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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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한 구석에 쪼그려 앉은 소녀가 있었다.
세상을 모두 잃은 표정.
“…….”
그녀가 아니라도 다들 어색했기에 서먹서먹했는데, 그녀가 합류한 뒤로는 더욱 회색빛으로 번져 갔다.
“베리 경!!”
하다못해 흐리아 민이 샤로트를 불렀다.
쭈글쭈글하게 있던 그녀는 고개를 겨우 들었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저도 두근두근 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거든요.”
“히잉~ 도련님이 믿고 배를 주셨는데… 흐잉!!”
흐리아 민은 쭈글쭈글하게 구석에 처박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것이 부유함을 조종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조타수의 소질이라면 균형 감각, 공간 감각, 지각 능력, 마나 조율, 흐름 파악 정도인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평정심.
조타수들의 마지막이 좋은 경우가 잘 없었다.
부유선을 모는 조타수 중에 정상인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 떠돌 정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종구를 컨트롤하기 위해선 마나만 움직이면 다라고 생각하지만, 감정까지 함께 움직인다.
그게 무슨 x소리라 할지 모르겠지만, 마나, 오러, 신성력은 감정의 덩어리기 때문.
“감정이 들떴을 뿐이에요. 베리 경께선 오토호스도 튼튼한 걸 받았다고 들었어요.”
“우웅… 운전대만 잡으면 정신을 차릴 수 없는걸…….”
흐리아 민은 미소를 지었다.
“백작 각하께선 그걸 알고 맡겼을 거예요. 우리 셋 중에 부유석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것이 부유석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저… 정말 그리 생각해?!”
“네. 제가 이 배에 탄 뒤로 그분이 배를 조종하는 걸 옆에서 계속 지켜봤는걸요.”
사실 사관 학교 운항과에 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감정을 죽이는 일이다.
가혹 행위도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이 운항과였다.
-감정을 너무 죽이 않아도 돼.
다만, 리안은 그딴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율 대륙 전체가 전쟁에 휩쓸려 사관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재야의 조타수들이 튀어나오기 때문.
그들은 충동적인 대신 환상적인 조타 능력을 보였다.
“힝… 이제 조종구는 잡지 않을 거야!”
“그래도 훌륭했어요. 지켜보고 있었는걸요.”
“그래도 싫어…….”
샤로트는 눈물을 닦으며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 * *
찰싹! 찰싹!
중해의 바다는 사랑하는 여인의 손길만큼이나 평온했다.
에메랄드빛의 바다는 마치 그녀의 눈동자.
“아아. 세상은 썩었다. 찬.”
“주인님. 세상은 고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래. 그러니 너는 하인이고. 나는 귀족이겠지.”
“잔이 비었습니다. 주인님.”
“그래. 미안하구나.”
평온한 모래사장의 의자에 걸터앉은 몽키는 술을 들이켰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더군다나 이렇게 사치스럽게.
“주… 주인님!!!”
술에 취해 눈이 스르르 감기려던 찰나 하인 찬이 급히 그를 흔들었다.
그럴 것이 저 멀리서 배 두 척이 빠르게 접근했다.
“설마 이쪽으로 오는 것이던가.”
“아니겠죠. 이곳은 사유지고. 저들이 해적이라 해도 이곳에서 마을은 멉니다.”
털어 먹을 것도 딱히 없다.
이 근처에 있는 몽키의 저택도 바다에서 본다면 잘 보이지 않았다.
“신센롬 제국?!”
더군다나 깃대에 걸린 깃발은 해군력이 없는 신센롬 제국의 깃발이었다.
샤아아아~!
배는 빠르게 해안으로 접근했다.
“철갑선?!”
몽키 외 테스키가 놀란 것은 접근하는 배가 철갑선이란 점이었다.
당연한 것이 중해의 바다는 잔잔하기에 튼튼한 철갑선은 필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기동력에 제약을 받았다.
츠르르륵!!
신기한 철갑선은 공주에 뜨지 않고 모래사장에 그대로 박혔다.
정박한 것이다.
“이곳은 테스키 남작의 사유지입니다!!! 혹시 보급이 필요하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르세유 항구가 나오니 그곳에서 받기 바랍니다.”
하인이 철갑선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사실 테스키 가문은 이곳 토박이 귀족이면, 딱히 영향력도 없었다.
