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신센롬 제국의 수도가 있는 트리아 왕국의 궁전.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신센롬 제국의 여제 테레지아.
"황제이시여. 네르데르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딱히 황제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신센롬 제국의 황제는 그의 남편 포로치였지만, 실질 통치자는 트리아 왕국의 여왕이기도 한 그녀였다.
"음? 네르데르에서? 이벨 왕국에선 별말이 없었는데……."
딱히 네르데르에 관심이 없는 여제였다.
그저 자신의 사촌인 이벨 왕국 국왕이 관심을 보이는 땅이니까.
네르데르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필히 이벨 왕국이 끼어 있다고 보면 되었다.
"그게. 이 황자님께서 나타나셨답니다!!"
"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녀는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에 배를 올리는 걸 봐선 임신을 한 듯 보였다.
"레오폴트가 나타났다니… 죽지 않고 돌아와 주는 것만 해도 신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다고 합니까?!"
그녀의 유려한 얼굴선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 떨어진다.
전쟁 준비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잉글슨 왕국에서 이전에 언질을 받긴 했지만, 중해가 아니라 북해로 올 줄은 몰랐다.
"네르데르 공화국에서 이틀 전에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복잡한 루트가 아니라 그저 네르데르의 장거리 통신을 빌리면 될 일.
"네르데르에 파견된 공사가 비밀 유지를 위해 신경을 많이 쓴것 같습니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국가간 거리 정도의 장거리 통신은 개인이나 비밀 단체가 운용할 수 없다.
그만큼 비싸고 복잡했다.
리안이 통신선을 나포한 걸로 해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었던 이유였다.
네르데르에 파견된 공사는 굳이 첩보 루트를 통해 서신을 전달해 온 것이다.
그래서 소식이 늦을 수밖에.
"그래. 뭐라 적혀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보겠어요. 이리로……."
편지를 펼친 테레지아는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내용은.
[친애하는 나의 주군이자 신센롬 제국의…(중략)… 겨울에…(중략)… 차남이신…….]
하도 미사여구와 인사가 길어서 몇 번이나 건너뛰고야 본론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밀서가 중간중간 단타 통신 마법을 써야 해서 축약을 했음에도 저리 구구절절 적힌 걸 보니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모양이다.
네르데르는 공화국이 신센롬 제국에게 중요한 곳이 아니니 아마도 좌천되었다 느끼는 것이겠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르데르에 파견된 공사 따위는 안중에 없는 테레지아.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어미의 군대를 눈으로 보고 싶어 한 거지? 무엇이 불안하기에……."
신센롬 제국은 30년 동안 전쟁을 한 나라다.
그 전재엥 별별 나라가 다 끼어들었고.
그 중심에 있었던 만큼 육군의 전력은 나쁘지 않다.
"내 사랑스러운 둘째의 부탁이니 들어주지 못할 것이 없다!"
마음이 동한 테레지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오나. 폐하! 봄이 되면 출정을 해야 합니다. 병사들을 조금 더 쉬게 하는 것이. 더군다나 아직 편제는커녕 징집도 다 되지 않았습니다."
테레지아는 재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특유의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재상을 압도한다.
"조금 더 일찍 모일 뿐인 겁니다."
그리고는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어차피 훈련도 해야 하니.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즉시 총동원을 내리고 정예들은 먼저 보내 사열을 준비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여황 폐하."
* * *
고잉미샤호는 밤이면 움직이고, 낮이면 산골 같은 그늘진 곳에 숨어서 쉬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이 트자.
고잉미샤호는 구석진 곳에 가서 운항을 멈췄다.
"끄아아아아!!!"
일반 선원들이야 낮이 되어도 팔팔하다만, 선교의 두 사람은 눈이 뻘겋게 변해 있었다.
"진짜 못 해 먹겠군."
"항법사 아저씨. 고지가 눈앞이에요. 좀만 힘내라구요."
리안이 파이팅을 외쳤다.
항법사는 내비게이션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랜 시간 해도만 보고 살던 그가. 지도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익숙한 지도도 아니고. 스랑 제국에서 책으로 만든 복잡한 군사 지도였다.
정확한 부분도 있고. 엉성한 부분도 많았다.
-이 길이 아닌가벼.
리안이 고인물이라 해도 맵 전체를 다 외우고 다닐 순 없었다.
대략적인 방향 정도와 주요 장소 정도.
-항법사 아저씨. 좀 잘 찾아봐요!
-아니. 지도라고 해서 정확한 건 아니라고. 내 잘못이 아니야.
