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032
스랑 제국의 이황자 클로도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건 또 뭐지?”
“해군 기밀문서입니다. 은폐를 위해 파기되기 직전의 상황에 우리 쪽 요원이
겨우 확보한 문서입니다.”
서류에는 해군 정보부장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일급 기밀로 취급되어 있었는데······.
“뭐?! 최신 전함을 빼앗겨?! 그것도 3급 전열함급을? 어떤 얼간이가!”
이전 제독들 간의 회의에서 남해와 북해 제독이 서해 제독을 막무가내로 몰아
붙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 같은 상황이.
“그럼. 저기 있는 저 배가··· 우리 제국의 혈세로 만든 최신형 쾌속함이란 말
이더냐?”
철갑선이 흔한 배는 아니었지만, 아주 희귀하냐고 한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각국에서 신형 전함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많이 했고 가장 흔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철갑함이었으니.
다만. 여기 전장에 있는 철갑선 중에서 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고잉미샤호.
유선형으로 잘 빠진 것이 기존의 전함들과 모양부터가 달랐다.
특히나 고속 이동을 할 때엔 흘수선(물 아래에 잠기는 부분을 표시한 경계선)
이 물 위로 심하게 떴는데, 그 말은 부유력이 다른 배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
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엔진의 출력 자체가 괴물이란 말.
그러니 철갑함임에도 돌격선이 아닌 쾌속선으로 분류된 것이다.
“서해 제독. 이번 전쟁이 끝나면 본국에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송구합니다. 이 황자 전하······.”
서해 제독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완벽하게 서류를 파기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남아 있는 자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번 전투의 패배까지도 싸잡아서 몰아갈지도 모른다.
씨익!
그때 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소리가 나지 않게 인사를 해 왔다.
그 당시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었는데, 진짜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저 빌어먹을 꼬맹이가!!!’
그때 어떻게 해서든 잡았어야 했다.
그때의 일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빼앗긴 배의 선장이라는 것이 저 꼬마인가?”
“그···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수완이 좋습니다. 정황상 해무가 꼈을 때 해적
왕을 밖으로 빼돌린 것도 저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이 황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려 놓고 부하로 삼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전시에 적으로 만난 것이니.
싱긋.
리안은 이 황자 클로도의 시선도 느껴지자 조용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승리의 미소를.
일종의 먼 미래에 예고라고 할까······.
***
협상은 싱겁게 끝이 났다.
레오폴트의 존재 때문이었다.
전투는 일주일간 멈춘다는 협정.
이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냐?
아니다. 오히려 두 나라는 박 터지게 싸울 것이다.
잘하면 육지로까지 확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희박하지만.)
피해는 둘 다 심하게 봤는데, 이득은 없었다.
당연 본전 생각이 날 수밖에.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쉬울 거다.
이겨서 상대에게 지금까지 입은 피해를 변상받는 것이 최상.
이제 전쟁이 아니라 도박이 되었다.
누가 독박을 쓸 것인가? 라는.
철퍼덕!!
그와 별개로 플랑크는 고잉미샤호의 갑판에 처박혔다.
“으아아악!!”
선원들은 그를 거칠게 다뤘다.
이전에 해적 섬에서의 일을 모두가 아는 것이다.
“황자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며 회개하겠습니다.
흑흑.”
플랑크는 눈물을 질질 짜며 레오폴트에게 빌었다.
콧물까지 흘리며 최대한 불쌍하게 보일 요량인 것 같다.
더럽게만 보였지만.
“서··· 선장님. 어떻게 합니까······.”
레오폴트는 리안의 눈치를 봤다.
뭔가 트라우마라도 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쩌긴 뭘 어째. 요. 잘게 다져서 상어 밥으로 던져 줘야지. 흐흐.”
조용히 살지. 말지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리안은 단지 플랑크의 정령 갑옷이 탐이 날 뿐.
녀석은 갑옷 속성은 희귀한 그림자 속성이다.
“리안 선장!! 살려 줘. 내 숨겨 둔 보물이······.”
“변태 놈아. 너 거지잖아. 그것도 상거지. 어디서 약을 팔아!”
“그게 무슨··· 내가 이래 봬도 해적 섬의 실세 중 실세······.”
“그러니까 돈이 없지. 누굴 바보로 아나. 배신에 끌어들인 숫자가 한둘도 아
니고.”
리안은 허리에서 마권총을 뽑아 장전했다.
그런 뒤 레오폴트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쏴 버려. 요. 직접.”
“제··· 제가··· 말입니까?”
