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176
맑고 청명한 수정구를 손끝으로 튕겼다.
팅~!
손끝을 따라 마나가 딸려 올라온다.
예전보다 훨씬 더 찐득하다.
리안이 각성을 한 뒤로 벌어지는 현상.
마나와 오러는 원론적으로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
아이스 커피와 핫 커피의 차이라고 할까.
결국엔 둘 다 커피.
“아아. 마이크 테쑤뜨~ 선장입니다아~ 괜히 자리 이탈했다가 나중에 의무실 찾지 말고 알아서 자기 몸 챙깁시다.”
리안이 거칠게 배를 몰고 나면 항상 자잘한 상처를 호소하는 선원들이 생긴다.
아마 뱃사람이 아니었거나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일반이었다면 사망자까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초창기엔 중상이 될 뻔한 것을 세이나 덕에 넘긴 사람도 있었다.
딸깍! 딸깍!
공왕과 공작이 멍한 얼굴로 벨트를 다시 체크했다.
항상 함께 배를 타는 그것도 선교의 선원들이 벨트를 매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 서, 서, 선장님! 적 1:2로 분할됩니다.”
레이더병 똘똘이가 긴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그동안 일한 짬이 있어서 그런지 처음 빼고는 목소리의 떨림이 사라졌다.
“저기 지휘관. 제대로 배웠네.”
전술은 답이 없다.
그럼에도 답을 찾는다면 변수에 대한 대응.
상황. 파도. 거리. 현재의 포지션.
이 시대에는 완벽한 해전 교리.
1척을 상대로 저렇게 옭아맨다면 도망가기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맹점이 하나 있다.
“본좌는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거든. 그것도 저 한 척 쪽으로.”
세 척의 배가 고잉미샤호로 접근하다가 한 척이 빠졌다.
나머지 두 척은 타이밍을 봐서 다시 분할하며 완전히 포위할 생각이다.
배는 측면으로 포가 달려 있지만, 앞뒤로는 없다.
가끔 한두 문씩 배치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럴 경우는 공격용 무기가 아닌 실드를 펼치기 위한 방어 도구로써 역할을 한다.
고잉미샤호에도 정면에 한 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 갑자기 왜··· 왜 그러는가?!”
공왕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럴 것이 노골적으로 두 척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하는 고잉미샤호.
다만, 해류가 대각선으로 흐르고 있기에 생각보다 그렇게 빠르진 않았다.
“교육을 시켜 줄까 합니다. 제가 신대륙에 왔는데 깝치는 것은 저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엄밀히 따지면 게임에서의 리안은 해전이 아니라 육전 전문이다.
생존을 하려 발악을 하다 보니 해적선과 뛰어난 선원을 얻었을 뿐이다.
만약 게임이라면 해전을 하지 않는다.
해전은 불리한 싸움을 뒤집기 위해서 거의 필수적으로 수동으로 조작해야 한다.
문제는 단기간에 계속 해전이 벌어진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육전으로 파밍을 하자는 주의였다.
채산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임 형식이 스토리를 계속 반복해서 밀어야 하는 구조이다 보니 효율적인 게임 라이프를 위해 이익이 높은 쪽을 열심히 팠을 뿐이다.
현실은 조금 달랐다.
육전의 경우에는 병력의 규모와 질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해전은 소수 정예로 어려운 판도 뒤집을 수 있다.
츠츠츠!!
배가 조금씩 빨라진다.
“으어어어!!”
가까워지는 적선을 보며 긴장한 공왕이 의자 손잡이를 꽉 쥔다.
공작의 경우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퍼버버벙!!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잉미샤호를 보며 놀란 두 척의 배가 옆으로 틀며 마포를 쐈다.
[마법사 삼촌!]
[어어어!!]
지금 포트는 선교가 아닌 전면에 있는 마포실에 내려가 있었다.
솨아아아~ 퉁!
포탄들이 실드에 튕겨 나갔다.
이내 실드는 사라졌다.
다시 전개하기 위해선 한참이 걸릴 것이다.
일반 마포와 달리 실드탄은 재장전이 느렸다.
“타이밍!”
리안은 즉시 조종구를 반대로 비볐다.
끼걱거리며 배가 바다에 처박힐 것처럼 움직인다.
“으아아아악!!”
“우오아아아!!!”
공작과 공왕이 비명을 질렀다.
조류의 역방향에서 정방향으로 방향이 바뀜과 동시에 기울어졌던 배가 제자리를 찾는다.
배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선교.
순간 가속도와 중력의 영향이 가장 큰 곳.
바이킹 이상의 G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윽!! 읍!! 읍~!!!”
공왕과 공작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중간중간 사타구니 사이에서 느껴지는 찌릿함에 입을 열 수 없었다.
