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9)>
던전 마스터 ‘시간의 마녀’들의 말마따나. 시간은 하릴없이 앞으로 흘렀다.
던전의 붕괴와 공략 역시, 파죽지세로 이어졌다.
―…진군하라.
―마왕님을 위하여!!
제6던전 <아브락사스>.
전체적으로 알 같은 모양을 한 마왕성에, 수없이 포진한 마물들을 뚫고 던전 마스터인 <마왕 데미안>을 잡아야 하는 던전이다.
“라이트닝 헬릭스.”
파지직!
스킬 <글레이프니르>가 놈의 온몸을 속박했고. 잇따라 내 최고 애용 스킬인 라이트닝 헬릭스가 발동된다.
“죽어.”
콰자자작!
선명한 청백색 잔상이 일자로 데미안을 가르고 지나간다. 뒤따라 무수한 검상이 흐드러지며, 내 신형은 저만치 멀리서 홀연히 나타났다.
―크아아앗!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엑스트라가 말이 많아.”
푸화악!
마왕 데미안은 삼류 악당 대사와 함께 절명했다.
무려 11번째 붕괴의 던전 마스터 치곤, 꽤나 맥아리 없는 최후였다.
“…후우.”
던전 마스터 보상품으로 ‘혁명의 로자리아’라는 A급 목걸이를 얻었다.
마법저항력을 꽤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아이템으로, 쉽게 잡은 것에 비해 능력치는 꽤 쓸 만하다.
문제는 이미 내가 목에 차고 있다는 거고. 중복착용은 불가하다는 거지.
“잘했어요 오빠. 칭찬해줄게요, 칭찬!”
“…애완견 취급이냐.”
베이스에 돌아오자, 수아가 오랜만에 장난을 쳐왔다.
어딘가 어색하고 경직된 행색. 하지만 그 노력이 가상하길래, 나도 평소처럼 적절한 대답으로 무난하게 응수해줬다.
그렇게 숨죽인 평화 속에서.
하루가 속절없이 지나갔다.
* * *
11차 붕괴까지 나름 무난하게 막아냈다.
내 컨디션은 괜찮고, 무력도 절정에 달했다.
게다가 이세라와 서윤이와 수아, 무려 아무도 죽지 않았다. 1033회차 통틀어 최고의 절호조라고 말할 수 있겠지.
‘마지막 붕괴까지. 이제 세 번.’
12, 13, 그리고 14차 붕괴.
거기서 한 계단만 더 오르면. 15차 붕괴의 ‘그 놈’과 다시 만날 수 있다.
다시 만나는 것도 꽤 오랜만이군.
그 시커멓고 압도적인 형상을 떠올린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과 공포에 손끝을 조금 떨었다.
“이번에야말로… 뭔가, 다를까.”
육사도를 다 모으기까지 코앞이다.
이번에야말로 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놈의 정체는 대체 뭘까.
육사도들이 말하는 ‘왕’이, 그 15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지금 나 혼자 고민해봐야 대가리만 아프다.
우선은 육사도나 다 모은 다음 생각하자. 그래야 프라키가 뭐라도 더 알려줄 거고. 그러면 뭐라도 더 알게 되겠지.
그게 순서가 맞겠지.
“…가볼까.”
오늘이 마침 수확의 시간이었다.
내게 없는 마지막 육사도, <목 잘린 붉은 용>.
놈과 거래했던 2주의 기간. 그 리미트가 바로… 오늘이다.
* * *
철그럭, 철그럭.
두터운 갑주의 금속 마찰음. 묵직한 발소리가 을씨년스러운 도로를 울렸다.
나는 지금 혈천갑을 두른 채, 익숙한 교회의 주변에 와있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애늙은이처럼 중얼거렸다.
약 2주 간의 계약기간 중. 파견(?)해 놨던 식신에게선 딱히 연락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근황 보고를 위한 정기 연락 정도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다는 건.’
오경태는 높은 확률로 지금도 무사하다.
놈에게 이변이 생겼거나 사망 위기가 닥치면 곧장 내게 연락하도록 지시를 해 놨다. 그러니 연락이 없다는 건, 그런 위기가 없었다는 소리다.
“대단한 새끼. 맞긴 맞았구나.”
세계최강 헌터인 양호성도 7차 붕괴면 뒤져버린다.
근데 이 새낀 뭔 재주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냐. 이 정도 생존력이면 확실히, 프라키가 관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든다.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라든가…….”
그쯤에서 상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식신이 보내오는 마력 파장을 추적해 오경태의 위치를 추적해온 결과, 나는 익숙한 여의도의 교회에 도달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던전교 임시 주둔지.’
