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081
추기경이 반응을 너무 잘해 줘서 막 지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미 기자들 앞에서 벌어진 일이고. 나중에 짝퉁임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자존심 때문이라도 가짜라 밝히지 못한다.
-이건 특종이야.
-율 대륙 전체가 들썩이겠군.
-3차 성전이 일어나는 걸까?
기자들은 동요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백작 각하!!
“저도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우연히 이교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라. 다만, 고문에서 가리키는 것과 목걸이의 문양이 일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거기서 악명 높은 이교도 해적 선장이 있더군요. 이미 목이 잘렸지만…….”
답을 알 수 없는 x가 있을 때. 누군가 x값을 알려 준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미지의 x값에 그 답을 넣고 보니 확실해진 것이다. 다른 값은 존재할 수 없다.
롱기루스의 창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구한 학자들은 문양만 본다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그게 사실이라면. 진정 레온 백작님은 율 대륙을 구하신 영웅입니다.
적에게 핵무기가 있는데, 스위치는 아군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리안은 그들에게서 핵무기 스위치를 가져온 셈이다.
물론 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꽝임을.
“고대 문서들에 존재하는 롱기루스의 창이 실재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율 대륙을 사랑하는 귀족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제 교황청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오스 제국은 교황청에서 목걸이를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율 대륙의 국가에서는 교황청을 주시할 것이다.
“제가 어린 나이에 여러 일을 겪는 바람에 기력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이럴 땐 이런 어린 몸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리안은 충분히 독을 풀었으니 기자들과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갈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를 오래 할수록 약점만 노출될 뿐.
-저희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원래라면 이렇게 쉽게 물러날 기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도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이미 기삿거리가 많았기에 이걸 정리해 자신들의 신문사가 있는 본국으로 정보를 넘겨야 한다.
여기서 자질한 것을 알아봐야 핵심만 흐려질 뿐이었다.
롱기루스의 창이 보관된 피라미드 안 비밀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되다!
이 타이틀이라면 역대급 신문 판매 부수가 나올 것이다.
우르르르.
기자들은 질세라 벌 떼같이 고잉미샤호에서 내렸다.
서로 다른 나라가 대부분이었지만, 큰 국가에선 경쟁사들도 있었다.
“레온 백작 각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기자들이 내리고 나니 남은 것은 노예 대표단.
그중에서도 신분이 가장 높아 보이는 자가 리안에게 말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저희는 평생 백작 각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낯이 익다 싶었는데, 튀니스에서 그 노인 귀족을 부축하던 청년이었다.
“아! 이교도 선장을 처형했던 남작님을 옆에서 부축하던…….”
“맞습니다. 그분은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나오 누리 남작입니다.”
그 노인이 남작이었는데, 아들도 남작이란 말은.
“그분은…….”
“여기까지 오는 길에 그만…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 말에 리안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레온 백작님 덕분에 웃으면서 떠나셨습니다.”
딸아이의 복수를 하게 되었고. 노예에서 벗어났다.
그것만으로도 죽어 여한이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나오 누리?! 아!!!’
기억이 났다. 나오 누리.
오스 제국의 첩보부를 장악한 장관.
원래는 율 대륙 출신이었으나 노예로 잡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세한 인물.
누이의 복수를 위해 배교했다고 했는데…….
그 복수를 갚았으니 이제 배교할 일은 없을 거다.
“저희가 은혜를 갚을 능력은 없지만, 이것을 바칩니다.”
그가 리안에게 바친 것은 종이들을 엮은 부실한 책자였다.
뭔가 고대의 비밀이 감춰진 건가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새것이었다.
“이건 뭔가요?”
“평생 백작 각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는 저희의 이름과 소재가 적혀 있습니다.”
책자를 열어보니 노예들의 소재지에 율 지역 방방곡곡이 적혀 있었다.
이상했다.