땅이라고 해 봐야 이곳 해안가가 전부였고. 지배하는 마을은커녕 영지민도 거의 없었다.
찰캉찰캉!
그의 말에 아랑곳 않고 꼬마가 뒤에 수행원을 덕지덕지 달고 하얀 모래사장으로 내려왔다.
꼬마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역시 풍경 하나는 지리네.”
이곳은 실제 관광지를 리모델링 한 곳이다.
유저가 이곳에 도착하면 일러스트도 제공을 하는데, 그렇다고 딱히 해택 따위는 없었다.
물론. 이점도 있었다.
혁명가 몽키 외 테스키 남작의 호감도를 올릴 수는 있었다.
사라락. 사라락.
리안이 배에서 내리자 테스키 남작이 다가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오오~! 자애와 평등의 저자 몽키 외 테스키 남작님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리안 레온 백작이라고 합니다.”
테스키 남작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누웠다.
듣지 못한 이름.
그는 이런 시골에서 홀로 유유자적 지내는 한량이지만, 세상의 일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수도에서는 그를 알아보는 인물도 꽤 있는 유명인.
그럴 것이 고대에 존재했다는 민주주의 정치를 연구하는 학자 중 최고의 권위자였다.
“휴양차 이곳에 온 것은 아닐 테고. 나를 보러 온 것인가?”
부유선에는 웬만한 것이 다 있었다.
만약 편안하게 휴양을 즐기고 싶다면, 연해에 배를 띄워 놓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굳이 이런 모래사장까지 올 이유는 없다.
“여기에 테스키 남작님께서 계신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들렸습니다.”
“숲에서 썩어 가는 나무 같은 나를 봐서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백작 나으리.”
내심 테스키 남작은 리안이 싫지 않았다.
겉모습은 어린아이였지만, 그런 어린아이가 승무원들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
보통 꼬맹이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 나무가 거대한 고목나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법이지요. 그렇게 계속 썩어 가실 겁니까?”
“희망은 때론 고문이 되기도 합니다. 나으리.”
테스키 남작은 비꼬듯 말했다.
솔직히 리안이 공작이라 했으면 조금은 더 비위를 맞췄겠지만, 백작 따위가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다.
어린 치기에 세상을 바꿔 보고 싶겠지만, 백작위로는 어림도 없다.
“그럼 이대로 신께 죄를 지으시려는 겁니까?!”
“죄라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다.”
“무지는 어찌 용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죄이지요.”
그 말에 남작은 입을 비틀었다.
“행할 능력을 주지 않은 것은 신이십니다.”
“정령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땅을 팔면 최소한의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리안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테스키 남작.
“맞습니다. 각하.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다만. 이곳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땅. 제 목숨을 바칠 수는 있지만, 이곳은 어쩔 수 없군요.”
어떠한 것을 주장한다 해도 그것은 잘해 봐야 이론이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은 지식.
리안이 말한 것은 큰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작은 것이라도 해 보란 것이었다.
찰가락!
리안이 고갯짓을 하자 모래사장에 상자 하나가 떨어졌다.
그 상자에는 돈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테스키 남작님께서 주장하는 바를 실험할 정도는 될 것입니다.”
테스키 남작은 땅에 떨어진 상자를 줍지도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도 못했다.
어정쩡한 자세에서 멈춰 섰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
“자유는 공짜로 얻을 수 없는 법이지요. 그 돈을 어찌할지는 남작님의 마음입니다. 방금 저는 돈이 든 상자를 잃어버렸거든요.”
리안은 그리 말하고는 배에 곧장 올랐다.
테스키 남작은 철갑선이 떠날 때까지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눈은 돈이 든 상자에 꽂혀 있었다.
* * *
고잉미샤호는 다시 서쪽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선원들은 리안의 사재인 거금을 버린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이는 없었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서다.
이미 선원들에게 리안은 신격화가 되어 있었다.
다만.
“꼬맹이. 드디어 미친 거냐?”
“다~ 미래를 위한 포석이에요.”
너폴레옹이 나이가 많았다면 그를 이용하겠지만, 리안의 또래였다.
단기적인 전투는 자신 있었지만, 전쟁은 경제력이다.
지금 당장 땅 한 뙈기 가지지 못했기에 뭔가를 가지려면 흔들 필요가 있었다.
