리라.
“황제가 황궁 보고를 싹 털어갔더군.”
신하들을 버리고 돈을 챙겨 간 것이다.
만약 황궁 보고를 포기했다면, 신하들을 충분히 대피시킬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말이야. 듣기로는 너희들이 가진 것도 적지 않다고 하더군. 신하들이 가진 돈을 다 합치면 황궁의 보고에 든 것보다 많다. 이런 소문이 자자해.”
신하들이 침을 삼켰다.
통치를 바랄 줄 알았는데, 야만인들을 이끄는 황제라 그런지 돈이 목적이었나 보다.
나름 청렴하게 살아온 신하들은 억울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딱 10명만 살려두지. 나머지는 모두 산채로 태워 죽일 것이다.”
“폐… 폐하. 이 나라는 크옵니다. 저희를 살려 두시면 쓰일 때가 많을 것이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한 너희를 중용하는 것은 내 얼굴에 침 뱉기지. 너희는 즁 제국이 나라로 보이느냐.”
“…….”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싶지만, 내 자비를 베푸는 것이니 감사히 생각하거라. 명심해라. 10명이다. 하루를 줄 테니 발악해 봐.”
리안이 이들에게 이리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야비한 간신들이 아니랄까봐 재물을 감추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놈들은 저택에 평범하게 숨기지 않는다.
찾는 것 자체가 상당한 노동력이며 못 찾을 가능성도 높다.
“기후 백작.”
“네. 폐하.”
“저놈들 하나하나에 병력을 붙여 주세요. 그리고 저놈들이 바치는 것에 대한 감정은 내 배의 마포장에게 맡기면 될 겁니다.”
고잉미샤호의 마포장 토우기슈끼 럽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감정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해적 출신이라 안목이 매우 높았다.
귀족인 기후 백작보다 더.
“알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엄청난 재물이 걷혔다.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장신구들이 황궁에 산처럼 쌓였다.
“엄청나군.”
이걸 보며 감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리안도 이 정도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실물로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신하들이 모은 재물이 이리도 많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티겠는가.
더군다나 저게 끝이 아니다.
부동산이나 채권 같은 고정에 가까운 자산이나 지방의 별장에 숨겨 놓은 것들까지 회수한다면 여기 쌓여 있는 보물 더미를 하나 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들은 회수가 불가능하다.
“불을 붙이세요.”
리안의 말에 따라 보물의 반대쪽에 커다란 화마가 일어났다.
화르르르~!
“약속대로 10명을 제외하고 나라를 망하게 한 너희들을 태워 죽이겠다.”
자신의 나라는 아니지만,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살 수 있겠지?’
어떤 신하들은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바친 재물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지 못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식솔들도 함께 풀어 준다고 했다.
‘그 얼간이 겁쟁이 황제는 강남으로 도망갔겠지?’
나라 꼴이 이리되었으니 그놈은 지금까지처럼 함부로 신하들의 목을 치진 못할 것이다.
10명을 제외하고 고위신하들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 살아 돌아온 신하는 고급 자산이 된다.
나라를 황제 혼자서 다스리진 못한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군.’
저 서방의 황제가 수도를 불태우고 재화만 챙기는 걸 봐선 통치할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강남에서 숨을 죽이다 이놈들이 물러나면 그때 잃어버린 것들을 수복하면 된다.
“살려 줄 자의 명단을 발표하겠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눈을 질끈 감고 체념한 듯 보였다.
“신짜오잉~!”
역시나 첫 번째로 호명된 것은 가장 재산을 많이 바친 자였다.
저 빌어먹을 노괴는 수도가 아니더라도 지방에 뿌려 놓은 것만 회수해도 수도에 있는 자산보다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모두가 예상했다.
“짜응짜잉~ 또잉또응~ 응짜이빠잉~”
1명, 1명 호명되었다.
그러다 여6명째부터는 뭔가 이상했다.
웅성웅성.