그럴 것이 이들은 율 대륙 남쪽 그러니까 중해 연안에서 이교도 해적들에게 노예로 붙잡힌 자들이다.
고향이 율 대륙 곳곳에 퍼져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어쩌다 율 대륙 각지의 사람들이 노예로 붙잡힌 것인지.”
“진짜 고향이 아닙니다. 고향이 파괴된 자들도 있고. 고향이 악몽 그 자체가 된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긴. 트라우마가 되어 중해 근처에서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거기다가 대부분이 평민이나 농노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가 봐야 그곳 귀족에게 다시 착취나 당하겠지.
“교황청에서 통행증과 신분 확인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네. 율 대륙에서 가장 신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 교황청이니까요.”
애초에 행정력이 형편없는 지방 같은 경우 호구 조사 자체를 교회에 의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귀족의 경우도 가계도를 교회에 외주를 줬다.
일종의 족보.
이 때문에 영지전이 일어나거나 명분을 쌓을 때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뒷돈을 찔러 주고 몇 대의 몇 대 전에 우리 조상이 적 영지의 주인이었다. 이런 식.
교회에서 신분을 증명해 준다면, 농노도 평민이 되고 상인도 될 수 있다.
교황청에서 발급한 신분증으로 율 대륙 어디든 갈 수 있다.
1등급 여권인 셈이다.
“그런데, 이름 앞에 ‘리’가 붙은 이유가…….”
이게 가장 이상했다.
방금 남자는 자신을 나오 누리로 소개했다.
그런데, 책자에는 리 나오 누리라 적혀 있다.
“이름 앞에 ‘리’를 붙이는 것은 암구호입니다. 저희는 어디에서 정착을 하든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 앞에 ‘리’를 붙일 것입니다.”
리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할 것까지는 없었다.
가끔 평민들 사이에서도 별칭을 자신의 이름에 붙이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성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인다.
그런데, 별칭은 왜 이런 걸까?
“리안 레온 백작 각하의 은혜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입니다. 저희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시겠지만, 혹시라도 어딘가 가셔서 정보를 얻고자 하신다면, 저희를 찾아와 주십시오.”
순간 리안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나오 누리 남작이 어떤 방법으로 노예에서 오스 제국의 첩보장의 자리까지 올랐는지 디테일하게 알 수 없었다.
게임 외적인 부분이며, 유저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등급뿐이니까.
이제 와서 보니 율 대륙의 노예 네트워크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방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은혜를 갚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부담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본업을 하며 평생 한 번이라도 백작 각하께 도움이 되길 바랄 테니까요.”
실제로 그리 큰 부담은 아닐 것이다.
일단 정착 비용은 이미 리안이 충분히 줬다.
거기에 신분패까지 교황청에서 새로 발급해 주니 율 대륙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오… 아니 리 나오 누리 남작님.”
“원하신다면 주기적으로 정보를 취합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리나오 누리 남작은 리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첩보 관련 능력치 S.
어쩌다 보니 그냥 호박도 아니고 황금 호박이 굴러들어 온 것이다.
“비용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세요.”
이왕 이리 된 김에 자금 지원도 해 주자.
“비용을 더 투자해도 당장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고객을 따로 두고 정보를 거래하는 정보 길드가 아니라 생업을 하며 그곳의 분위기 정도만 파악해 취합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지라.”
“그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그저 먼 거리라 신경 쓰지 못하는 곳의 소문만이라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요.”
리안의 말에 나오 누리 남작은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뜻을 알아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작은 정보들로 큰 정보를 추측해 내는 것.
민심을 잃고 그것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
이런 것들이 모이면 크나큰 무기가 될 것이란 것.
‘역시 평범한 분이 아니다.’
나오 누리 남작은 드디어 자신이 구상하는 것을 바칠 주군을 만난 것 같았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무릎은 꿇지 않겠습니다. 백작 각하.”
그는 항구에 몰려 있는 인파와 높은 건물 속에서 은밀히 주시 중인 교황청 인물들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첩보에 관련해 왜 S급인지 알 것 같았다.
