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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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는 총 세 장이었다.
아트로네 백작가의 두 후계자의 것과 리안의 것.
참고로 형제의 양피지는 내용이 같았지만, 리안의 것은 내용이 달랐다.
“제가 먼저 사인을 하겠습니다.”
「서약서
나 리안 레온은 연결된 양피지 중 아트로네 백작 후계를 포기한 자에게 줄리아 데르 영애의 신변을 넘겨줄 것을 탱글 님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계약 성립은 서명된 양피지를 동시에 올리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리안이 단검으로 손끝을 살짝 찌른 뒤 양피지에 그었다.
그러자 전쟁의 신 특유의 기운이 발동되었다.
“저… 전쟁의 신이라니…….”
“주교급이 아니라면 이런 계약서를 만드는 게 불가능했을 텐데…….”
두 사람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냥 마법 양피지가 아니라 무려 전쟁 신의 이름이 걸린 양피지였다.
어긴다면 죽는 순간 영혼이 영원히 고통에 빠질 것이다.
‘역시… 후작위는 가볍지 않은 것인가…….’
‘후작이 자신의 직할령을 고향으로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잉글슨 국왕의 생각인 건가?’
두 형제는 불만보다 오히려 ‘줄리아와 결혼=후작 작위’로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형님들의 계약서도 훑어보세요. 두 분 모두 내용은 같아요.”
리안이 나머지 두 계약서도 펼쳐 보였다.
「나는 아트로네 백작위를 탱글의 이름으로 영원히 포기한다. 서명하는 순간은 다른 이가 볼 수 없어야 성립한다. 서명 후 계약 성립까지 다른 이가 보지 못하게 한다.」
리안의 것에 비해 훨씬 단순했다.
딱히 머리 쓸 것도 없어 보인다.
“두 분은 내일 아침까지 서명해서 가져오세요.”
그러자 의미심장한 얼굴이 된 두 사람은 양피지를 챙겨 배에서 동시에 내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사이좋게 말했다.
“동생아, 내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주제를 알거라.”
“형님이야말로 정신 차리십시오. 후작이 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하는 줄 아십니까? 형님 머리로는 안 된다니까요.”
“흥! 경고하는데 난 진짜로 포기할 생각이다.”
“저도 포기할 겁니다.”
두 사람의 눈앞에 후작 작위가 아른거리는데, 백작위 따위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리고 진심은 백작위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포기를 하는 것이지 내 자식이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니까.’
계약은 자신에 국한된 신과의 약속.
다시 말해 인간의 사정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인간의 법으로는 언제든 백작이 될 수 있으니 자식을 나으면 자식에게도 계승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서 되찾아 오면 된다.’
아일리 섬의 유일한 후작이 되니 명목상 모든 백작들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게 된다.
물론 직할지는 데르 백작가가 유일하겠지만 상관없다.
봉신들은 세금과 병사를 상위령에 바칠 의무가 있으니.
“그래. 어찌 되나 보자!”
두 형제는 웃으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러자 참모들이 우르르 몰려서 맞이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뭘 어떻게 돼. 다들 들어 봐. 잘하면 내가 아일리 섬의 유일한 후작이 될지도 모른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명과 서명한 이후에만 봉인을 하면 되었기에 참모들에게 계약 내용을 보여 줬다.
“이… 이건.”
“왜 그러는가?”
“허…점이 있습니다.”
집단 지성이라고 할까.
신의 이름을 빌려서 하는 계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뭐가 문제가 있나?”
“두 분 모두 포기를 선언할 경우. 레온 백작의 계약은 무효가 됩니다.”
“음…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계약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우리 두 형제 중 한 명에게 줄 수밖에 없을 거다.”
두 형제의 생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리안은 잉글슨의 귀족도 아니었고. 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 두 분이 모두 명분을 포기하면… 레온 백작이…….”
“흥!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
욕심에 눈이 먼 두 사람은 부하들의 충언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만약 두 분 모두 포기했을 땐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레온 백작이 임의로 결정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겠지. 그러면 당연히 내게 줄 것이다.”
“그걸 어찌 확신을…….”
“그 녀석이 나를 좋아하니까. 나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도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난 눈 뜨고 당했겠지. 아마 계약서가 이렇게 생겨 먹은 것도 그 녀석의 안배임이 틀림없다.”
