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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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이벨 왕국의 펠리 하브스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눈만 꿈뻑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나헬과 대항인의 단기 접전.
평소대로 적당히 싸우다 승패를 내지 못하고 둘 중 하나가 내뺄 줄 알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제법 많이 부딪혔고. 늘 그래 왔으니.
그런데…….
반짝반짝!
누나헬이 제대로 밀려 버렸고 자신의 함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형을 유지하던 오스 제국의 함대는 누나헬을 구하기 위해 진형을 깨뜨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런데… 레온 백작은 왜… 저리로…….”
“국왕 전하!!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때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제독이 국왕을 향해 고했다.
평소라면 국왕이 조금 어설픈 명령을 내려도 충실히 수행하는 허수아비 제독 같았지만, 허수아비라도 그는 일국의 제독.
“음?!”
“저 부분에서 일자진을 펼치면 적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저들은 지금 누나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릴 상대하면 누나헬은 우리 마스터인 대항인에게 당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아!! 누나헬이 무사히 빠져나가도 대항인을 막을 만한 무인이 없구나!”
포격전이 발전했다 해도 해전에서 백병전을 빼놓을 수 없다.
여전히 각국의 전함들은 대부분이 목선이었고. 하단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침몰시키는 것은 요원했다.
그러다 보니 포격전을 신나게 하다가도 결국엔 백병전으로 끝나는 해전이 꽤 많았다.
“그렇습니다. 바다에서 마스터의 존재 유무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기도 합니다.”
육전에서 마스터를 활용하는 일은 의외로 제약이 많았다.
쪽수 앞에는 장사가 없단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그런데, 좁은 곳에서 지형의 제약을 받으며 싸워야 하는 해전이라면 말이 달랐다.
쪽수로 밀어붙일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가자!!”
흥분한 이벨 왕국의 국왕은 특이한 곳으로 이동하는 고잉미샤호를 잠시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를 보좌하는 이벨 왕국의 제독은 고잉미샤호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봤다.
‘어쩔 생각이지? 설마 상대 기함을 칠 생각인가?’
* * *
고잉미샤호는 전장에서 이탈하는 듯 보였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더큰 추진력을 얻기 위한 준비운동이랄까?
“꼬맹이. 진짜로 가는 거야?”
“그럼 가짜로 가겠어요? 상대 기함만 잡아 놓으면 적들은 우왕좌왕할 거예요.”
기함이 먼저인가. 제독이 먼저인가.
일단 자신들의 제독인 누나헬을 구하긴 구해야 하는데, 기함이 명령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각 배의 함장들이 스스로 판단해 움직여야 한다.
“지금도 개판으로 보이는데?”
“흐흐. 보시면 알아요. 얼마나 더 개판이 될 수 있는지. 저들의 본업이 무엇인지 잊지는 않았겠죠?”
“아!!”
그렇다.
오스 제국 함대의 본질은? 바로 해적이다.
누나헬이라는 해적 여왕을 중심으로 뭉쳤을 뿐. 훈련이나 정규 해전은 거의 없고 약탈로 생업을 이어 나갔다.
국가에서 자금을 지원해 주기는커녕 상납을 바쳐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중심이라 위험하지 않을까?!”
“모두 무기를 들라고 하세요. 긴 밤이 될 것 같네요.”
“뭐? 밤새 싸운다고?”
“말이 그렇단 거지. 어쨌든 우리가 버텨 줘야 이벨 왕국도 잘 싸울 거고… 샤로트도… 흐흐흐.”
리안의 말에 부선장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 리안이 배 한 척을 가리킨 적이 있었다.
“설마…….”
“자!! 모두 꽉 잡아요. 전속력으로 갑니다!!”
고잉미샤호의 항로가 U자로 크게 꺾였다.
마지막으로 향한 뱃머리의 끝은 가장 밀도가 높은 적 기함이 있는 곳.
지금 적의 함대는 누나헬을 구하기 위해 ‘0’ 달걀 모양으로 퍼진 상태.
츠츠츠츠츠!!!
고잉미샤호는 그들을 향해 최고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포트 삼촌!!”
“응?!”
“가서 이지포 좀 날려 주세요.”
“으… 응!”
리안의 명령에 포트가 급히 갑판 아래 전방 포실로 내려갔다.