생각보다 헤매었지만, 나름 어찌어찌 잘 찾아가고는 있는 중이었다.
가끔 민가가 나오긴 했지만, 그렇게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가서 물 좀 얻어 오세요.
-네에?! 이 밤에. 약탈입니까?
-이곳은 신센롬 제국 안입니다. 그냥 돈을 주고 사 오세요.
-아쉽군요.
보안에 대해서는 딱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저들의 목격담이 전해지기 전에 고잉미샤호가 먼저 도착할테니.
그래도 약탈을 금지시킨 것은 나중의 소문을 미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도련님!!!"
선교로 어린 꼬마 하나가 들어왔다.
리안도 꼬마지만 훨씬 어려 보이는.
베지미르의 동생 베츠였다.
"어… 그래. 귀여운 우리 의사 꿈나무."
"연금 약사가 될 거라니까요. 도련님."
"겸사겸사 의사도 하면 좋지.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약초 채집을 했으면 해서요. 이곳 환경을 보니 얻을 수 있는게 많을 것 같아요."
종종 저렇게 아침이 되면 찾아와서 허락을 구하고는 했다.
물론 약초 채집은 그의 형인 베지미르가 했지만.
그러고 보면 미래의 독왕 베지미르도 참 착한 녀석이다.
어린 동생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투덜거리면서도 다 들어주는 것을 보면.
"대신 정오가 되면 돌아와. 오늘부터는 낮에 움직일 테니."
"네에에!! 감사합니다. 도련님."
베츠가 베지미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리안의 말에 항법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애송이! 낮이라니. 그동안 낮에 잘 다녔잖아."
"흐흐. 슐 지역까지는 이제 반나절도 안 걸려요."
"그러니까! 설마 슐 지역을 벌건 대낮에 돌아다니겠다고?!"
리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총질 안 한 지 좀 됐다고 했잖아요. 밤에 쏘면 맞나요? 낮에 쏴야지."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슐 지역 주민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밤에 투다닥 하고. 도망가면 결국 소문밖에 남지 않을 거다.
백날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적당히 보여 줘야지.
"항법사 아저씨도 얼른 눈 붙혀요. 오후가 되면 출발할 겁니다."
리안은 그 말을 하더니 선장석에 앉았다. 그리고 이내.
크.
르.
르.
릉.
~
"꼬맹이. 일어나. 깨워 달라고 했다며?!"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흠냐. 흠냐. 국밥에 소오주 먹고 싶다아아~"
리안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잠꼬대를 했다.
"으휴. 내가 보모냐. 어쩌다 어린아이 잠까지 깨워야 하다니."
"언제는 주군이라더니~"
"뭐야? 언제 깼어?"
"좀 씻고 다녀요. 부선장 아저씨 몸에서 국밥 냄새가 나네. 하음~"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태양이 정수리를 쪼는 정오다.
몇 시간 자지 못했더니 몸이 영 찌뿌둥했다.
"아저씨. 항법사 아저씨. 일어나요."
이번에는 리안이 항법사를 깨웠다.
"흐아아암~ 슈라인학센에~~ 맥주우우~"
항법사도 잠꼬대를 심하게 했다.
요 며칠 강행군으로 고생을 많이 하긴 했다.
참고로 슈라인학센은 게르 왕국 연합에서 주로 먹는 족발 요리였다.
네르데르 공화국에서 맛있게 먹은 모양.
"부선장 아저씨."
"갑자기 난 왜 불러?"
"손 좀 줘 봐요."
"응? 자 여기 있다. 갑자기 손은… 으아악!!"
리안은 부선장의 손을 항법사의 입에 가져댄 것이다.
결국 깨물렸고.
리안은 고소하다는 듯.
"그러니까 좀 씻고 다니라니까."
"해적은 원래 잘 안 씻어. 귀한 물을 씻는 데 쓰면 어떻게 하냐."
"그건 옛날이고. 고양미샤호는 최신식이라구요. 샤워실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
특히나 바다에서는 물을 끌어들이고. 엔진 열을 식히면서 수증기로 정제수를 만들어 저장까지 한다.
부산물로는 소금도 소량 얻을 수 있고.
'어떤 건 내가 살던 세계보다 낫다니까.'
그러니 물이 무자랄망정 떨어질 일은 없다.
아니 남아돌았다.
이놈의 해적들이 얼마나 안 씻는지.
오히려 육지를 이동할 때 물이 더 모자랐다.
엔진을 식히는 데 물이 들어가다 보니 육지를 다니는 부유선은 필히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습격은… 오늘 오후가 적당하겠네.'
