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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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투가 끝나자 푸제흐 백작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탱글 신의 가호를 받은 데다가 직접 전투까지 한 터라 흥분했었다고 해야 하나.
‘괴물이다…….’
처음에는 누군가 참모의 조언을 받았으리라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 바로 옆에서 관찰을 했다.
‘진짜다.’
영재나 천재 따위가 아니다.
그저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가 데려온 부하들은 하나같이 뭔가 모자라 보이는 허술한 모습이었지만, 전투에서만큼은 달랐다.
백작급 영주가 데리고 있기엔 과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들의 태도는 더 충격적이었다.
완전한 수긍과 실행.
이것은 리안을 완벽하게 신뢰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번 전쟁에서 보여 준 능력을 이미 검증했다는 것이 된다.
아니. 이들의 태도로 봤을 때 더한 것들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험하다!!’
뒤늦게 리안에게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등이 따끔거리며 땀이 맺힌다.
저 싱글싱글 웃으며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이 더욱 소름 끼친다.
“마맨 백작가를 치러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데릴사위이니 후계 우선권은 푸제흐 백작 가문에 있어요.”
“그 말은…….”
“제 동생은 20살이 될 때까지 첩을 두지 않을 것이며. 이후 첩이 먼저 후계를 출산한다 해도 여전히 마맨 백작가의 계승 권한은 본처에게 있단 말이죠.”
“아……!”
이러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레온 백작가가 주가 아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겠으니 안심하라는 말이다.
“푸제흐 백작가의 방계가 탄생하는 겁니다. 사위가 방파제처럼 지켜 줄 것이니 든든하시겠습니다. 푸제흐 백작님.”
“그… 그렇게 되겠군.”
마맨 백작가를 먹더라도 레온 백작가에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말.
물론 백작이 백작에게 주종 관계를 맺지 못하니 자동으로 독립을 하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가문의 가주 신분이 리안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풀어 주겠다는 거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종속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명분상으로 푸제흐 백작가의 안전은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자. 그럼 느긋하게 갈까요~? 아참. 제 동생도 데려가야겠네요.”
명분을 위해서라도 점령하는 순간에는 새 주인이 될 리안의 동생이 함께 있는 것이 그림에 좋았다.
* * *
잉글슨 왕국의 궁전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럴 것이 리안이 벌인 짓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멍청한 마맨 놈이 전쟁에서 대패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 그렇습니다…….”
잉글슨 국왕의 목소리가 꽉 눌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나름 육지에서 확전을 벌일 명분을 쌓기 위한 회심의 계략.
“똥구멍으로 싸워도 지지 않은 전력으로?!”
“그게…….”
“레온 백작이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
“레온?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국왕이 머리를 긁적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을 말하라고 했더니 생뚱맞은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해군 대제독이 추천한…….”
“그래. 그 신센롬 제국의 황자를 이용해서 스랑 제국과 담판을 지었다는!!”
“그… 그렇습니다.”
대신은 쩔쩔매는 표정으로 긍정했다.
“아니. 그놈이 왜 거기서 나와?! 그놈 우리 편 아니었어? 외가가 아일리 섬 귀족이라며… 그… 어디더나…….”
“아트로네 백작가입니다. 전하.”
“그래! 잠깐. 그러고 보니 그 영감이 나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보다 그 애새끼는 왜 저쪽으로 붙은 거야?”
국왕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게… 본가가 레온 백작령이라고 앞서 말씀을…….”
“그건 또 어디 촌구석에 붙은 영지야?”
“저희 왕국의 영역이 아니라 브루타뉴 공국의…….”
“뭐?!”
국왕은 잠시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관자놀이을 잡았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아! 그렇다면 우리의 계략이 성공한 거 아니던가?!”
사실 승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확전을 시킬 건덕지가 필요한 것.
“그게… 가문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합니다. 병력을 데려간 것이 아니라 몇 명의 기사들만 대동한 채…….”