“어련하시겠지. 이제 곧장 해적 섬으로 가는 거냐?”
“그러면 섭하죠. 저도 이제 하브스가의 일원이 되었으니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 곧 이벨 왕국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중해는 호수와 같은 바다이며,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좁은 해협을 지나쳐야 한다.
그 관무의 주인은 율 대륙의 변방인 이벨 왕국.
“갑자기 우리가 이렇게 거물이 될 줄은 몰랐군.”
“착각하지 마세요. 힘없이 남의 이름을 빌려 봤자 삼류밖에 안 되니.”
리안은 느긋하게 의자에 누웠다.
당연히 조타는 발을 이용했다.
Trrrrr~
그때 파수대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다들 중해를 빠져나가는 해협에 도착한 줄 알았지만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선장~ 뭔가… 해협에서 치고받고 싸우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던 리안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것이 무역의 중심지는 여전히 중해였지만, 세상은 점점 검은 대륙이나 신대륙으로 쏠리고 있었다.
“중해의 여왕인가 보네.”
게임 초기부터 오스 제국의 1함대와 이벨 왕궁이 사사롭게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대체로 크게 싸우지는 않고 서로 간을 봤다.
“기다렸다 가는 건 어때? 괜히 끼어 봤자 손해만 볼 것 같은데.”
“에이~ 이런 기회는 날마다 오른 게 아니라구요.”
어차피 오스 대제국과는 서로 강을 건넌 사이다.
“신센롬 제국의 깃발을 올리세요. 우리는 신센롬 제국의 해군입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되죠. 흐흐.”
* * *
이벨 왕국의 함대와 오스 제국의 1함대는 서로 신경전 중이었다.
웃긴 것이 해협의 남쪽은 오스 제국의 영향권이었고 북쪽은 이벨 왕국의 영향권이었다.
날이 좋다면 남쪽과 북쪽 땅이 훤히 보일 정도.
“하하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전하!!”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오스 제국의 해군 중 가장 영향력이 큰 해적왕이었다.
오스 제국은 해군에 딱히 예산을 투입하진 않았고. 다른 나라를 약탈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했다.
사실 오스 제국의 해군=해적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누나헬 경! 이번은 도가 지나쳤다. 이 해협을 지나는 모든 배는 통행료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을 잊었나 보구나.”
“이벨 왕국의 전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겁니다.”
그 말에 이벨 왕국의 국왕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사실 그들의 전력은 충분히 오스 제국의 1함대를 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상처뿐인 승리.
이긴다 해도 남는 것이 없었다.
제해권을 가져 봐야 남쪽 검은 대륙으로 진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교도이며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더군다나 함대를 계속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들은 소규모 편대로 계속 게릴라를 할 것이니 유지비만 계속 소모될 터.
“우리가 그대를 공격하지 못할 거라 보는가?!”
“하하하. 똥배짱이 심하십니다. 전하. 그냥 갈 길 가시죠.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놓고 약탈질을 하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그냥 적당히 못 본 척하시죠. 그러면 증거 따위는 남기지 않고 뼈까지 발라 먹겠습니다.”
오스 제국의 1함대 사이에 상선 세 척이 갇혀 있었다.
만약 이벨 왕국의 함대가 떠난다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이를 좌시한다면, 이 협곡을 관리자인 우리 이벨 왕국의 신용이 바닥까지 떨어질 터. 그럴 수는 없다.”
“그럼 덤벼 보시지요. 하하하. 요즘 신대륙 사업이 주춤하다고 들었는데.”
땅의 크기로 보나 보유한 돈으로 보나 이미 제국을 선포해도 될 정도의 위상을 가진 왕국이 바로 이벨이었다.
다만, 그 땅이 대부분 신대륙 남쪽이란 것.
본토가 율 대륙 서쪽 끝에 붙어 있는지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점.
그나마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 중해를 빠져나가는 입구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닥쳐라!! 내 오늘 우리 이벨 왕국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대를 수장시키리.”
“그렇게 해 보시죠. 전하~”
끝까지 히죽거리는 중해의 해적 여왕.
그런데. 그녀의 부관이 보고를 해 왔다.
“동쪽에서 두 척의 함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그럼 세 척만 보내서 잡아 와. 인질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