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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32화 (232/235)

232화

<루트1― 왕을 죽인다>

삐빅.

패널의 첫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다.

힘아리가 없는 손짓에 비해, 손끝은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껏 눌렀다.

“…오호.”

내 선택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신. 흥미에 찬 탄성을 나직이 흘린다.

강수아의 얼굴이 성큼,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초인.”

첫 번째 선택지.

왕을… 강수아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화신은 아무래도, 그것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 듯하다.

“…….”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다. 반쯤 감긴 눈으로 화신의 눈동자 안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고 한참 후. 짤막하게 대답해줬다.

“이게 맞는 것 같아서.”

복합적인 의미로 대답했다.

그리고 갸웃, 내 예상대로 화신은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 선택엔 맞고 틀리고가 없다. 초인.”

“…그러냐.”

“그럼. 그저 후회를 더 하느냐, 덜 하느냐의 차이다. 선택과 포기의 문제지.”

“선택. 포기.”

화신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이 선택으로 내가 후회하는 건 뭐가 있을까. 나는 뭘 포기하게 되는 걸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다.

‘…수아의 목숨.’

회귀를 1033번이나 반복한 근본적인 이유.

사실상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까지의 내 모든 회귀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이 선택을 한 뒤의 나는…….

‘남는 게 뭐가 있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난 이 선택지를 골랐다.

모르겠으니까 발생하는 일말의 가능성. 아마도 이게, 나한테 유일하게 남은 것일 테니까.

“네 전부를 희생해서. 이 세상을 구하겠다는 건가.”

화신은 이번에도 먼저 중얼거렸다.

내 생각을 앞지르듯이, 그 뒤로도 놈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모범적이군. 또한 아주 정석적이야.”

그리고 짝짝짝.

놈은 여유롭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화신의 지긋한 시선이 날 위아래로 품평하듯 훑어갔다.

“지금의 자네는 성인군자 그 자체로구나. 초인. 흐흐.”

“…….”

“내가 생각한 자네와는 어울리지 않아.”

화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마디 덧붙인다.

네가 내 뭘 안다고 떠들어. 그렇게 쏘아붙이려다, 그것도 구질구질해서 그만뒀다.

그러자 화신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내가 왈가왈부할 부분은 아니겠지. 그게 자네의 선택이라면야.”

“…그러면?”

“거리낄 거 있겠나. 어서 종막을 시작해보자고. 초인.”

화악!

화신은 수아를 조종했고. 양팔을 넓게 벌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치, 있는 힘껏 날 껴안으려는 듯한 행색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죽여라.”

물론 그렇게 로맨틱한 장면은 아니다.

그 증거로, 스릉! 나 역시 자연스럽게 허공의 인벤토리를 뒤적였고. 크로노스 대거를 꺼내 수아에게 겨누었다.

단검이 저 가느다란 목에 닿기까지, 앞으로 5보.

“세계를 구해라.”

그 와중에 화신이 한 마디 한다.

앞으로 3보.

“이 여인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으로. 세계는 재구축되리라……!”

광소가 뒤섞인 목소리가 골통을 윙윙 울린다.

그리고 앞으로, 1보.

“자아!!”

퍼걱!!

화신이 수아의 입을 쩍 벌리는 순간. 내가 그 입에 단검을 쑤셔넣었다.

뭔가 더 말하려던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린 것이다.

“끄… 컥.”

죽기 직전의 생물이 내는 단말마의 신음. 치명상을 암시하는 미미한 경련.

단검 손잡이를 타고, 그녀의 죽음이 전해져온다.

“오… 하, 앗.”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하앗, 오… 빠…아.”

일그러짐이 없는 강수아의 목소리다.

그녀가 날 부른다. 애타게 연신 핏줄기와 목소리를 토해내면서, 내 쪽으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녀가 슬쩍, 눈웃음을 쳤다.

“정말, 정말… 로. 미안… 해요.”

털썩.

수아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심하게 익숙한 외마디를 남긴 채. 그렇게 내 앞에서 죽어버렸다.

“…….”

미안하다고.

예상치 못하게 허를 찔렸다. 하필이면 그 말을 남기고 갈 줄이야.

눈앞에 시체가 된 그녀가, 내가 알던 수아의 기억과 겹쳐간다.

“아… 아아.”

이마를 싸매고 잠깐 비틀거렸다.

최후에 화신은 강수아에게 몸을 돌려줬다. 이건 자비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내 기분은 나락까지 추락했다.

[최후의 던전 마스터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삐빅, 패널음이 들려온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눈앞에 떠오르는 패널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축하합니다. 모든 시나리오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최종 단계, <에필로그>로 이행합니다.]

