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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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꼬맹이가 백작위를 계승했다면, 자신과 급이 다르다.
그래서 ‘백작 각하’라는 호칭을 붙여서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했다.
‘리안 이 녀석의 입김이 작용하면, 형에게 후계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라!’
할아버지와 동급.
그 말은 충분히 자신의 계승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다.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은 일찍 죽고 남은 경쟁자라고는 오직 자신의 형뿐.
“무슨 사촌끼리 장난을 친 걸로 그리 딱딱하게 나와요. 흐흐. 그리고 저 아직
백작 아닌데에~?”
“어··· 어?! 그래? 그래도··· 미안하다.”
다행히 백작 작위는 계승 받지 못한 모양.
그래도 결코 리안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이미 공간을 장악한 중견급 대기사만 셋.
그뿐인가. 어느새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일반 병사(?)들.
하나같이 정예 중에서 정예다.
이 정도를 부하로 둔 자라면, 백작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아니에요. 사촌 형제끼리 장난치는 걸 제 시녀! 가 조금 과하게 반응했는걸
요. 제 시녀! 가 말이죠. 설마 대기사인 형님이 그 정도도 못 받아 내실 줄은
몰랐을 거예요. 샤로트, 형님께 다시 사과드려.”
리안이 살살 웃으며 하는 말에.
“죄송합니다. 둘째 도련님.”
샤로트는 이제 무릎을 꿇지 않았다.
허리는 꼿꼿이 세워져 있었고 어깨도 활짝 폈다.
그저 고개만 살짝 숙였다.
“아··· 아니다. 샤로트··· 하하. 많이 건강해졌구나.”
“키는 여전히 둘째 도련님께서 더 크신걸요. 헤헤헤.”
오히려 여유롭게 웃음을 띠며 평소의 모습을 보였다.
평소의 모습이다.
샤로트에게 저들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 따위가 아니었다.
“어휴. 형님 그만 일어나세요. 대기사가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는.”
리안은 가이스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너무 세게 잡았나?
“으아아악!!”
샤로트에게 팔이 꺾인 자리였다.
“으앗. 죄송해요.”
“아니다. 괜찮다.”
이성을 차리고 나니 나름 기사다운 면모를 보였다.
대기사가 마음을 먹으면 통증은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누님~! 세이나 누님! 여기 중상자요. 대기사인 형님이 이렇게나 아파하다니!!”
리안은 뒤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가이스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격통에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가요? 하긴. 대기사가 겨우 관절이 꺾인 걸로 난리를 쳤을 리가 없긴 한
데··· 응······?”
전쟁의 신 주교 세이나가 리안의 호출에 급히 응급 처치에 나섰지만.
“미안합니다. 공자님. 제 실력으로는 관절이 돌아간 걸 조치하는 것 이외에는
잘못된 곳을 찾을 수가 없네요.”
“흠··· 엄살이나 의지박약이 아니고서야 대기사인 형님이 겨우 관절이 돌아간
걸로 그리 난리를 칠 분이 아닌데······.”
가이스는 둘의 대화에 등에서 식은땀이 소나기처럼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주 대놓고 쌍으로 놀려 댔다.
***
그 소식은 아트로네 백작에게까지 전해졌다.
“백작님. 부유 부두에서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응? 그사이에?”
“그게··· 사고가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가기 위해 채비를 하던 아트로네 백작은 코트에 팔을 하나만 넣은 채 멈췄다.
사고가 생길 일이 뭐가 있단 말이던가.
오히려 리안은 사고를 너무 안 쳐서 문제였다.
무를 숭상하는 아트로네 백작가에서 그리도 순둥순둥한 아이가 태어날 줄
은······.
차라리 외손자가 망나니처럼 사고나 치고 다녔다면 박수를 쳤을 거다.
지금 남은 핏줄이라고는 식민지의 전쟁에서 모두 죽고 달랑 손자 두 명만이
남질 않았던가.
그 남은 두 손자도 영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 무슨 사고라던가.”
