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루트2― 왕의 옥좌를 찬탈한다>
삐빅.
패널의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다.
힘아리가 없는 손짓에 비해, 손끝은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껏 눌렀다.
“…오호.”
내 선택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신. 흥미에 찬 탄성을 나직이 흘린다.
일그러진 강수아의 얼굴이 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초인.”
두 번째 선택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던전 마스터가 되는 것.
화신은 아무래도, 그것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 듯하다.
“…….”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다. 반쯤 감긴 눈으로 화신의 눈동자를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고 한참 후. 짤막하게 대답해줬다.
“이게 맞는 것 같아서.”
복합적인 의미로 대답했다.
그러자 갸웃, 내 예상대로 화신은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 선택엔 맞고 틀리고가 없다. 초인.”
“…그러냐.”
“그럼. 그저 후회를 더 하느냐, 덜 하느냐의 차이다. 선택과 포기의 문제지.”
“선택. 포기.”
화신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이 선택으로 내가 후회하는 건 뭐가 있을까. 나는 뭘 포기하게 되는 걸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다.
‘…나 외의 전부.’
모든 책임과 굴레를 내팽개친다. 그리고 던전 마스터가 되어, 나를 둘러싼 모든 현실에서 도망친다.
말하자면 수아와 비슷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거다.
그러면. 이 선택을 한 뒤의 나는…….
‘남는 게 뭐가 있지.’
스르륵.
자연스럽게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거기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이브가 있었다. 시간이 동결되어 조각상처럼 굳어 있는 그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적어도 이브만큼은 내 옆에 있겠지.
그녀만큼은 영원히 날 기억해줄 거고. 나 또한 그녀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던전에서 영원을 구가할 것이다.
“자네 외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이불 속으로 숨어 버리겠다 이건가.”
화신은 이번에도 먼저 중얼거렸다.
내 생각을 앞지르듯이, 그 뒤로도 놈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기적이군. 또한 아주 비정상적이야.”
그리고 짝짝짝.
놈은 여유롭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화신의 지긋한 시선이 날 위아래로 품평하듯 훑어갔다.
“지금의 자네는, 뒤틀린 광인 그 자체구나. 흐흐.”
“…….”
“나쁘지 않아. 이렇게 완전히 부서져 버리는 결말도 나름의 매력은 있는 법이지.”
화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 덧붙인다.
네가 내 뭘 안다고 떠들어. 쏘아붙이려다 그것도 구질구질해서 그만뒀다.
그러자 화신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내가 왈가왈부할 부분은 아니겠지. 그게 자네의 선택이라면야.”
“…그러면?”
“거리낄 거 있겠나. 어서 계약을 시작해 보자고. 초인.”
까딱까딱.
화신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였다. 손짓으로 날 유도하고 있었다.
그 손끝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시커먼 옥좌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앉아라.”
화신은 유혹하듯이 연신 손짓한다.
그리고 난 정말로 매혹당한 것처럼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간다. 발걸음에 힘이라곤 전혀 없으나, 망설임 역시 없었다.
지친 발걸음이 옥좌 앞에 닿기까지, 앞으로 5보.
“이 세상을 버려라.”
그 와중에 화신이 한 마디 한다.
앞으로 3보.
“나와 계약하는 것으로. 자네를 둘러싼 세상은 개벽될 것이다……!”
광기와 웃음 섞인 목소리가 골통을 윙윙 울린다.
그리고 앞으로, 1보.
“자아!!”
털썩!
화신이 수아의 입을 쩍 벌리는 순간. 나는 옥좌에 미련없이 걸터앉았다.
쿠우웅!
기묘한 울림과 파동이 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크윽!!”
정신이 혼탁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머릿속에서 흑과 백이 난잡하게 뒤섞인다. 수많은 기억과 감정이 한 데 어우러졌다가, 하얗게 지워졌다.
이내 말끔하게 사라져버린다.
“카아아아악!!”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콰콰콰콰콰!!