고잉미샤호의 전방에는 작은 구멍이 두 개가 있었는데, 바로 이지포가 배치된 포실이었다.
이지포는 포탄으로 실드 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
“마법사 양반. 떨지 말고!! 응!!”
“떠… 떨고 있지 않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손을 발발 떨고 있는 포트였다.
참고로 이지포는 마법사의 도움 없이는 발사할 수 없었다.
“거참. 계산이나 똑바로 해 주슈! 어깨 좀 피고!”
화포장 토우기슈끼 럽은 포트의 등짝을 팡팡 두들겨 주며 기합을 넣어 줬다.
“으앗!!”
통증 때문인지 포트는 등이 휘며 떨림이 조금 멈췄다.
그 순간!
“슬슬 준비하슈!”
전방에 보이는 오스 제국의 함선들이 급히 고잉미샤호를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퍼버버버벙! 촤아아아~!
주변으로 물기둥이 올라왔다.
아직 거리가 있는지라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여기. 됐습니다.”
포트가 포탄의 마법진을 활성화시켰고 그걸 받은 마포병들이 장전을 마쳤다.
“긴장은 좀 풀렸수?”
“네.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여전히 얼굴이 파리한 포트.
그러자 토우기슈끼 럽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한 발 정도는 실수해도 내가 막아 줄 테니.”
어느새 갑옷으로 갈아입은 그였다.
그의 몸에는 잔잔한 열기가 풍겼는데, 화염 속성이라 그런 듯 보였다.
“정말입니까?”
“날아오는 포탄을 터뜨려서 방향을 바꾸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지.”
“음… 들어 본 것 같긴 합니다.”
고잉미샤호의 선원들이 겁 없이 마포 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에 깔린 화포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한 발. 단 한 발 정도는 화포장이 막아 줄 거란 믿음.
시간 텀만 길다면 몇 발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온다!! 계산 해 주슈!”
“으으으… 실전은 처음인데…….”
고잉미샤호 이전에는 이지포가 없었다.
포트가 이지포의 연산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리안이 배의 선장이 된 이후이니 얼마 되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저 멀리 있던 검은 점은 빠르게 커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발사!!”
포트는 눈에 힘을 주며 소리쳤고.
터더더덩!! 풍덩!
실드에 맞은 포탄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바다에 떨어졌다.
목적을 이룬 실드는 곧장 사라지지 않고 ‘^’ 모양으로 꺾였다.
“재장전할 테니 조금만 버티슈!!”
화포장은 포병들과 빠르게 재장전을 준비했다.
여전히 고잉미샤호의 앞에 남아 있는 실드는 포트가 강제로 잡아 놓는 중이었다.
지직!! 츠측! 치지직!
포탄이 추가로 날아왔는데, 이전처럼 완전히 튕겨 내진 못하고 겨우 방향만 틀어 놓았다.
두께도 종잇장처럼 얇아져 포탄이 맞을 때마다 찢겨 나갔다.
“으으… 더는 버티기 힘들… 으어어어엇!!”
포트와 토우기슈끼 럽이 전방 포실에서 분투하는 사이, 선교에선.
“와… 기대도 안 했는데!!!”
리안은 신이 난 상태였다.
조타를 꺾어 피할까 생각을 하다가 화포장을 믿고 꿋꿋하게 전진했다.
리안에게 이제 포탄 몇 번을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많이 움직이게 되면 속도가 줄어든다.
거기다 속도가 줄어들면 회피 능력도 조금씩 줄어드니 이지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
“다들 잡으세요!!!”
리안이 전체 방송을 한 뒤 실드가 버티지 못하는 타이밍에 맞춰 함선을 틀었다.
고잉미샤호는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듯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팅~!
포탄이 고잉미샤호 정면의 굴곡에 맞아 튕겨 나갔다.
유선형으로 제작되어 공기 저항은 물론 포탄을 비껴 내는 능력도 우수했다.
팅~! 팅~!
특이한 움직임 때문인지 포탄은 너무도 쉽게 방향이 틀어지며 튕겨 나갔다.
포탄이 선체에 맞는 소리가 청명하게까지 느껴졌다.
튀룽~ 튀룽~
물고기 같은 움직임의 고잉미샤호.
본 적도 없는 기괴한 장면.