“아니. 그럼. 겨우 기사 몇 놈 때문에 그 마맨 백작 놈은 전쟁에서 대패를 했다고?”
국왕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자신의 왕국도 리안의 기지로 인해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것은 운이거나 바다에 한정이라 생각한 것.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해군 본부의 분석에 따르면 전쟁의 판 자체를 레온 백작이 짰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한가? 아무리 신형 배를 타고 참전했다 해도 겨우 한 척으로?”
“엄청난 참모를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국왕은 이번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능력이라면 전설에 나오는 전략가나 장군들과 비견이 될 터.
그런데, 겨우 어린 백작의 아래에 붙어 있다고?
“그렇다면 회유를 해야겠군. 마침 잘되었어. 그놈의 외할아버지가 수도에 와 있다고?”
“네. 한참이나 전부터 알현을…….”
“아니! 그런 중요한 일을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국왕은 또다시 역정을 내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하시어…….”
“하긴. 내가 그동안 좀 바빴지…….”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 바빴다. 평소에 비하면 말이다.
그것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놈의 나라에는 의회 때문에 될 것도 안 된단 말이지.’
의회에서 전쟁 자금을 승인받기 위해 한참이나 힘겨루기를 해야 했다.
사실 백성이나 의회나 모두 전쟁을 끝내길 원했다.
이미 해전을 벌인 것만으로도 나라가 휘청거리는 중이다.
더군다나 국왕 본인의 사치도 심한 편이었고.
“내 품위 유지비가 절반이나 깎였다고!”
국왕의 전쟁에 대한 의지는 완고했다.
의원들의 국왕의 의지를 꺾지 못하였고.
“일단 그 외할아버지란 노인네부터 궁으로 들이게.”
* * *
아트로네 백작은 영지를 떠나 온 지 꽤 되었다.
레온이 돌아오면 국왕을 알현해야 하는데, 그 밑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나름 돈을 싸 들고 와서 수도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보다 전하께선 왜 저러시는 걸까요?”
“이미 해전으로 인해서 많은 국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육전이라니요!”
“참. 그걸 승인한 의원들도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왕께서 하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데… 뭐. 막을 방법이 있나요.”
오늘도 귀족의 모임 구석에 앉아서 가만히 앉아 있는 아트로네 백작.
본인은 백작이고 무려 중견급 대기사이기도 했지만, 수도의 귀족들 앞에서는 그저 촌구석 영주였다.
“아트로네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름 그대의 외손자도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들었소.”
아직 리안의 활약이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저 귀족들이니 해군 쪽 인맥에게서 알음알음 전해졌을 뿐.
“제가 국제 정세에 대해 뭐 아는 것이 있겠습니까. 여기 귀족분들과 전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무시하는 듯한 질문에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자신을 낮췄다.
이들의 도움이 있어야 리안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논공행상도 없을 텐데…….’
일단 외손자 리안이 빨리 돌아와 주길 바랬다.
참고로 이들은 리안이 신센롬 제국의 사위가 되었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럴 것이 섬나라인 데다가 모든 통신과 정보 역량을 전쟁에 쏟아 내고 있었기 때문.
“아트로네 백작님!! 계십니까?!!”
그때 귀족의 모임에 왕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사무관이나 서기관도 아닌 무려 첩보장이 직접.
“아니. 오신다는 기별을 주셨더라면!!”
첩보장이 가지는 권력은 상당했다.
이곳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자동으로 기립을 해 버렸다.
첩보부서에서 하는 일은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귀족들의 반역에 대한 감시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은밀한 비밀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왕보다 오히려 첩보장을 무서워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내가 볼일이 있는 것은 아트로네 백작님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아트로네 백작에게 돌아갔다.
아트로네 백작은 얼굴이 따끔거렸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레온 백작이 신센롬 제국의 사위가 되었다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솔직히 기밀이라 할 것이 없었기에 첩보장은 모두가 있는 앞에서 말을 뱉었다.