“그게 둘째 도련님과 부두에서 만났는데··· 리안 도련님의 시녀에게 관절이
꺾였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둘째 손자라 해도 대전사다.
어디 가서 그리 쉽게 관절이 꺾일 일이······.
“시녀?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게··· 샤로트 베리라고. 어릴 때 붙여 준······.”
“아. 기억나는군. 재무부에서 일하던 베리 남작의 딸이지 않은가.”
“네······.”
“그 아이의 나이라 해 봐야 리안과 몇 살 차이 나질 않을 텐데··· 그 아이에
게 둘째가 팔이 꺾였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기사 단장이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닐 테고.
“그게··· 그사이에 각성을 한 모양입니다. 거기다가 정령 갑옷과 계약을······.”
“그 나이에 각성이라고?”
“그리고 리안 도련님의 부하들 중 2차 각성자만 총 셋으로 파악된답니다. 그
외에······.”
백작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일리 섬의 강자인 자신도 2차 각성을 한 대기사는 총 둘뿐이지 않은가.
두 개의 기사단의 단장들.
자신까지 포함해야 겨우 셋이다.
물론 자신은 3차 각성을 마친 완숙의 대기사였지만.
“정말로 잉글슨 왕국이 개입한 것인가······?”
***
리안은 고잉미샤호를 부두에 두고 몇 명의 부하만 호위로 대동한 채 아트로네
백작령의 궁전으로 향했다.
투둑! 투둑! 투둑!
마차는 승차감이 더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유석은 매우 다루기 힘든 물질이었고.
아무리 작은 부유석이라 할지라도 거대한 마법 장치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 소형화된 탈것은 부유석을 쓰기 힘들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말의 영혼으로 에고를 사용하는 오토호스와 달리. 마차는
그럴 수도 없었다.
몸집이 달랐기에 에고가 에러를 일으켰다.
그래서 오토마차는 몸체를 띄우는 데만, 부유석을 사용하고 힘을 비틀어 수평
으로 이동하는 기능은 없었다.
투각! 투각!
이동은 두 마리(?)의 오토호스가 끌었다.
참고로 부유석은 땅의 지형에 따라 일정하게 공중으로 뜬다.
노면이 거치면 당연히 승차감이 더러울 수밖에.
“형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슨 근심이라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안 이놈! 그걸 말이라고······.’
“하하하. 아니다. 그저 내가 아까 전 너무 잘못했다 싶어서······.”
8인승 마차 안에서 자신의 편이라고는 하급 대기사 파울로 한 명이 전부.
그에 반해 나머지는 리안과 관련된 자들이었다.
부선장, 샤로트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탑승한 전쟁 신의 사제 세이나.
그 외에 얼빵해 보이는 마법사 하나와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
년 한 명?
“아이고. 형님도 참. 아까 전 일은 다 잊었습니다. 흐흐흐.”
“그··· 그래.”
가이스 아트로네는 리안의 부하들에게 완전히 기가 죽어 버렸다.
대기사들을 제외하더라도 리안이 가진 병력들과 싸웠다면 완벽하게 패배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이 자리가 너무도 불편했다.
“도련님! 백작령의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백작령의 수도라 해 봐야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었다.
인구 2~3만 명 수준.
거기다 궁전도 말이 궁전이지 상상하던 그런 궁전이 아니다.
게임에서는 실내를 표현한 일러스트가 달랑 한 장뿐이라 리안도 실물은 처음
보았다.
실제로 보니 말이 궁전이지 그냥 도시 안의 작은 요새 느낌.
차라리 더블린 항구의 시청이 훨씬 더 궁전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실제로 성을 보기엔 처음이니.’
멋있긴 멋있었다.
유럽 여행은커녕 제주도도 못 가 봤으니.
이렇게 게임 속으로 빙의할 줄 알았다면, 플렉스를 하며 살 걸 그랬다.
“우왕~!! 도련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쵸? 그쵸?!”
샤로트가 좋아서 앉은 채로 방방 뛰었다.