반면 선교에 있는 선원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어떤 이들은 웃는 얼굴로 내기까지 거는 모습이 보인다.
“적 기함까지 잡는다에 1골드.”
“에이. 1급 전열함도 저건 못 잡아. 잡아도 손해가 큰데 굳이? 난 안 잡는다에 1골드.”
“나도 끼워 줘! 잡는다에 3골드!”
“안 잡는다에 2골드!!”
벨트로 인해 의자에 고정된 선원들.
마구 흔들리는 선교.
그 와중에 내기로 난장판이었다.
“야. 빨리 받아 적어!!”
“부선장님은 어디라고 하셨죠?”
가장 짬이 낮아 보이는 해적이 메모장에 팬으로 이리저리 끄적거렸다.
너무 흔들거려 숨도 쉬기 힘들건만 저것들은 왜 저러는 걸까?
“어이~ 대충 하고 집중 좀 합시다. 다른 배들 이동 경로 계산해 주시고. 부선장 아저씨는 해병들 잘 있나 수시로 체크해 주세요.”
“우하하! 짜식들아 내 말이 맞잖아. 기함 잡는다니까. 아니면 해병들 준비시키겠냐.”
“나도 몰라요. 혹시 모르니까 준비시켜 놓는 거지.”
자세한 것은 계획이 없다.
무리가 가지 않는 한에서 적당히 상대할 생각이었으니까.
“마포실! 지금.”
입을 터는 도중에 적선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고.
퍼버버벙!!
양측 포대가 거의 동시에 발사되었다.
콰과과광!!
제대로 된 대처가 없었던 적선은 홀수선 아래를 맞고 그대로 바다에 꼬꾸라졌다.
순식간에 두 척이 침몰했다.
“서··· 선장님! 한 척 도주합니다.”
교전 전에 따로 빠졌던 함선은 아군 전함 두 척이 순식간에 당하자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복귀하려고 했다.
“멍청하긴.”
리안은 그 한 척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들은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못했다.
해류가 추격하기 좋게 흘렀다.
“따라잡을 테니까 마포실 빨리 재장전해요.”
지금쯤 허리에 로프를 감은 마포병들이 열심히 빨빨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
전투를 지켜보던 스랑 제국 함대의 기함.
“저··· 저건 무슨 괴물······.”
제독은 몇 초간 멍을 때렸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정신 차려! 저놈은 해전으로 이벨 왕국의 부마 자리를 따낸 놈이니까.”
이 황자의 말에 정신을 퍼뜩 차린 제독.
“그렇다 해도 저건. 잉글슨의 군함 중에서도 저런 전투력을 가진······.”
“스펙은 그렇게 대단하진 않아. 저거 우리 제국에서 만든 배야.”
“그게 왜 레온 후작에게······.”
“저놈이 탈취했거든. 제기랄.”
이 황자는 생각할수록 열이 받았다.
“그저 방어력이 조금 높고. 쾌속선 중에서도 빠른 편이야. 그것 말고는 뭐··· 수륙양용 정도?”
그 말을 들은 제독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쾌속선에 방어력이 높다는 것은 사기였다.
“뭐. 인정해. 스팩이 좋다는 건. 그래도 전열함과 싸울 순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화력으로 때려 부으면 저 배도 어쩔 수 없어.”
생각해 보니 그랬다.
거기다 저 배는 한 척이고 아직 이쪽은 다섯······.
콰과광!!
방금 네 척이 되었다.
이 황자가 함대를 분리하지 말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제 아집으로 배를 세 척이나 잃었습니다. 지휘권을 양도하겠습니다.”
“제기랄. 난 함대 지휘 따위는 할 줄 모른다고! 지휘권은 가지고 있어.”
“그럼. 벌은 전투가 끝난 뒤 받겠습니다. 혹시 조언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조언을 할 것도 없다.
“그냥 통신선을 기함으로 불러들여서 지켜. 다른 곳에 매복한 아군 전함들을 불러 모으고.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
기함은 의문의 공격으로 인해 바닥에 구멍이 두 개가 난 상황.
급하게 수습하기엔 애매한 곳이다.
“알겠습니다.”
움직일 수 없으니 가장 중요한 통신선을 기함인 전열함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괴물 녀석. 그때 그냥 보내면 안 되는 거였어.”
잉글슨과의 대해전.
신센롬 제국의 황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리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어.”
팽팽하게 싸우는 중이라 신센롬 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센롬 제국이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
로이센 왕국이 그렇게 잘 싸울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지금도 신센롬 제국과 로이센이 싸우는 중.
“거참. 그러고 보니 저놈도 미친놈이네.”
신센롬 제국+스랑 제국
vs
로이센 왕국+잉글슨 왕국.