하긴. 이런 눈치가 없으면 노예에서 대제국의 첩보장까지 가지 못했겠지.
“여기가 정리된다면 아일리 섬으로 찾아오세요. 제 영지는 아직 혼란해서.”
일단 그곳에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해야 하니.
“소질이 있는 인원들을 모아 가겠습니다.”
인재를 뽑고 운영하는 것도 관여할 필요 없다.
첩보 등급 S라면, 믿을 수 있다.
“그럼. 다시 뵙는 날까지. 주군께 행운이 깃들길 신께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네. 누리 남작님께도 행운이 있기를.”
그렇게 노예 대표단도 배에서 내렸다.
외부 사람이 모두 갔음에도, 리안이 한 발자국도 배에서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항구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렇게 인파들이 모여 있으니 잡상인들도 모여들었고. 당연히 술도 풀리기 시작했다.
“보기 좋네.”
리안은 군중을 둘러보고는 흐리아 민과 샤로트를 불렀다.
“우리에게 배가 두 척 생겼어.”
“오옷!! 당연히 한 척은 제가 몰고 가는 건가요?”
해적단의 규모를 늘릴 생각은 없었다.
해적 섬에 들러서 해적들을 고용한 뒤 아일리 섬으로 가기 위해서 배 두 척을 가진 것이다.
“자신 있어? 샤로트?”
“할 수 있어요. 도련님. 맡겨만 주세요.”
배가 바다로 처박히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샤로트는 무려 2차 각성한 대전사다.
‘한 척은 없다 생각해야겠네.’
리안은 선원들을 시켜 샤로트가 몰고 나갈 배에 있는 비싼 약탈품을 흐리아 민이 몰 배에 옮기도록 지시했다.
살짝 불안한 것은 사실이니.
* * *
아펜니노 반도의 서남쪽 바다.
그곳은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바다는 나무 조각들이 둥둥 떠다녔고. 상어들이 출몰했다.
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아아. 신이시여…….”
함대를 통솔하는 추기경은 하늘을 보며 통탄했다.
짧은 시간에 벌어진 해전이었지만, 무려 다섯 척의 군함이 침몰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베넷 조합이 적극적으로 해전에 임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이렇게 끝난 것은 신께서 도우셨습니다.”
웃긴 것은 오스 대제국과 베넷 조합의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적절한 선에서 서로 물러났고. 이 정도면 충분히 명예로운 해전이었다.
“샴 추기경님. 무사하셨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신께서 도우셨습니다.”
베넷 조합의 제독이 추기경이 있는 배에 올라서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그대들도 잘 싸워 주었소. 내 교황청으로 돌아가거든 그대들의 용맹을 널리 알리겠소.”
“아닙니다. 저희 베넷 조합이 비록 이교도들과 거래를 하지만, 그들이 이곳 바다까지 넘보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지요.”
샴 추기경은 속으로 베넷 조합 제독을 향해 욕을 날렸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대들은 어쩐 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오.”
“그것이… 의뢰를 받았습니다.”
“의뢰요? 이런 대규모 함대를 조직할 만큼 큰 의뢰가 있단 말이오?”
베넷 조합 제독은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내 리안과 있었던 거래를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괜히 정보를 통제하다 오해만 생길지 모르니.
“그런…….”
샴 추기경은 등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럴 것이 이렇게 된 것이 리안이 그린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뭔가 있다!! 그놈은 악마야!’
리안은 교황청으로 향했다.
더 이상 리안이 활개를 치게 둘 수는 없다.
가뜩이나 교황청의 권리가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는데, 리안은 그걸 가속화시킬 인물이다.
‘순교하는 한이 있어도 죽여야 한다.’
샴 추기경은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기로 했다.
교황청에선 리안을 죽인 죄를 샴에게 물으면 된다.
그만큼 리안이 두려운 샴 추기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