정확히는 주둔지(였던 것)이라고 해야겠다.
이번 생엔 내가 알던 그 던전교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건물도, 여느 거리에나 널려 있는 흔한 폐건물에 불과했다.
“…….”
새삼 을씨년스럽게 우뚝 서 있는 교회를 쳐다봤고, 그 다음엔 주변 거리를 훑었다. 꽤 오랫동안 그것을 반복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거리의 모습.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의도에서 붕괴가 없으면 이런 느낌이구만.’
기억 속의 거리보단 상태가 훨씬 양호했다.
이번 회차에선 유일하게 이곳에서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폐허’는 됐어도 ‘초토화’까지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몰골이 된 건, 그냥 순수하게 인간끼리의 분쟁 때문이다.
“숨어도 하필이면… 여기 숨냐. 경태야.”
저벅저벅.
교회의 거대한 출입구를 지나쳐 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현자의 눈.’
기억보다 지나치게 깨끗한 교회 복도를 걷던 와중. 나는 현자의 눈을 사용해 마력 파장을 사출했다.
파지직! 색적용 마력 파장이 교회 전역을 탐색해갔다.
‘안에 숨어 있는 생명체는…….’
스르륵.
색적을 마친 마력 파장이 다시 내게 돌아왔고. 취합된 정보를 재조합해 분석했다.
이내 금방 결론이 나왔다.
“18명쯤인가.”
종족은 당연히 인간.
미성년의 어린애가 셋. 노인 하나. 나머진 전부 청년층.
남녀비율은 대충 8대 2 정도.
‘정석이네. 완전히.’
현재까지 살아남은 서울의 생존자가 대충 저런 비율일 거다.
이곳의 난민들은 그 정석적인 비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위치는 대충 파악했다.’
이 교회는 몇 번이나… 아니. 몇십 몇백 번이나 와 봤던 곳이다.
당연히 대략적인 구조는 머릿속에 들어 있고. 나는 그 구조 안에 스캔한 생존자들의 위치를 박아 넣었다.
‘최대한 접촉은 피한다.’
목표인 오경태 외의 생존자들과 마주칠 생각은 없다.
상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세상이 일단 요지경이다. 만나봐야 안 좋은 이벤트만 벌어질 게 뻔하다.
전에 대전역에서만 해도 시비를 걸렸었지. 굳이 사서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 2층 쪽인가.”
널찍하게 이어지는 회랑의 한 구석. 나는 자리에 멈춰서 가만히 위를 쳐다봤다.
2층으로 이어지는 난간이 시야 끝자락에 보인다.
[스킬 발동: 비약]
투학!
허공으로 힘차게 솟구쳐, 2층 난간 위에 가볍게 착지.
지나치게 익숙한… 그러나 너무 깨끗해서 이질감이 드는 2층 복도가 보인다. 원래는 던전교의 간부실로 자주 사용되던 그 구획이었다.
‘하긴. 숨으려면 여기가 최적이긴 하지.’
원형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
그 벽을 따라 무수히 나열된 출입문들.
원래 창고로 쓰이던 방이나 비품실, 탕비실 같은 잡스런 방까지 합하면. 무려 수십 개에 달하는 개인실이 늘어져 있다.
“다 보인다. 경태야.”
파지직!
다시 한 번 현자의 눈을 발동. 오경태의 지척에 있는 식신을 기준으로, 오경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여기.’
터벅.
수십 개의 문들 중에서 하나. 정확히 오경태가 숨어 있는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조용히 들어가야 하나.’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테다.
상대가 막강한 던전 마스터인 것도 아니고. 들키면 곤란해지는 상황도 아니다.
행여 오경태가 저항하면 힘으로 제압하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죽여야 할 사이다.’
정은 빨리 뗄수록 좋겠지.
숨을 슬쩍 들이켠 뒤, 나는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그리고 전방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이리오너라.”
콰아앙!
문짝은 반으로 쪼개져 방 안으로 나뒹굴었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폭삭 솟아오른다.
그것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깐 대기했다.
―거 등장 한 번 박력있구만. 자네.
스르륵.
흙먼지를 뚫고 시커먼 실루엣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볼 것도 없었다. 직전에 들려온 장중한 목소리로 곧장 정체를 깨달았다.
천천히 걷혀가는 시야 속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떼인 돈 받으러 왔다. 프라키.”
―허헛. 일수꾼인가?
시답잖은 유머로 서로 쓴웃음 한 번씩.
이내 나는 표정을 다시 고치고, 놈을 가만히 노려봤다.
“알아서 기어 나와 있었군. 눈치는 합격이다.”
