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028
항구의 옆에 있는 높은 언덕.
내리막길을 덜컹이며 빠르게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저··· 저건······.”
해적왕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고잉미샤호가 수륙양용이었어?”
“그보다 어쩌자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설마··· 저기서 바다로 뛰어든다고?!”
설마가 진짜가 되었다.
언덕에서부터 이어진 내리막의 끝에는 절벽이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저기서 떨어진다면 어떤 것도 무사하지 못할 터.
보통이라면 배가 바닷속으로 처박히거나 재수 없게 융기된 지형이라면 배가
반쪽으로 쪼개질 것이다.
첨벙!!!
그런데······.
“날았다. 배가 날았어······?”
아주 안정적이게 그것도 수평을 유지하며 바다에 안착했다.
이미 그들은 한번 날아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의 데이터를 토대로 더 정밀하게 공중에서 중심을 잡는 법을 익힌 것이다.
쏴아아아~!
떨어진 곳은 해적왕의 전열함 근처.
츠차츠츠촵!
여파로 생긴 바닷물이 해적왕의 전열함에 뿌려졌다.
아주 화려한 등장이었다.
그런데, 해적왕의 반응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서 돌아가거라!!”
해적왕은 급히 말했다.
그가 있는 곳은 사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곧 적들이 해적왕이 있는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섭섭하네요. 히잉~! 지금 한 척도 아쉬운 상황
아닌가요?]
애교 섞인 리안의 말에 해적왕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넌 위험하다. 플랑크 그놈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수륙양용이니 다시 완만한 곳으로 거슬러 도망가거라. 그 위치까지 내가 뚫어
주마.”
매춘 골목에서의 일은 해적왕도 얼핏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플랑크의 성적 취향만큼은 탐탁지 않았다.
리안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더군다나 자존심까지 상처가 났을 테니.
[그 꼬부랑 검은 수염 변태가 무에 무섭다고. 그리고 항복하실 생각은 아니
죠? 에이~ 설마아아~~]
“······.”
그 말에 해적왕은 침묵했다.
얼굴에 열이 화끈거렸지만, 부하들을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어차피 자신은 저주 때문에 오래 살지도 못할 몸.
자신만 희생한다면 모두를 살릴 수 있다.
[그거 기억 안 나세요?!]
“무슨 말이더냐. 내가 뭘 잊었다는 건지.”
[해무가 끼면 저만 따라오라고 했잖아요. 해적 섬에서 출항할 때 분명 말씀드
렸는데······.]
해무가 끼면 따라오라······.
분명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고? 타개할 방법이 있다고?
그때는 무슨 어린아이 농담쯤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겨 들었지만······.
“그보다 해무라고? 지금 해무가 어디에······.”
그 순간 해적왕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있다. 해무가 끼었다.
아주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배 아래쪽에 확실히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바다와 함께한 그였다.
“어떻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나 화창한 날씨에 아침도 아니고 정오가 넘은 오후 시간에 해무라니.
바다의 신 메살이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아니. 그보다 리안이 해무를 예언한 것이 더 놀라웠다.
[자. 그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해적왕 할아버지.]
해무를 예언했다지만,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여전히 리안이 무엇을 꾸미는지 알지 못했다.
범인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커다란 배가 빠져나갈 곳은 없다. 설마 나만 네
녀석의 배에 올라타서 빠져나가라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로는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누누이 말하지만 만의 입구를 제국 해군이 떡하니 막고 있었다.
물론 그 밖으로 연합군이 포위를 하고 있지만, 화력 면에서 열세라 어떻게 하
지 못하는 상황.
그저 멀찌감치에서 간을 보듯 간헐적으로 포격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에이. 그랬다가는 다 도망가요. 해적왕 할아버지가 건재한 걸 외곽에 포위하
고 있는 아군에게 보여 줘야 한다구요.]
“뭐라고?! 이 배가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고?! 무슨 수로······!”
해적왕은 어안이 벙벙했다.
***
반대로 리안은 자신만만했고.
“흐흐흐. 따라만 오라니까 그러네. 참고로 제 안내비는 좀 비쌉니다.”
[오냐. 얼마든지 지불하마.]
해적왕이 승낙했다.
“그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의심하지도 말고 따라오세욧.
고객님.”
리안은 수정구를 살짝 쓰다듬었다.
스아아아아.
해적왕의 배로 접근하던 고잉미샤호가 유연하게 회전했다.
전장이 아니었다면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우아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이곳은 전장.
“걸리적거리게! 8시 방향 포격하세요. 통곡의 길(암초 지대)을 향해 최단거리
로 이동합니다.”