계약은 그저 요행이고 이런 그림을 위해 리안이 개입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리 자신만만해하는 것이니.
“그보다 정말 이 계약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후작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그 녀석. 잉글슨 왕국의 후작 뱃지를 가지고 있었다. 잉글슨 국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녀석에게 후작위를 내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말을 들으니 참모들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형제가 아니랄까 봐.
“당연히 포기해야지!”
“당연히 포기해야지!”
양측 막사에서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는 생각을 길게 하지 않고 개인막사로 들어가 바로 사인을 해버렸다.
츄르르릅!
한편 리안은 고잉미샤호의 갑판에 접의식 썬배드를 깔아놓고 우유를 홀짝거렸다.
그 옆에는 아예 목줄까지 채워 놓은 여인이 있었는데…….
“저… 정말. 나를 저놈들에게 팔아 버릴 거더냐?”
“저놈들에게 안 가면 갈 곳은 뻔한데?”
“설마… 진짜로 해적 섬의 사창가에…….”
“알아서 생각하라고.”
그런데 막상 불안한 것은 줄리아였다.
“그 두 녀석 모두 눈알이 완전히 돌아간 것처럼 보이던데… 둘 다 포기하면…….”
“그럼 내 계약서는 무효가 되니 넌 해적 섬으로 가려나? 흐흐흐.”
그 말을 들은 줄리아는 리안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제발 그것만은. 이렇게 비마.”
해적 섬의 사창가는 악명이 높았다.
문제는 프랜차이즈처럼 다른 나라의 항구에도 창관을 연 경우가 있었는데, 아일리 섬에도 해적 섬과 연관된 곳이 있었다.
해적 섬도 끔찍하지만, 만약 아일리 섬의 창관에 배치된다면?
“그게 부탁하는 태도냐?”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차라리 후작님의 노예로 삼아 주십시오.”
줄리아는 머리를 완전히 바닥에 대고 부탁했다.
노예라고 이성을 완전히 잃는 것은 아니다.
노예 인장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충성심 말고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기사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좋아. 네 선배가 있기는 한데, 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 세바스 아저씨.”
“네. 선장님.”
“빅에게 말해서 노예 인장을 준비해 주세요. 내일 두 형님들 모두 아트로네 백작위를 포기할 경우 노예가 될 수 있게.”
“알겠습니다.”
스스로 노예가 되길 자청하는 상태라면, 딱히 세뇌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처음부터 사촌 형들에게 줄리아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줄리아도 정성을 들여 잘 키우면 최상급 대기사까지 가능하다.
이런 재능을 성격이 더럽다 해서 버리면 하수다.
거기다가 그녀의 혈통도 나쁘지 않기에 관리가 곤란한 땅의 영주로 삼아도 되고. 저항이 심한 식민지의 임시 총독으로 삼아도 된다.
저항이 심한 곳에 약한 총독을 앉히면 개복치처럼 죽어 나가기에 지휘 능력보다 개인의 무력이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둘 모두 포기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평소 입이 무거운 세바스도 궁금한 모양.
“뭐. 어쩔 수 없죠. 제가 두 사람의 욕심을 생각보다 과대평가 한 것이겠죠.”
* * *
다음 날.
해가 떠오르기 무섭게 두 형제는 양피지를 싸매고 고잉미샤호로 달려왔다.
얼굴을 보아하니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
‘모… 목줄까지…….’
두 사람은 줄리아를 본 뒤로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도도하기 짝이 없던 그녀가 저런 꼴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후작위와 함께 아일리 섬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그녀도 얻을 거라 생각하니 흥분을 참지 못했다.
“어휴. 일찍들 오셨네요.”
“우리 귀여운 사촌동생을 기다리게 할 수가 있나.”
“형님. 이제 다 큰 사촌동생에게 귀엽다니요. 거참. 아직도 리안이 애로 보이나.”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진하게 스파크를 튀겼다.
“자. 그럼. 의식을 진행해 볼까요?”
리안은 자신이 가진 양피지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형제가 가져온 양피지를 그 위에 올려놓는다.
번쩍!!!