옥좌를 타고 흐르는 시커먼 기운이 폭풍을 만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거칠게 회오리치다가, 용솟음쳤고. 끝내는 내 몸으로 온전히 빨려 들어왔다.
“아… 아…!! 아아아아아!!!”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다. 안과 밖이 뒤바뀐다.
나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적막에 휩싸였다.
“아아.”
나는 탄식하듯이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고. 그것으로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빠르게 주위부터 둘러봤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뭐야.”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이곳은 피안계의 한복판. 나는 폐허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칠흑의 옥좌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렇게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렸고.
“화신.”
이내 달라진 점을 하나 깨달았다.
방금까지 옥좌 주변에서 기웃거리던 강수아. 정확히는 화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놈을 찾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곧 발 앞에 널브러져 있는 강수아를 발견했다.
나는 멍청하게 탄성을 흘렸고. 천천히 옥좌에서 엉덩이를 떼기 시작했다.
“크, 윽?!”
그러나 곧 힘이 빠진 나머지 다시 주저앉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봤다. 그리고 눈앞에 가져왔다.
창백하게 질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탈진이 심하군.’
방금 옥좌를 중심으로 발생했던 칠흑의 격류.
그것이 무슨 조화를 일으킨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온몸에 힘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아빠! 괜찮아?!”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유의 호칭 덕분에 누구인진 바로 눈치챘다.
“…이브.”
축 늘어진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힙겹게 등 뒤를 쳐다봤다.
옥좌 뒤쪽에서 이브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아, 아빠!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
지척까지 다가온 이브는 곧장 내 팔뚝을 붙들었다. 그리고 마구 뒤흔들어댔다.
바싹 가까워진 이브의 시선이 날 빤히 쳐다본다.
“나… 가, 갑자기 정신차려 보니까, 주변이 이상하게 변했어!”
“그렇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왜 우리 집이 다 부서졌어? 아빠가 앉아 있는 이 의자는 뭔데??”
이브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듯하다.
“혹시 아빠는, 알고 있어?”
그럴 법도 하다. 이브가 멈춰버리기 전과는 완전히 세상이 달라져 있으니까.
중간과정이 생략된 이브에겐, 이 폐허가 낯설지 않으면 이상하다.
결국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을 거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위로의 말을 주워섬겼다.
당연히 이브는 이해하지 못했다. 잔뜩 찌푸린 표정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뭐, 뭐가?”
“괜찮아.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그러니까 뭐가? 난 아빠가 그냥, 혹시 뭘 알고 있나 했을 뿐인데……?”
나는 한동안 홀린 사람처럼 ‘괜찮아’만 연발했다.
이브는 그런 나를 보고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내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뭐, 아빠가 괜찮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괜찮다니까 다행이야! 아빠가 엄청 힘들어 보여서, 뭔 일인가 싶었다구!”
“…응. 그래.”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브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브는 여전히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한 마리 강아지처럼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브.”
어느새 난 이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번쩍. 편안하게 감겨 있던 이브의 눈이 확 뜨였다. 그리고 빨려들 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날 빤히 올려다봤다.
“응. 왜?”
“기억 나냐. 언젠가 네가 말했었는데.”
“무슨 말?”
“너한텐 나만 있으면 된다고. 네가 날 영원히 기억해주겠다고 그랬지.”
“아… 응! 했었지! 당연히 기억하지. 에헷.”
“그 약속. 지금도 유효하냐.”
약간의 걱정을 담아서 물어봤다.
이브는 벌써 그런 입발린 약속 따윈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나이 처먹고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의, 일생일대의 오판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부류의 노심초사였다.
“뭔 소리야.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이브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 긍정했다.
그녀의 입가에 티 없이 맑은 미소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아빠만 내 옆에 있으면 돼! 다른 건, 아무 것도 필요없다구!”
이브가 내게 보여주는 특유의 미소.
투명할 정도로 올곧은, 광기에 가까운 순수. 그것은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에서 난, 묘한 안심감을 느꼈다.