“기회를 드릴 때 쏴. 요. 남의 손에 맡기면 평생 후회할 테니.”
레오폴트는 덜덜 떨며 마권총을 들었다.
“화··· 황자님!! 살려 주십시오. 제발!!”
플랑크는 다급해져서 필사적으로 빌기 시작했다.
“재갈을 물려요. 눈도 가리고.”
“읍!! 으으으읍!! 끄으으읍!!”
리안의 명령에 선원들이 곧바로 시행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레오폴트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서다.
아직 눈을 마주한 채 살인을 하기에는 심성이 여려도 너무 여렸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폭군이 되어 나라를 말아먹는지.
덜덜덜.
레오폴트는 결국 쏘지 못했다.
계속해서 마권총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할 뿐.
“후···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네. 요.”
웬만하면 몸도 정신도 건강하게 신센롬 제국에 배달하고 싶었다.
녀석은 가끔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직접 복수할 기회를 준 것인데.
“하··· 할게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레오폴트가 급히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며 보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즉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아아악!!!!”
광경은 참담했다.
리안 뿐만 아니라 모든 선원이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쏴도······.
“끅!! 끄으으으윽!! 그윽······.”
죽지는 않았다.
남자의 급소이긴 하지만, 즉사를 시킬만한 곳은 아니니.
다만, 확실히 남자에게는 치명적인. 공포스러운...
“확실한 복수네. 요······.”
리안은 레오폴트에게 급히 마권총을 돌려받았다.
조준 실력이 형편없··· 다고 하기엔 너무 공교롭나?
어쨌든 레오폴트도 마나 유저라 마권총을 재장전 가능하다.
앞으로 절대 마권총을 넘길 일이 없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더더욱.
“하··· 하··· 하······.”
레오폴트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지만, 후련한 표정이었다.
비록 죽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확실한 복수가 되었겠지.
“부선장 아저씨.”
“으··· 응······!!”
부선장도 질색한 표정.
자신이 맞은 것도 아닌데 뭔가 엉거주춤한 폼이었다.
플랑크가 마권총에 맞은 위치가 절묘해도 너무 절묘했던 것.
모든 남자의 공감력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처리해요. 큐브는 따로 챙겨서 가지고 오고.”
“잘게 잘라서 상어 밥으로 던지면 되나?”
“그게 해적들이 쓰는 확실한 방법이죠?”
확실한 방법?
해적들 사이에서는 육체가 온전하면, 바다의 저주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미신이 있다.
물론 해적들도 웬만해선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며 처형하진 않지만, 플랑크는
이름값이 있으니.
그만큼 되살아났을 때 부담스러운 인물.
“이만 들어가지. 요. 황자님.”
“네······.”
리안은 레오폴트를 데리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끄으으으아아아악!!!!”
앙심을 품은 선원들이 잘게 다지는 작업을 할 것이다.
고잉미샤호의 선원들은 예전에 해적 섬에서 리안이 받은 수모를 잊지 않았다.
선원들에게 리안은 자신들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미성년자가 보기엔 좋지 않아.”
아무리 복수가 좋다지만, 그런 장면까지 보여 주는 것은 어린 황자의 정서에
오히려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물론 자신에게도.
“신성한 축제가 이루어지고 있군요.”
향한 곳은 예배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미소를 짓고 있다.
아주 흡족하고 섬뜩한 미소를.
이게 어딜 봐서 사제인지.
악마 숭배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물론 외모는 검은 머리와 대비되는 하얀 피부부터 고운 얼굴까지 천사 그 자
체였지만.
“황자님에게 축복을 부탁해. 누님. 좀 심약한 구석이 있어서 말이지. 조기 치
료가 중요한 법이니까.”
“맡겨 주세요. 공자님. 용기를 북돋아 드리는 것은 우리 전쟁을 찬양하는 탱
글교의 전문이랍니다.”
그녀는 레오폴트의 손을 잡아줬다.
확실히 싸움을 부추기는 것은 탱글교가 최강이다.
“아! 그리고 내 미래의 대주교가 되어 줄 수 있어?”
그 싸움을 부추기고 명분을 강화하는 능력은 리안에게 꼭 필요했다.
이제 얼굴이 알려져 버려 해적질에 심각한 차질이 생겨 버렸다.
해안 마을을 약탈하거나 상선 따위를 등쳐 먹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명예가 일정 이하로 깎이면, 귀족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된다.
땅을 얻거나 물건을 파는 장사치라도 되어야 할 판.