리안의 명령에 좌현에 있던 마포들이 불을 뿜었다.
견제에 가까운 공격이었지만.
퍼버버버벙!!!
뒤따라오던 해적왕의 전열함도 함께 그곳을 향해 포격해 줬다.
“오오. 나이스샷. 해적왕을 하려면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한다니까.”
따로 교감은 필요 없었다.
해적왕과 그의 배에 탄 선원들은 전반적으로 능력치가 좋으니.
“전열함은 전열함이네······.”
부선장은 다른 쪽으로 부러운 듯 말했다.
단 한 번의 포격으로 다가오던 적선이 벌집이 되었다.
덕분에 고잉미샤호는 추가로 포격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배가 최고지요. 흐흐.”
리안은 딱히 전열함이 부럽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배들은 목선.
일반 금속에 실드 마법진을 새길 수 있는 기술의 등장으로 빠른 시간 내 저들
은 퇴물이 될 것이다.
그럼 철갑선으로 교체되는 수순을 밟을 거고.
결국 철갑선이 대세가 되면 전열함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그보다 항법사 아저씨. 확실한 거죠?!”
“애송이. 네 녀석이 선장이 되기 전에 우리는 안 해 본 일이 없다. 지금 네가
앉은 자리는 무수한 노력 끝에 만들어진. 절대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안 해본 일과 해도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은.
“2년 전이었나? 내전 중이었던 이곳에 주요 인물과 물자를 배달한 적이 있지.
그것도 해무가 낀 야밤에. 저기 보이는 저 통곡의 길을 통해서 말이지.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었어. 그때만 생각하면······.”
조금 말이 길었지만, 그 말을 요약하자면.
“흐흐흐. 그럼 해무가 껴도 가능하단 소리죠?”
“당연하지. 애송이 너도 날 믿고 전투 장소로 여길 정한 거 아니더냐? 그냥
믿어.”
평소 심각한 표정만 짓던 항법사가 간만에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보였다.
***
펑펑~펑~~~펑~~~~~펑!
낭트만의 포격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전투를 지속 불가능한 환경.
“이거··· 뭐야?!!”
“젠장!! 앞이 안 보여.”
“갑자기 해무라니······.”
“내 바다 생활 30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
해무가 잔뜩 낀 덕분에 전투는 일시적으로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바다의 신 메살이 장난질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어떤 이는 불길한 일이라며 몸을 움츠렸지만.
“흐캬클캬캬캬. 바로 이거지.”
리안은 엽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품에서 신비하고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야누스의 심장.
기후를 조종할 수 있는 아이템.
원하는 환경을 설정하면, 그에 맞게 주변을 변화시킨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것이 단점.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언덕 위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유다.
“저번의 그게 신물이었어?!!”
부선장이 놀랐다.
엄밀히 말하면 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에 신물은 아니었다.
“말했잖아요. 우리 땅이 생길 거라고.”
“그것과 그게 무슨 관계가··· 아!”
무인도 중 골라만 잡으면 된다.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면······.
리안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나중 이야기고. 일단 살아서 여길 빠져나가죠. 죽어서 땅이 무에 중요
하겠어요.”
리안은 열심히 수정구를 보물단지처럼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앞은 한치도 보이지 않는 해무로 덥힌 상태.
평소 대충대충 하는 그답지 않게 사뭇 진중했다.
“해도가 있어도 이런 곳을······.”
“보이지도 않는데 가능한 거야?”
“예전에도 야간에 지나간 적이······.”
“그땐 항법사가 쪽배를 타고 코앞에서 직접 인도했고.”
“지금 같은 속도도 아니었고. 이 구간을 밤새 천천히 지나갔다고.”
선교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잔뜩 쫄아 있었다.
“이거 찌릿찌릿하네. 으으읏!”
리안의 작은 호흡에도.
“으으으윽!”
“조··· 조심해. 선장.”
“집중하라고!”
동요했다.
그만큼 이 통곡의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뭘 그리들 쫄고 그래요. 별거 아니구마아아안. 휴우~”
사실 리안도 입꼬리만 올라가 있었지 눈은 경직된 상태.
여기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게임 오버다.
항법사가 직접 측량해 만들었다는 해도에 조금의 오류가 있어도··· 게임 오버다.
“너무 쫄지 마. 애송이 선장. 그 해도는 내가 한 땀 한 땀 직접 노를 저어 가
며 그린 거니까.”
“말은 똑바로 해. 노는 내가 저었지.”
부선장이 쪽배로 노를 젖고 항법사가 측량을 한 듯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다.
리안은 속도를 더 내었다.