“…그래.”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보다 좀 더 힘있게,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칼이 명주실처럼 흩날리며 눈가를 간질인다.
“나도. 이제… 너만 있으면 돼.”
“으응? 그, 그래?!”
“그래. 이제 다른 건… 필요 없어. 필요 없어졌다.”
“그, 그치? 역시 내가 최고지? 으히힛……!”
지쳐버렸다.
나를 둘러싼 모든 복잡한 상황들.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내 입장까지.
신경 써야 할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너만 있으면. 이제 나도 그거면… 만족한다.”
언제부터 내가 그리 복잡하게 살았다고.
죽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강수아가 그랬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젠, 평범한 사람답게 행동하겠다.
“나도. 널 영원히 기억해줄게.”
나는 지쳤다.
잊혀지는 것에 너무 지쳐버렸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이제는 나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영원을 구가할 반려가 필요하다.
이 폐쇄된 세계의 국민 없는 왕이 되어버린 나. 그런 나와 함께, 단 둘이서, 평생을 썩어나갈… 그래.
왕비가 필요한 거다.
“나와 계속 함께 있어줘. 이브.”
이브의 창백한 손을 힘껏 붙잡았다.
마치 사랑 고백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이브의 눈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브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헤벌쭉 미소를 피웠다.
“응. 영원히, 나랑 같이 있자. 에헤……!”
덥석!
이브가 내 품으로 한껏 파고든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나를 와락 껴안았다.
딱히 평소처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환영했다.
“으, 으으음……!”
한창 이브와 교감을 나누고 있던 그때였다.
문득 야트막한 신음소리가 귓가를 자극했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 이브와 내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어, 엄마?”
이브가 신음의 주인공을 입에 담았다.
수아였다. 널브러져 있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수많은 생각들이 단숨에 쏟아졌다.
덕분에 반응하는 것 자체가 늦었다. 뭐라 말을 꺼내고 싶은데, 나오는 것은 짤막한 탄성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수아는 비틀거리며, 두 다리로 일어섰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수아가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고. 금세 당황에 찬 목소리를 터뜨렸다.
그녀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황급히 두리번거린다. 필사적으로 뭔가를 찾는가 싶던 시선이, 이내 내 시선과 얽혔다.
“아!!”
수아는 대번 화색이 되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바짝 굳어버렸다.
“오, 오빠!!”
차박차박!
수아가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내 쪽으로 열심히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랄까. 낯선 외국 땅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한국인을 만난 행색이다.
“이, 있었군요! 다, 다행이야……!”
모르긴 몰라도 그와 비슷한 기분이긴 할 거다.
지금 이 폐허로 변해버린 세상은 수아의 상식에 없는 세계. 이 세상의 꼬라지를 보고도 ‘그런갑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수아가 아니다.
“…수아.”
내가 아는 수아.
그렇군. 방금의 반응으로 난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내가 아는 그 ‘가짜 강수아’가 분명했다.
‘화신. 약속을… 지킨 건가.’
화신은 내게 약속했었다.
내가 계약을 받아들이고 던전 마스터가 되면. 가짜 강수아의 복제품을 이곳에 구현해주겠다고 했었지.
눈앞의 멀쩡히 살아 있는 강수아는, 그 계약의 산물인 듯하다.
“저… 가, 갑자기 정신 차려 보니까, 주변이 이상하게 변했어요!”
“…그렇구나.”
“대체 무슨 일이죠?! 게이트라도 열렸나요? 여기, 서, 서울은 맞아요? 오빠가 앉아 있는 이 시커먼 의자는 또 뭐고요?!”
강수아의 혼란에 찬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천천히 하나씩 설명해주자. 어차피 던전 마스터가 된 나한테 시간은 많다.
정확히는 이제, 있는 거라곤 시간 밖에 없지.
‘어차피 죽으면… 또 다 잊어버리고. 또 다시 살아나겠지만.’