출렁출렁~
겨우 그뿐인데도 마차는 위아래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만!! 정신 사납다.”
“칫~ 뿌우우우!”
샤로트는 볼을 빵빵하게 불었다.
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차란 게 그다지 탈 게 못 되네.”
그만큼 오토마차란 물건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마나 유폭의 위험 때문인지 전쟁에선 웬만해선 잘 사용되지 않았다.
그저 후방에서 인원이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용도.
그마저도 비싼 가격 때문에 주류가 아니었다.
여전히 보급은 말과 수레를 이용한다.
“나중에 신센롬에 가면 오토호스나 하나 사야겠네.”
역시 말하면 신센롬 제국이다.
테레지아 여제의 최우방이 바로 헝그 왕국이고.
그 헝그 왕국의 자랑이 바로 후사르라는 기병 집단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오토호스 제작 기술은 율 대륙 정상급.
“샤로트 네 것도 하나 사 줄게.”
“오오옷!! 정말이죠?! 약속했어요. 연인에게 말을 선물 받으면······.”
“닥쳐. 더 말하면 안 사 준다.”
“칫. 뿌우우우~”
다시 볼을 빵빵하게 만드는 샤로트.
그사이.
덜커덕~!
오토마차가 멈춰섰다.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검문이 있는 듯 보였다.
“질리안. 왜 마차를 멈춰 세운 건가? 안에 가이스 도련님께서 타고 계시다.”
“거참. 파울로! 아니까 세운 거지. 둘째 도련님. 빌려 가신 돈은 언제 갚으실
겁니까?!”
가이스가 오토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체면 구기게. 기다리면 부하들이 가져다줄 거야. 오늘 감자를 좀 팔았거든.”
“오호. 알겠습니다.”
성문을 지키던 기사와 평범한 대화는 아니었다.
‘질리안?!’
그러고 보니 아트로네 백작가에 고리대금을 하는 기사가 하나 있기는 했다.
‘별명이 황금 고블린이었나.’
게임에서는 상대측 기사를 사로잡을 경우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해당 기사의 군주가 주기도 하고. 기사 가문에서도 지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고 전쟁 당사자끼리 돈이 떨어지면, 포로 교환이 쉽지
않아진다.
그런 경우에는 전쟁이 끝나고 떨이로 풀려나기도 했고.
-오늘 황금고블린을 발견함. 아무래도 버그 같음.
이것은 버그 게시판 어떤 유저의 신고로 시작되었는데.
-몇 번을 잡았는데도 몸값을 지불함.
ㄴ신고 감사합니다. 고객님. 다만, 그 현상은 버그가 아닌 것으로······.
Q&A 팀의 버그가 아니라는 답변.
그 말인즉슨 질리안이라는 녀석 자체가 엄청난 부자라는 것이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랄까.
“후··· 저 개 같은 자식!”
가이스는 창문을 닫은 뒤 욕지거리를 했다.
“악독한 놈이긴 하죠.”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집안 대대로 아트로네 백작가의 흑막을 담당하
던 놈이다.
납치, 상납, 매춘, 밀매 어디 하나 끼이지 않은 곳이 없는.
“뭔가 아는구나. 리안.”
“네. 알고 있기는 하죠.”
다만, 뭔가를 뜯어낼 방법이 없다는 거다.
기사이면서 병사에게만 맡기지 않고 저렇게 착실히 성문에 나와 근무를 서는
걸 보면.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내성까지 들어서자 마차가 완전히 멈춰섰다.
철컥!
문이 열리고 그리 넓지 않은 공터.
영화에서 보았던 크지 않은 성의 형태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련님.”
마차의 문을 열어 준 이는 아트로네 제1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듯 하얗게 세어 가고 있었지만, 풍채는 현역이었다.
중견급 대기사로 보였다.
“네에··· 오랜만이네요······.”
당연히 리안은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머쓱했다.
그걸 본 기사단장은.
‘역시. 유약함은 벗으시지 못한 모양이군.’