드디어 최종 보스를 내 손으로 죽였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도 않던,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의 끝이 도래했다.

그런 소리였다.

“…아.”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몸이 점차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피로감과 졸음이 순식간에 온몸을 짓누른다.

“크, 으욱……!”

눈이 저절로 감겨온다.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부질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졸음이 정신을 순식간에 침잠시켰다.

털썩. 나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아야.”

정신이 심하게 몽롱하다.

이미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홀린 듯이 강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수아, 야…….”

마치 발악하듯이. 그 이름을 뇌리 깊은 곳에 각인시키듯이.

구질구질하다 싶을 정도로 이름을 연호했다.

이젠 반쯤은 광기였다.

“수… 아…….”

언제까지 그렇게 반복했지?

그리고 왜, 그런 부질없는 짓을 했지?

“…….”

나도 이제 잘 모르겠다.

곧바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 * *

“야! 한정용!! 눈 안 떠?!”

퍼뜩.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화들짝 고개를 휘저어 집중했다. 그리고 입가에 흐르는 침을 황급히 닦아냈다.

“어. 왜.”

언제 졸았냐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눈앞의 소꿉친구는 속지 않는다.

“뭘 왜야. 너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있잖아!”

빠악!

소꿉친구… 강서윤이 내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경멸 어린 시선과 매도의 말도 함께였다.

엄청난 포상의 향연.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전부 듣고 있었어.”

“그러셔? 내가 뭐라 그랬는데.”

“…….”

거짓말이 5초 만에 발각될 위기에 처했다.

“…음.”

여기서 무슨 변명을 얼마나 조리있게 지껄이든. 강서윤은 화를 낸다.

잘 알고 있지. 이런 자잘한 대화는 숱하게 나눴으니까.

십년지기 친구 사이란 꽤 녹록지 않다.

“미안. 사실 안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강서윤이 가장 화를 덜 내는 선택지를 골랐다.

서윤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고. 이내 내 어깨를 불만스럽게 두들겼다.

“너 지망 고등학교! 이제 어쩔 거냐고 물어보고 있었잖아!”

“아아.”

그제야 탄식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예상 범위의 질문이었다. 요즘 개나 소나 나한테 이걸 물어보니까. 어찌 보면 예상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흘깃,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

익숙한 교실의 풍경이 나를 반긴다.

사평중학교 3학년 2반의 교실. 창밖으로는 저녁놀이 들어와 교실 전체를 발갛게 칠했고. 덕분에 강서윤의 얼굴도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다.

“…….”

벌써 1년 가까이. 그것도 평일 내내 보고 살았던 풍경이다.

익숙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

나는 문득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대기화면 중앙. 오늘의 일자와 시간이 표시됐다.

[2021년 11월 27일]

[PM. 05:03]

초겨울의 방과후에 당연히 뜰만한 시간이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는 한동안 그것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음.”

이내 나는 복잡미묘한 신음을 흘렸다.

뭐랄까. 그 당연한 시간 표기에 요상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스르륵, 시선을 강서윤에게 들어 올렸다.

“엉? 뭐, 뭔데. 왜 갑자기 꼴아봐.”

서윤이는 갑자기 주시당하자 살짝 몸을 움츠렸다.

멍한 정신으로 소꿉친구 면상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의 두터운 교복 소매가 훌쩍, 내 앞으로 다가왔다.

빠악! 두 번째 꿀밤이 날아온 것이다.

“뭐, 뭔데! 왜 쳐다보냐니까?! 말을 해 말을!”

“…아니. 그게.”

대화하다 졸았던 것도 모자라 뜬금없이 묵언수행. 강서윤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까지 자극돼 있었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좀 이상한 얘긴데. 이상하게 듣진 마.”

“뭐, 뭐야. 뭔데 그리 후까시를 잡아!”

“잠깐 졸고 일어나니까 말이야. 갑자기 주변에서 엄청난 위화감 같은 게 느껴진다.”

“…허?”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이상한 데에 떨어진 느낌이라 해야 하나. 좀 복잡한데…….”

“아니. 야. 잠깐. 스탑.”

서윤이의 표정이 황당과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내 그 시선에서 측은함이 물씬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또 뭔 개소리야 이 새낀? 아깐 대화하다 갑자기 병든 닭새끼마냥 꾸벅꾸벅 졸더니. 너 점심 급식에 대마초 말아먹었냐?”

“…진짠데.”

“위화감은 모르겠고! 넌 좀 위기감이나 느끼라고. 이 개빡통 새꺄!”

갑자기 서윤이가 극딜을 먹이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건 반박할 마음도 안 든다. 좀 어이가 없어져 미간을 슬쩍 좁혔다.