그런 생각에 허탈해지는 건 진작에 졸업했다.
나는 1033번의 회귀 경험자. 공허감에 무기력해질 거면 한참 전에 포기했지.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새로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삐빅.
너무나도 익숙한, 그래서 역겨울 정도인 시스템 패널의 등장.
그것으로 상황이 격변하기 시작했다.
[곧 차원의 균열이 생성됩니다.]
연신 알 수 없는 통보들의 향연이었다.
분명히 알 수 없는 통보였지만. 이 세계의 주인이 된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마를 싸매고 중얼거렸다.
“…시작됐구나.”
동시에 파지지직!
찢어지는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상공에는 공간 자체를 찢어발기듯,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수아였다.
“꺄아악! 저, 저건……!”
아마 그녀도 저것에 대한 기억 정돈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눈앞의 수아가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녀라면, 모를 수가 없다.
“게, 게, 게이트?!”
그것은 수아의 말대로 게이트였다.
경악하는 수아와 달리 난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을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다.
시선을 하늘로 고정한 채, 그저 생각한다.
‘시나리오가… 다시 시작됐다.’
지구를 무대로 하던 연극은 끝났다.
그렇기에 새로운 무대가 준비되었다. 나는 화신의 장기 말로써, 일개 엑스트라 졸개 중 하나로써. 그 이 갈리는 연극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상황은 그 전조들이었다.
[이계의 존재들이 균열을 통해 넘어옵니다.]
[당신의 죽음은 곧 이 세계의 죽음입니다. 목숨을 건 전투를 준비해주십시오.]
[균열의 완전 개방까지 남은 시간: 1분 30초]
그 추측에 쐐기를 박듯. 또 다른 패널이 내게 통보해줬다.
그래. 생각보다 훨씬 빨라서 놀랐을 뿐. 이건 모두 감안했던 상황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이브부터 불렀다.
그러자 이브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입을 쩍 벌렸다.
“응. 준비됐어!”
콰자작!
상의를 풀어 헤치고. 그녀가 내게 한달음에 달려들고. 가슴팍을 씹힌 채, 철철 쏟아지는 피를 이브에게 먹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과정이 이어졌다.
―죽여라.
콰드득, 우드득!
이브의 형체가 허물어졌다. 시뻘건 액체들이 날 감싸고 휘몰아친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건 갑주가 완성되었다.
―다 죽여버려라.
변신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나는 그때까지.
내 머릿속에는 누군가가 내리는 명령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죽여라. 전부.
―침입자를 죽여버려라.
―죽여서. 지켜라.
―네가 지키고자 했던 그것을.
―네가 쟁취해낸 영원을.
그야말로 끊임없이.
내 뇌와 정신을 갉아먹듯이.
머릿속에 수백 마리 벌레가 드글거리는 기분이었다.
“오… 빠?”
변신 과정을 눈앞에서 본 수아. 그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나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고.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어, 아……!”
털썩. 수아를 내가 앉아 있던 칠흑의 옥좌에 앉혔다.
스르릉! 나는 늘어진 사복검을 합쳐 장검화 했다.
“금방 끝내고 온다. 그때까지… 여기 얌전히 있어줘.”
“아, 잠깐만요. 오, 오빠!”
“내가 지켜줄게. 지금까지 그랬듯이.”
할 말만 일방적으로 내뱉은 뒤. 나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하늘 위로 시선을 슬쩍 들었다.
푸화악!
발아래에서 블러드 스트림이, 맹렬한 기운을 응축하기 시작했다.
“와라.”
시커먼 균열.
그 너머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인영들.
그들을 최대한 한 눈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전부…….”
지구의 인간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그들을 형상을 하나하나 노려보면서.
나는 입가를 한껏 비틀어 올렸다.
“…죽여버리겠어.”
투학!
블러드 스트림이 발동되었다.
발사된 화살처럼, 적들을 향해 올곧게 쇄도했다.
[엔딩2― 영원을 꿰뚫는 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