“이미 탱글 님께 맹세했습니다. 저는 은인인 공자님께 최대한 협조할 생각입
니다.”
“좋아. 그럼 맡기고 간다.”
리안은 예배실을 나와 다시 갑판에 올랐다.
풍덩! 풍덩!
그사이 집행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리안도 처형 장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 현지화가 많이 되었다지만 여전히 현대의 감성이 남아 있
었다.
아니.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기엔 부담스러운 감성이지만 남겨 두는 것이 이득이다.
그래야 부담 없이 게임 지식을 활용할 테니.
“꼬맹이. 여기 가지고 왔다.”
부선장은 피가 묻은 손으로 닦지도 않은 큐브를 가지고 왔다.
당연히 그걸 받지 않고.
“으··· 우리 군종 사제님께 전해 줘요.”
“응? 이걸?!”
“그림자 속성은 전쟁의 사제들과 찰떡이니까요.”
“찰떡?!”
“못생기고 무지렁이인 사람은 모르는 그런 게 있어요.”
중반이 넘어가면 전쟁의 신 주교 세이나의 동생이 등장한다.
그가 착용한 것도 그림자 속성의 정령 갑옷이었는데, 아주 전쟁터에서 학살을
하고 다닌다.
-조루들을 위한 치료제!
이후 유저들은 깨닫게 되는데.
그림자 속성은 위력은 좋은 반면 지속력이 약한 캐릭터에게 주면 찰떡궁합이
란 것이 정설로 남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전쟁의 신 사제들이고.
“서··· 선장!! 통신이 들어왔어. 해적왕에게.”
선교에서 마법사 포트가 리안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찰캉찰캉!
리안은 곧장 계단을 올라 선교로 향했다.
[리안.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신센롬 제국의 황자를 데리고 전쟁을 할 수는
없잖아.]
모두에게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전쟁 당사자들은 물론 신센롬 제국에게까지.
“본국에 떨궈 드려야죠.”
[직접 가려고? 스랑이나 잉글슨에 맡기지 않고? 신센롬은 여기서 멀다고.]
“열심히 스튜를 끓여서 개를 줘서야 되겠습니까?”
보상을 받으려면 직접 가긴 가야겠는데··· 문제는.
[해적선으로 운송하기엔 물건이 너무 고가품이 아닌가? 수화주의 체면도 생각
해 줘야지.]
“그건 괜찮아요. 외가 쪽에 들르면 해결됩니다. 그쪽이 아일리 쪽 귀족이거든
요. 거기서 가문의 깃발을 좀 빌리면 될 듯해요.”
[리안. 역시 귀족이었나? 알겠다. 그렇다면 잉글슨 쪽에 말해서 허가증을 받
아 주지.]
아일리는 잉글슨 왕국의 속국이라기보다 식민지에 가깝다.
본토의 세율보다 훨씬 높은 편이라 백성들의 삶이 제법 팍팍하달까.
어쨌든 수륙양용이 가능한 고잉미샤호가 내륙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통행증이
필요했다.
[그보다 큰일 날 뻔했군. 빌어먹을 플랑크 녀석! 제국의 황자를....]
“흐흐. 어차피 문제가 생겼어도 신센롬은 바다에 영향력이 없어서 별일 없었
을 거예요.”
실제로 별일이 없었다.
레오폴트가 훗날 황제가 되었음에도 복수는 없었다.
당사자인 플랑크는 죽어 버렸고. 해적 섬에 징벌을 가하려고 해도 해군력이
따라 주지 않아서일 거다.
“아참. 저주 그거 플랑크가 한 짓 같더군요.”
[뭐?! 그놈이!!???]
리안의 발언에 해적왕이 놀랐다.
“돈을 그렇게나 써 대는데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요?”
[젠장!]
생각해 보니 이상할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본다면 내가 왜 몰랐을까? 할 때가
있다.
해적왕이 딱 그런 상황.
“걱정 마세요. 치료법을 알고 있으니. 제가 다녀올 동안 편안하게 계세요. 잉
글슨에게 말해서 대주교에게 축복이나 걸어 달라고 하고요. 완치는 못 해도
꽤 효과 있을 겁니다.”
[대주교를 찾아가 본 적이 있는데 별 효과를 못 봤었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플랑크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손 놓고 보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포로들도 대신 좀 처리해 주세요. 보급선에 맡겨 놓을게요.”
[신경 써서 처리해 주지.]
“그럼.”
통신을 끊고 출발 준비를 하려던 찰라.
“선자아아아앙!!!”
부선장이 선교로 달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