“뭐. 갑자기 왜 욕을 하고 그러냐.”

“욕이 안 나오게 생겼어? 너 X발 이번 기말고사도 개망했다며! 뒤에서 3등!”

“…씁.”

“그래서 상담해달랄 땐 언제고! 바쁜 사람 불러다 졸고 앉았으니 새꺄! 사람이 화가 나냐 안 나냐! 응?!”

그래. 생각해보니 그랬었다.

뭔 중2병마냥 위화감 타령이나 하고 있냐.

내가 위화감을 느껴야 할 건. 3년 내내 야무지게 조져놓은 내신과 시험 성적들이다.

“너… 나, 나랑 같은 고등학교, 무조건 가겠다면서!”

강서윤이 일갈하며 책상에 상체를 한껏 기댔고,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녀의 기어드는 목소리에서 야속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사, 사람이 기껏 도와주는데 말이야! 이렇게 당사자가 비협조적이면 어떡하냐고!”

“…미안해. 진짜로.”

“흥. 말은!”

그래. 지금 내 최우선 과제는 서윤이와 같은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것. 정확히는 성적이 조져버린 현 상황에서 그 돌파구를 강구하는 것이다.

지금 나한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너도 이제 좀 진지하게 생각하란 말이야. 진짜!”

“그래. 알겠다.”

“자. 이거라도 마시고 정신 차려, 좀! 안 마시고 남겨두길 잘했네!”

독려와 비난을 적절히 쏟아내던 강서윤이었고. 별안간 책상 모서리에 놓여있던 뭔가를 집어들어 내게 들이밀었다.

그건 오늘 우유급식으로 나왔던… 딸기우유였다.

“어.”

생각보다도 탄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나는 영문 모를 조바심을 느끼며 그것을 집어들었다.

한동안 내 시선이, 딸기우유의 분홍빛 표지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서윤아.”

나는 강서윤을 불렀다.

목소리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너. 혹시… 여동생, 있었던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따로 없다.

갑자기 딸기우유를 보고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내뱉어놓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정신을 차려보니, 난 그런 걸 묻고 있었다.

“뭐어?”

그리고 서윤이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해괴하게 뒤틀린 표정이었다.

“넌 뭔데 이제 와서 그런 개소릴 하냐? 나 금지옥엽 외동딸이다. 우리 집 가족 구성을 아직도 몰라??”

“…아니. 그게.”

“있지도 않은 여동생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데. 어디서 내 배다른 여동생 소식이라도 들었어? 앙?!”

역시 서윤이에게 여동생은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분명히 그게 맞았고. 서윤이도 그게 맞다고 공인해줬다.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기대? 빗나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왜 강서윤한테 여동생이 있길 기대한 거냐. 그것도 뜬금없이 딸기우유를 보고 말이야.

‘무슨 상관관계가 있길래.’

내 사고방식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서윤이의 화난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뭐…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기왕 이렇게 된 거. 가공의 강서윤 여동생을 한 번 망상해본다.

일단 성격은 강서윤처럼 괄괄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단발보단 장발이 좋겠고. 아무튼 강서윤과는 최대한 안 닮은 여동생이면 금상첨화다.

‘만약 그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지금의 강서윤과 나는 어떤 관계가 되었을까.

아무튼 나는 강서윤이 아니라, 그 여동생 쪽을 더 좋아했을 게 분명하다.

“에이씨. 야! 일단 오늘은 그냥 집이나 가!”

혼자 십덕 망상하면서 실실 웃고 있자니. 뒷머리를 긁적이던 강서윤이 별안간 파장 선언을 해버렸다.

나는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다.

“갑자기 왜. 상담은 어쩌고.”

“그 상담받는 네 상태가 지금 병신같잖아! 새꺄!”

“…쓰읍.”

“그냥 내일 해. 내일!”

강서윤은 빠르게 가방을 싸기 시작했고.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녀가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다 흘깃, 나를 돌아봤다.

“한정용. 내일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급한 일은… 없지.”

“그렇겠지. 너 어차피 내일도 십창 한가하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팩트 금지다.”

분하지만 사실이다.

급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과 또 그다음 날도. 오늘처럼 개같이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될 게 뻔하니까.

이변 하나 없이 재미없는 인생이다.

지금까지 내가 항상 그랬듯. 내일도 똑같이 반복될 예정이다.

“뭐… 그래. 내일.”

이변도 없고. 한결같이 평화롭고. 자극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없고.

또 강서윤에겐 여동생 따위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내일… 하자.”

서두를 필요는 없다.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지.

아무것도.

[엔딩1― 무엇도 없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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