약간의 오해가 있었고.
“여행길이 힘드셨을 텐데. 일단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기사단장은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었지만.
“백작님께서는 업무가 밀려 저녁 만찬에 얼굴을 보잔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
다.”
“알겠습니다.”
리안의 태도에 금방 흥미가 식었다.
다만, 그의 시선은 리안을 떠나 부선장에게로 향했다.
치직~!
아주 잠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충돌했다.
만만치 않은 자다.
‘저자인가? 실제로 리안 도련님을 움직이는 자가? 듣기로는 해적이라고 하는
데···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일단 더블린의 정보통에 의하면 해적기를 달고 왔다고 했다.
‘잉글슨과 관련이 된 자가 틀림없어.’
의심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거기에 더해 샤로트를 향한 눈도 의심이 깊어졌다.
‘샤로트 저 녀석도 각성이라······.’
분명 샤로트는 백작가에서 일하던 관리의 딸이었지만, 그 하급 관리는 잉글슨
본섬에서 유학을 하다가 돌아 온 자였다.
이 지역 출신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출신이었는데, 뭔가 사연으로 유학직후
이곳 아트로네 백작가로 흘러들어 온듯 싶었다.
‘베리 남작은 잉글슨의 간자였나 보군. 병에 걸려 죽은 것이 다행인가. 딸이
저 나이에 각성이라니. 그자도 힘을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외에 사제도 범상치가 않아 보인다.
놀랍게도 매우 희귀하다는 전쟁의 신을 모시는 사제.
‘마법사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걸 봐서는 통신 마법사인가? 그 옆에 꼬마는
제자··· 인가 보군··· 빨리 가서 보고해야겠어.’
기사단장은 대충 상황을 파악한 뒤 다시 백작에게로 갔다.
원래라면 백작이 직접 마중을 나오려고 했으나 상황이 복잡한 것 같아 단장을
보내 상황을 좀 더 주시한 뒤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래. 어땠는가?!”
백작이 직접 보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그는 한 가문의 수장이다.
의도를 모르고 대책 없이 움직였다간 잉글슨 왕국의 간계에 빠질 수도 있다.
“잉글슨에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전쟁 영웅은
커녕 도련님은 여전히 유약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역시 그렇군. 빌어먹을 놈들. 이제 어린 외손자에게까지 손을 뻗다니.”
단단히 오해하는 두 사람.
사실 백작의 눈에 이미 리안은 벗어난 상태다.
그러니 백작 계승을 하러 가는 아이에게 달랑 두 명의 수행원만 붙였었지.
여전히 큰 관심은 없다.
단지 잉글슨에 협조적인 자신에게 이런 짓거리를 한 대상에 대한 분노였다.
‘일을 꾸민 것은 잉글슨 국왕인가? 아니면 총리?’
백작의 속마음을 국왕이나 총리가 들었다면.
-응?! 나???? 갑자기?
황당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잉글슨 왕국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에······.
“우오오옷!!”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방으로 안내받으며 속으로 감탄만 할 뿐.
그는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기에 기분을 팍팍 내는 중이었다.
‘오오오~! 눈이 현란하군! 유럽에 온 느낌이 이런 기분일까? 이것이 역사 시
간에 배웠던 바로 그 바로크 양식이란 건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아트로네 백작가가 예술에 별로 관심도 안목도 없다 보니 잡다한 것들을
모아 놔서 어지러울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 세계는 유럽과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도련님.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도착한 방은 방 안에 방이 여러 개 딸린 형태였다.
아마 손님을 데려온 리안을 배려해서일 것이다.
“도련님과 손님이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리안 일행을 안내해 준 것은 모든 시녀를 관리하는 시녀장.
딱 보아도 품격이 남달라 보였다.
“네. 고마워요.”
리안과 그의 일행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샤로트도 따라 들어가려 할 때.
스윽.
시녀장은 샤로트의 옷깃을 살짝 잡은 뒤 고갯짓을 했다.
잠깐 따로 보자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