그저 신경을 쓰지 못해 신센롬 제국의 소식까지는 잉글슨 왕국까지 전달이 되지 않은 것.
“사… 사위라니요?!!”
첩보장도 이 사실을 안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렇군요. 일단 전하께서 아트로네 백작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 그렇습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아트로네 백작이 침을 삼켰다.
“레온 백작이 마맨 백작가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합니다.”
신센롬 제국의 소식은 깜깜무소식이지만, 마맨 백작의 상황은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상황.
모든 정보 역량을 그쪽으로 쏟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아트로네 백작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모두 벙찐 얼굴을 했다.
마맨 백작가의 일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전쟁을 키우기 위해 명분 쌓기로 든든하게 지원해 줬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웬만한 백작가는 씹어먹고도 남을 것인데…….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일단 전하부터 만나 보시죠.”
그렇게 아트로네 백작은 첩보장을 따라 궁으로 떠났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갑자기 아트로네 백작의 외손자가…….”
“아!! 그래요. 손자가 레온 백작이라 했지요?”
“백작은 무슨. 주장자일 뿐인 것을.”
“어쨌든 그 전투에 끼어들 만한 일은 생길 수도 있어요. 브루타뉴의 귀족이니.”
그제야 다들 뭔가 수긍하는 눈치.
“거참.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그러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매일 칭얼거리기만 하는 자신의 손자와 비교되어도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보다 신센롬 제국의 사위라면…….”
그 말에 다들 입을 앙다물었다.
그저 소문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
만약 사실이라면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신센롬 제국을 지배하는 하브스 가문은 율 대륙 최고의 가문이기 때문.
“에이~ 소문일 겁니다. 신센롬 제국 이 황자를 데려갔으니 그런 추측성 소문이 들릴 만도 하지요.”
“그렇지요. 손이 귀한 가문이니. 그래도 대접은 잘 받고 돌아왔겠죠.”
* * *
리안이 마맨 백작령으로 군사를 몰고 이동하는 중 단 한 번의 전투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저항할 병력이 남지 않은 것이다.
물론 도주한 패잔병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공포에 질려 복귀를 하지 않았다.
“이리 와라! 사랑하는 동생아~”
행군 중에 리안의 동생이 합류했다.
“잘 놀고 있었냐?”
“네… 형님…….”
리안의 동생은 사방에 군사들이 있으니 잔뜩 주눅이 들어 보였다.
“자. 여기로 와라.”
리안은 동생을 자신의 오토호스 앞에 태웠다.
사실 귀찮았지만, 보여 주기 식이었다.
때마침 저 멀리 참관인들이 보였다.
투트트트.
리안은 거만하게 오토호스를 몰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는 얼굴은 딱히 없었지만, 옷차림으로 대충 국적을 판별할 수 있었다.
붉은 계열은 잉글슨. 푸른 계열은 스랑 제국.
“만나서 반갑습니다. 본인으로 할 것 같으면. 신센롬 제국의 부마이자. 이벨 왕국의 부마이며. 코파네 백작이자 루데악 백작령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레온 가문의 수장인 리안 레온 백작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참관인단들은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전쟁을 원하는 것은 잉글슨 왕국뿐만 아니라 스랑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스랑 제국에 알박기를 하고 있는 잉글슨 국왕의 직할지가 오래전부터 눈엣가시였기 때문.
“그… 그렇구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로…….”
“제 동생이 이번에 혼인을 하게 되어서요. 혼수를 장만하러 왔습니다. 흐흐.”
리안의 말에 모두 이번 일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곳 마맨 백작령은 브루타뉴 공국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제는 리안의 뒤에 있는 나라들이다.
“자. 그럼. 다음에들 뵙지요.”
리안은 더 이야기할 것 없이 오토호스를 몰고 쌩하니 가 버렸다.
아마 양측 나라에서 중재를 하려 할 것이다.
‘끼어들기 전에 끝내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