체념한 신하들도 고개를 쳐들었다.
“쩡녀잉하잉~”
그럴 것이 저자는 평소 혼자 깨끗한 척은 다 하고 다닌 자였다.
경륜 있는 자들은 황제의 철퇴를 피하기 위해 낮은 관직을 유지했지만, 저자는 아니었다.
황제도 그걸 알아서 그런지 고위 관료임에도 쳐 죽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돈을 얼마나 챙긴 거야?!’
6번째로 호명되었다면 결코 적은 재물을 가져온 것이 아닐 터.
“다들 시끄럽다!!”
리안이 소리치자 다들 고개를 처박았다.
이미 경고를 한차례 했다.
곱게 죽을 것인가? 힘들게 죽을 것인가?
지금 신하들이 곧 죽을 위기 앞에 놓였지만 얌전한 이유였다.
“앞의 5명은 성의를 봐서 살려 준 것이고. 나머지 5명은 그나마 청렴한 자를 살려 줄 것이다. 아무리 적국이라 할지라도 존경받을 것은 존경받아야지.”
“이… 이런 법은 없습니다!! 폐하!!”
제법 많은 재산을 바친 신하 하나가 발악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러고 저러고는 짐이 정한다. 어디서 감히 황제의 명령에 콩나라 오나라 하는 게더냐?!”
순간 지적을 받은 신하는 어질어질했다.
게다가 콩은 알겠는데, 오는 뭐지?
“빅!”
“어… 선장. 저놈을 조지면 되나?”
리안이 존슨을 부르자 화들짝 놀랐다.
이래 봬도 그는 남작이었다.
아직 가 보지도 않은 어딘가 땅을 받았다.
“짧고 굵게 실력을 보여 줘요.”
“어… 그래.”
다른 선원에 비해 활약이 적었던 그였다.
그는 기다란 쇠꼬챙이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존슨도 그걸 느꼈는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크흠!”
그는 한쪽에 기름을 먹어 활활 타오르는 불에 쇠꼬챙이를 달군 다음 신하에게 다가섰다.
“감히 우리 선장에게 말대꾸를 하다니. 운이 좋지 않군.”
“뭐… 뭘하려는 게냐.”
존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여진 기병 두 명을 지목했다.
그들은 잽싸게 그의 양팔을 붙잡은 뒤 일으켜 세웠다.
존슨은 그의 뒤로 돌아갔다.
끄아아아아아악!!!
그걸 지켜보던 이들은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모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미쳤네.’
리안도 눈을 슬쩍 옆으로 피했다.
끅! 끄으윽!
리안에게 항의를 했던 신하는 신음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존슨 남작은 그를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가루를 꺼내더니 그의 얼굴에 뿌렸다.
허어어억!!
깨어난 신하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움직일수록 고통은 더 심해졌다.
“운이 좋군. 넌 가장 늦게 죽을 거다.”
그는 뒤에서부터 몸이 꿰뚫린 채로 공중에 세워졌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여진족들도 그걸 지켜보고는 모두 몸을 잘게 떨었다.
적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공포를 각인시켰다.
“명단에 없는 놈들은 모두 태워 죽여라.”
사실 이 화형도 빅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중앙의 신하들도 이렇게 태워 죽이는데, 어쭙잖게 저항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걸 목격한 이들은 꽤 많았다.
살아남은 궁녀나 환관들 그리고 일부 고용인들을 모아 놓고 목격하게 만들었다.
일부는 살려서 풀어 줄 예정.
다만, 명단의 신하들은.
“명단에 있는 놈들은 식솔들을 데려와라. 나와 북방으로 갈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를 풀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너희는 북방으로 추방이다. 한 번 더 토를 단다면 저놈처럼 될 것이다.”
리안은 한쪽에 몸이 뚫려 신음하고 있는 자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쪽을 쳐다보진 않았다.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히이이익!!
명단의 신하들도 모두 기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