오스 제국 부제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저딴!”
타고난 조타 능력을 가진 에이스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스킬이지만, 본 적이 없을 수밖에.
목선으로는 저런 움직임을 보여 봤자 효과 따위는 없었다.
목재를 아무리 유선형으로 깎아 봐야 내구도가 목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
“젠장!!! 충돌에 대비하라. 그리고 백병전을 준비하라!”
부제독의 머릿속에 고잉미샤호의 첫 전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갤리선의 옆을 들이박아 두 동강 내 버렸던…….
그 장면은 그대로 재현되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충격!
기함의 옆을 호위하던 배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 배를 뚫고 기함에도 커다란 충격을 줬다.
배가 미친 듯이 요동쳤고 일부 승무원들은 바닥에 처박혔다.
“미친!!”
마지막에 물고기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접근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낸 것처럼 보였다.
부제독은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졌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처음 보는 형태의 철갑선에 그걸 활용하는 능력 또한 대단했다.
이벨 왕국에서 회심 차게 준비한 비장의 무기인가?
그렇다면 아무런 대비도 아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과연 저 배를 상대할 수 있을까?
“제독을 구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도 누나헬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부제도오옥!!”
누군가 그를 불렀다.
이내 정신을 차린 부제독이 고개를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어차피 이제는 백병전이다. 모두 칼을 들어라!!”
그는 자신의 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 하나도 모자랐다.
저 배에는 대전사가 다수 타고 있다.
그게 아니라도 전투원 하나하나가 정예였다.
철컥!!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을 박차고 나간 부제독의 얼굴이 벙쪘다.
자신의 배로 몰려올 거라 생각했던 적들은 어디 가고…….
끼이이익!!
고잉미샤호는 다시 움직이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뭐… 뭐야!!”
그때.
퍼버버버벙!!!
고잉미샤호가 움직이며 사방으로 포탄을 발사했다.
반면 주변에 널리고 널린 오스 제국의 함선들은 감히 마포를 쏘지 못했다.
근처에 기함이 있기 때문.
끼긱! 끼이이익!!
고잉미샤호는 자석이라도 달린 듯 기함에 몸을 붙인 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덕분에 기함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젠장!! 넘어가!! 저쪽으로 넘어가!!”
부선장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배에 탄 승무원과 주변의 배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끼기기기긱!
배와 배가 붙은 채로 움직이니 미친 듯이 요동쳤고 접근하는 배에는.
퍼버버벙!!
마포를 미친 듯이 쏴 댔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잉미샤호에 하나둘 붙을 것이고 움직임도 멈출 것이다.
“미친!! 이제 빠져나가. 꼬맹이.”
그걸 눈치챈 고잉미샤호의 부선장이 소리쳤다.
“흐흐흐. 이미 늦었어요.”
“아까 말한 긴 밤이 이거더냐?!”
“백병전이 일어나면 얼마나 버티겠어요?”
“내가 어떻게 알아. 상대가 어떤 놈들이 튀어나오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보다 지금 우리 배엔 싸울 사람이 얼마 없다고!”
간만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 부선장과 달리 리안은 실실 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버텨 봐요. 크게 한 탕 할 수 있을 테니까.”
* * *
오스 제국의 함대에는 눈에 띄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다른 배들에 비해 덩치도 컸고 색상도 달랐다.
노란색으로 눈에 잘 띄었는데…….
함대의 군자금을 관리하는 배였다.
사실 누나헬은 기함보다도 이 배를 더 소중히 여겼다.
함대를 잃어도 이 배에 실린 자금만 있다면 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눈에 띄게 만들어 놨다.
사실 오스 제국의 해군은 말이 해군이지 근본은 해적이다.
적보다 내부의 아군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샤아아아아!!
누나헬이 위기에 빠지고 함대의 진형이 ‘0’ 모양으로 길게 늘어지자 자금선은 뒤로 쳐졌다.
거기에 더해 기함이 중간에 멈추자 후방에 있던 배들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치고 나갔고 자금선 근처에는 몇 척의 배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어욧!!!”
샤로트는 조종구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주변의 승무원들은 불안한 얼굴을 했다.
“살살. 제발 살살. 샤로트!”
대부분의 해병대는 지금 샤로트가 모는 배에 탑승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