츠아아아!!!
고잉미샤호는 거침없이 전진했다.
그 뒤로 해적왕의 전열함이 따라왔다.
위태위태해 보인다.
빠져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도 중요했다.
외곽의 해적들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 거고. 해무의 지속 시간도 문제다.
이동 중에 해무가 걷히면??? 그야말로 낭패다.
“저 배도 충분하겠죠? 덩치가 너무 큰데.”
리안은 뒤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걱정하지 마. 넉넉하게 치수를 쟀으니. 애초에 올몬드 해적단의 조타수는 너
처럼 괴물이 아니었거든.”
“그럼 해적왕 할아버지의 배는 빠듯하단 말인데······.”
“그것도 걱정하지 마. 저 배에 탄 놈도 거의 에이스급이니까.”
“하긴.”
그것도 그랬다.
설마 해적왕의 조타수가 어설픈 조타수일 리가 없다.
물론 리안은 알지 못했다.
거의 게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 전쟁이 터지고 여기서 해적왕은 배신으로 죽
게 되니.
어차피 없어질 캐릭터들의 데이터를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이고.
끼걱! 끼걱!
배 안은 조용했다.
어느 순간 리안도 숨소리 외에는 내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해적왕의 배도 마찬가지.
“이봐. 렘머스. 정신 똑바로 차려!”
해적왕의 에이스 조타수인 그에게 누군가 당부를 했다.
“빌어먹을 이건 너무 빠르잖소. 저 꼬마 선장이 지휘하는 배. 정말 믿을 만한
거요?”
아주 죽을 맛이다.
암초를 피하는 움직임은 분명 에이스가 맞다.
문제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것.
마치 바닷속을 훤하게 알고 있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저놈들도 자신 있으니까 저러겠지.”
“해무가 낄 것을 예상한 것도 저놈들··· 잠깐. 해적왕, 이거 좀 이상한데?”
“뭐가 말이냐.”
“여기서 싸움이 벌어진 거. 그거 꼬마 해적이 적 통신함을 탈취하면서 생긴
거잖소.”
생각해 보니 이곳이 전장이 된 것 자체가 리안의 정보에 의해서다.
-스랑 제국의 함대가 낭트 항에 집결할 예정.
그 소식을 들은 잉글슨 왕국은 환호하며 낭트 항을 포격하는 연기를 했다.
먼바다에 병력 일부를 숨겨 두고서.
“설마······.”
“그렇지 않고서야 출항 전에 그런 말을 할 리가······.”
해무가 낄 걸 알고 있었다?
“그럼 그놈이 스랑 제국과 잉글슨 왕국 양쪽을 움직였다고?”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될 거요. 이 넓은 바다 전체에 해무가 꼈을까?”
일리 있는 말이다.
“게다가 저놈들이 이런 복잡한 암초 지대를 그린 해도를 떡 하니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이곳 어부들도 웬만해선 이곳은 안 들어온다고 들었소.”
어선이 작은데도 그럴 정도라면 말 다 했다.
더군다나 고잉미샤호는 그렇다 치고 자신들은 대형 군함인 전열함이지 않은가.
“그보다 빠져나갈 순 있겠지?”
“불안하긴 한데, 저리도 자신 있게 앞장서니.”
에이스 렘머스는 식은땀을 닦아 가며 열심히 고잉미샤호를 따랐다.
저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방법이다.
아니 해도가 있어도 이런 거지 같은 암초 지대는 쳐다도 보기 싫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한다.
***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는지 봐라! 라는 생각으로.
“으랏차차차!!”
마지막 순간 리안이 기합을 내질렀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
촤아아아아!!
배가 미끄러지듯 암초 지대를 벗어났다.
그 뒤로 해적왕의 전열함이 따라왔다.
제법 위험한 코스.
덜컹!
그때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전열함이 순간적으로 기우뚱했다.
“으아아악! 실패인가?!”
리안이 비명을 질렀지만.
“아니. 저 정도면 됐어. 지금 배 밑바닥은 난리가 났겠네.”
해적왕의 전열함 기관병들이 나무판자로 열심히 땜질을 하고 있을 거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꼬마!! 아니 리안 선장. 으하하하!!! 넌 정말 걸물이야.]
해적왕이 통신으로 전해 왔다.
마지막에 바닥이 조금 긁힌 것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보인다.
“이걸로 만족하면 안 되죠.”
[보여 줄 게 더 남았다고?!]
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 코드를 넘겨주세요.”
[그건 어디에다 쓰려고?!]
“이대로 끝을 내기엔 아쉽지 않나요? 반격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