그 즉시 양피지가 반응을 했고 뿜어져 나온 빛이 세 사람을 관통했다.
“윽!!”
“아!!!”
“헐~~!”
그냥 보기엔 단 1초 정도 간 일어난 일.
그런데, 세 사람은 최소한 한 시간 정도를 다른 세계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미친. 돌았네.’
그 다른 세계는 신의 세계였다.
그것도 탱글의 권역.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발… 제발… 그만… 죽여줘!!!
이미 죽은 영혼이지만, 죽여달라고 절규하는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다.
전투에서 소멸되지 않고 후방으로 온 영혼은 소실된 곳에 통증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임시로 보정을 받은 뒤 다시 전쟁에 투입된다.
소멸하거나 기간을 다 채울 때까지.
-죄송합니다. 제… 제발 소멸만은…….
아까 전 죽여 달라는 영혼은 신의 사자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애원했다.
영혼이 부상당하는 것은 육체의 부상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주듯이. 영혼의 죽음이라 불리는 소멸은 생각만으로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하…….”
세 사람은 여운으로 잠시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말로 듣는 것과 간접적이나마 체험한 것은 차원이 달랐다.
“그럼… 결과를 확인해 볼게요.”
제법 시간이 지나서야 리안은 두 사람의 양피지를 펼쳐 보았다.
“큰 형님은 포기… 그럼 둘째 형님… 도 포기네요.”
결국 예상했듯이 두 사람 모두 포기를 선택했다.
“아니. 이렇게 우애가 좋았다니. 제가 괜한 오해를 했네요.”
“큼. 그럼 후작위는 누구에게 넘길 생각이더냐.”
인내심이 별로 없는 첫째가 리안에게 물었다.
“네? 후작위라니요?”
“줄리아 데르와 함께 후작위를 넘기는 것이 아니었더냐?”
“무슨 말이에요. 제가 명예 후작위를 받은 것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인데?”
리안의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었다.
“이것 보세요.”
리안은 잉글슨 국왕에게서 받은 증서를 보여줬다.
이들은 저 남쪽 땅에서 반군이 들고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럼 줄리아 데르는?”
“데르가의 계승 전쟁에 동맹으로 참여해서 전리품으로 받아 온 건데요? 설마 하자니 이런 여자 하나 때문에 두 분 모두 후계 자격을 포기하실 줄은 몰랐어요.”
두 사람은 리안의 말에 골이 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소… 속였구나!!! 리안!!!”
흥분한 첫째가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뒤에서.
쿵!!
샤로트가 창을 갑판 바닥에 살포시 찍었다.
그러자 기세는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졌다.
“허…….”
이걸 보고 선택 전 분노 조절 장애라 부를지도 모른다.
다만, 둘째는 첫째보다 조금 나았다.
“할아버지가 이걸 지켜 보고 있을 것 같더냐?!”
“아이고~ 그러게 큰일이네요.”
이번에는 리안도 곤란하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만 속으로는.
‘공작 자리도 줄수 있지만, 아트로네 백작령 만큼은 안 되지요.’
이 멍청한 놈들에게 정통성 있는 핏줄의 땅을 주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통성은 대대로 내려온 땅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트로네 백작령만 주지 않는다면, 이들의 전통성은 리안의 후광에서 나오게 된다.
“설마… 대책이 없는 것이더냐?!!”
리안의 반응을 본 두 사람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렇다고 계약을 어기자니 방금 경험했던 것이 떠올랐다.
“휴… 일단. 두 분 진정하시고.”
“진정하게 생겼더냐.”
“정말 큰일이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라고.”
리안은 생글생글 웃었다.
“어쩔 수 없네요. 두 분께 다른 땅이라도 드리는 수밖에.”
리안의 말에 두 사람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에게 줄 땅이 어디 있다고 그러더냐!”
“곧 생길 겁니다.”
“네가 국왕에게 받은 증서를 보아하니. 권한을 행사하려면…….”
“반란은 퍼질 겁니다.”
리안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설마… 데스몬드 백작이 봉기에 호응한단 말이더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리된다면 두 형님께선 저를 물심양면 도우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가질 땅이 생기지 않겠어요?”
“당연히 그렇게 하긴 할 건데… 그게 가능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