이런 구도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리안은 지금 로이센 왕국에 전쟁 자금을 대 주고 있는 잉글슨의 편에 서서 싸우는 중이었다.
“제··· 제독!! 적선 접근합니다!!”
네 척의 군함과 한 척의 통신선.
모든 전함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통신선만은 보호해야 했다.
***
공왕은 덜덜 떨며 물었다.
“서··· 설마! 더 싸울 생각인가?! 후··· 후작.”
“그··· 그래. 이 정도면 저놈들도 자네의 무서움을 알았을 걸세.”
공작과 공왕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상태로 물었다.
간혈 적으로 무언가를 삼키며.
“에이. 아직 흰색 깃발이 안 올랐잖아요. 저기 봐요. 1+1이라구요.”
기함을 자세히 보니 무려 제독과 이 황자의 깃발이 나붓거리고 있었다.
“스랑 제국의 이 황자?!”
“잡으면 대박이겠죠?”
“그··· 그냥 물러나는 게 어때? 전투 도중에 죽기라도 하면 정말 골치가 아파진다고.”
공왕은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공국이 스랑 제국의 군홧발에 찢길 수도 있는 상황.
“에이~ 전하. 너무 쫄지 말라니까요. 지금 잉글슨과 한창 치고받고 싸우는 중이라 우리 공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그 싸움을 확대시킨 것도 리안이었다.
겉만 멀쩡한 마나 광산을 공개함으로 말이다.
“저··· 전쟁이 끝나면 어쩔 건가······.”
“뭘 어째요. 그땐 국력이 소모해서 전쟁을 하기 부담스러울걸요.”
“스랑은 대국이야. 우리 브루타뉴는 손가락만으로도······.”
“걱정 마세요. 전하. 소신이 있지 않습니까.”
“내 경을 믿지만······.”
리안이 너무 자신 있어 하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공왕.
‘입이 근질거리네. 마나 광산 그거 꽝이라고.’
두 나라는 그것까지 상정을 하고 전투에 임하고 있다.
그걸 얻는다면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으니 무리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까 보니 꽝이다? 그럼 나라가 휘청하는 것이다.
펑!! 퍼버버벙!!
그 와중에 적선에서 고잉미샤호를 향해 견제 사격을 했다.
“으아··· 으아아아!!”
근처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를 때마다 공작과 공왕은 비명을 질러 댔다.
“다 큰 어른들이 왜 그래요. 이 정도로.”
그러다가.
쿵!!!
한 발이 고잉미샤호에 맞았다.
“으아아악!! 침몰~~!!”
“안 해요. 걱정 마요.”
겔버포는 사거리가 길지만 위력이 약했다.
그걸로는 철갑선인 고잉미샤호에 유효타를 주기 힘들다.
“그만··· 물러나는 게······.”
“에이~ 이제부터가 재밌는 건데 안 보실 거예요?”
“이··· 이미 너무 재미있었네.”
그 말에 리안은 미소를 짓는다.
“그럼 더 지켜봐요. 이번엔 조금 방식이 다르니까.”
***
돌진해 오던 고잉미샤호가 속도를 줄이더니 상어처럼 기함과 거리를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걸 본 황자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여우 같은 놈!!”
아까 전 말한 쾌속선+철갑함이 고잉미샤호다.
“겔버 포를 맞아도 데미지가······.”
“그래도 계속 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많이 맞추면 될 듯싶었지만······.
“적선의 움직임이. 그리고 해류가 너무 거칩니다.”
정말 운이 좋아야 가끔 한 발씩 맞을 뿐이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쾅!!!
아군의 전함은 두들겨 맞을 때마다 큰 타격을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조건인데 명중률은 저쪽이 훨씬 높았다.
“지키기도 힘들고. 추격할 수도 없고.”
고잉미샤호는 쾌속선이다.
숫자를 믿고 접근하면 딱 그만큼만 거리를 둘 것이 뻔했다.
멀리 쫓아 버리려 해도 문제는 그사이 아군의 통신선에 접근해 포격을 해 댈 것이고.
콰아아앙!!
그사이 한 척이 완전 전투 불능이 되었다.
기울어져 가는 배에서 급히 선원들이 탈출하고 있었다.
다른 배에서 로프와 구명정을 던져 선원들을 구출한다.
-으아아아악!!
적극적으로 구명을 하려 했지만, 파도에 쓸려 멀어지는 선원들도 많았다.
거친 해류에 자리를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 힘들었기에 떠내려가는 선원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이러다가 모두 죽는 거 아니야?
-도대체 저 배는 뭐야?!!
-레온 후작.
-그게 누군데!!
-나도 몰라.
선원들의 사기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제독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이 황자는 이 와중에 침착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