* * *
북부 게르 왕국 연합 지역과 닿아 있는 곳 슐 지역의 국경선.
그곳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은 따스한 햇볕을 쬐며 나른하게 있었다.
이따금씩.
두르르르르~
목재로 된 부유선들이 관문을 통과할 때 잠깐 내려가 검문을하면 그만이다.
슐 지역은 율 대륙의 동북 최대 공업 지역.
질 좋은 철과 마석이 나는 풍요로운 곳이다.
"또 전쟁이 터지겠지?"
"그렇지. 얼마 전 국왕께서 직접 대병력을 끌고 지나가셨잖아."
아마도 작살 왕국을 습격할 것이다.
보급로와 신센롬 제국과 전쟁을 할 때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다.
"우리야. 무슨 걱정이야. 어차피 요새나 적당히 지키면 되는 데."
"전쟁에 끌려간 놈들이나 불쌍하지."
"불쌍하긴 개뿔. 우린 평생 여기서 썩다가 전역해야 한다고. 차라리 전쟁터에 가면 전리품이라도 얻지. 여기선 쥐꼬리만 한 월급이나 받으……."
"한스! 저거… 저거……."
갑자기 요새 위를 지키던 병사 하나가 말을 끊었다.
"뭐야? 왜 호들갑이야?"
그들의 눈에 나타난 것은 조금 특이하게 생긴 부유함이었다.
우아한 유선형 선체에 철갑으로 두른 최신형.
상선으로 쓰기엔 아까운, 아니 쓸 수 없는 고급형이다.
"뭐야. 이게……."
"신센롬 제국?"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국경을 맞닿고 있는 게르 왕국 연합도 신센롬 제국의 제후국이니까.
물론 30년 전쟁으로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다만…….
"그놈들이 여길 지날 때 신센롬 제국 깃발이 아니라 게르 왕국 연합 깃발을 사용한다고!"
이제 이곳 슐 지역은 로이센 왕국이 점유 중이다.
무역은 해야 되니 간 크게 신센롬 제국 깃발을 걸고 오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 아래의 부깃발도 생소한 문양.
"서… 설마. 처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저렇게 느긋하게? 따로 병력이 붙은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부유선이 요새를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미친짓이다.
아니 공성전 자체에 부유선을 투입하는 짓 자체가 가성비에 맞지 않다.
"일단 알리자!!"
땡~ 땡~ 땡~
급히 타종을 시작했고. 요새를 지키는 지휘관이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뭐야… 하음~"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보였다.
겨울답지 않게 날이 따뜻한 것이 간만에 늦잠을 잔 것이다.
"이상하게 생긴 부유함이 접근하고 있답니다."
"선이 아니라 함?"
"모양으로 봤을 때 군함으로 보입니다."
상선들은 적재를 가장 중요시하기에 모양이 조금 달랐다.
물론 전쟁이 발발하면, 상선들도 징발되어 싸워야 할 때가 있긴 있다.
오래전 잉글슨 왕국에서 이벨 왕국과 전쟁 때 그런 식으로 상선들을 활용했었다.
"흐음. 좋아. 가 보지."
요새의 사령관은 뒤뚱뒤뚱 계단을 올랐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오를까 말까 한 성벽 계단이었다.
"후~! 뭐… 뭐야 저건?!!"
이미 고잉미샤호라고 적힌 정체불명의 부유함은 함선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아주 천천히 그것도 여유롭게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
목적을 도무지 알 수 없는.
"흠… 외교선인가?"
사령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저런 최신형의 군함이 적지인 이곳에 당당하게 올 정도면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사령관은 한 가지 사실을 잊었다.
만약 사신이라면, 하얀 깃발을 함께 달고 있어야 했다.
"흠. 일단 만나 봐야겠군."
고잉미샤호가 요새의 거대한 성문 앞에 섰다.
부유선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덜컹! 끼릭끼릭!
고잉미샤호가 낮은 언덕을 올라 관문 요새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선 채로 서서히 옆으로 몸을 틀기 시작한다.
그걸 본 요새 사령관의 사고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뭐… 뭐야!!"
있을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의외로 많았다.
특히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훈련이 안 된 경우다.
스그그극!
고잉미샤호의 포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마포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마치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퍼버버버버벙!
(아아아안녕~!)
마포가 불을 뿜었다.
콰과과과광!!!
폭발로 온 사방이 터져 나갔다.
양쪽에서 파편이 튀고 난리가 났음에도 여전히 요새 사령관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57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