―방금 나왔네, 방금. 자네가 문 박살내는 바람에 급하게 나왔다고.
“…아하.”
―굳이 문을 박살내고 들어와야겠나?
“쓸데없는 행동은 아니었네. 결과적으로 널 바로 불러냈으니.”
―스읍. 그리 말하니 할 말은 없구만.
솔직히 대화도 길게 하고 싶지 않다.
파지직! 곧장 단검을 꺼내들었고, 인챈트 스킬을 발동해 벼락을 바른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미약한 조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어떻게, 원하던 바는 이뤘나 모르겠네. 인간 관찰 한댔던가.”
약간의 조롱이 담긴 한 마디였다.
프라키는 분명히 비웃는 기색을 눈치챘다. 하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으음! 충분했네. 여한이 없을 정도야.
“그렇다니 다행이군.”
―자비를 베풀어준 자네에겐 내 재차 감사하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진짜 목적은 뭐였냐.”
―…음?
끝까지 시치미를 떼길래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프라키는 끝까지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벅거릴 뿐이다. 나는 결국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파고 들었다.
“진짜 인간 관찰 한다고 2주나 유예한 건 아닐 거고. 진짜 목적이 뭐냐고.”
―…아, 아니. 진짜 인간 관찰 맞네.
“지랄 자제해라.”
―으음. 이거야 원. 내가 어떻게 해야 믿어주겠나?
프라키는 난처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어떻게 해야?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프라키가 무슨 이유를 대든 그게 사실이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긴 하다.
그가 순순히 사실을 말해줘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단이 없는 것이다.
“…흐.”
본래 쓸데없는 대화는 최대한 피하는 나다.
하지만 눈앞의 괴인… 아니, 괴상한 육사도는 좀 다르다. 약간 사람을 오기 생기게 만든다고 할까. 뇌절을 시키는 재주가 있다.
소위 말하는, 킹받는 새끼다.
“그러면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지껄여.”
―오호. 그럴싸한?
“인간 관찰 같은 개소리 말고. 좀 믿을 만한 구실을 대면 믿어주지. 최소한 믿는 시늉이라도 해준다.”
―그렇군. 평범한 인간 관찰은 자네가 듣기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런 소리인가.
“비슷하다.”
―으음. 대충 이해했네.
개연성을 붙여주면 되겠구먼.
프라키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아, 그래.
이내 씨이익.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미소가 오경태의 입게 걸렸다.
―내 이 오경태 친구의 뇌를 여러 번 뒤져 보다 알아낸 건데. 이 동네엔 그런 말이 있다지?
“무슨 말.”
―여행가면 남는 게 사진이다. 이거였던가?
음울한 미소를 직면한 나는 본능적으로 온몸이 굳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던 몸이 해동되는 순간. 타이밍 좋게 놈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해주면 이해가 좀 될 걸세. 왕의 옥좌.
“그런 의미가 뭔데. 새꺄.”
―이 낯선 세계의 낯선 생물들과 접할 기회도 곧 끝난다. 그렇다면 그 전에 최대한 이 세계를 온몸으로 음미하고 싶다.
“…….”
―이 아름다웠던 세계가 이 차원, 이 우주 한 구석의 어딘가에 존재했었다. 그 사실을 기억에 최대한 각인하고 싶다. 그런 의미일세.
입술은 기괴하게 틀어졌지만. 프라키의 무표정한 시선은 한없이 진지하다.
농담을 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가올 여행의 끝을 아쉬워하는 여행객. 아직 개연성이 부족한가?
지금 프라키는 말하고 있다.
아니,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여행의… 끝.”
육사도의 여행이 끝난다.
이곳을 떠난다. 다시 말해 지구에서 사라질 예정이다.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무한반복의 연극은, 이젠 정말로 끝이 머지않았다. 놈의 입으로 확약해준 셈이다.
“…아니.”
의심스러운 부분은 여전히 많다. 전부 거짓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그거면 충분해. 납득했다.”
―이해해 준다니 살았구먼. 클클.
비틀린 오경태의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으니 다음 국면으로 넘어갈 차례다. 나는 그 포문을 열기로 했다.
스릉!
번개를 머금은 칼날을 놈에게 겨누었다.
“나오고 말할 거냐. 아님 말하고 나올 거냐.”
두서고 없고 전후맥락도 없다.
하지만 당사자인 프라키는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을 거다. 그러니 이 정도만 말해줘도 충분하다.
―아아. 자네가 잊어버린 과거 말이군. 순간 뭔 소리인가 했잖나.
예상대로 프라키는 금세 알아차렸다.
그가 이내 고개를 미적지근하게 주억거렸다.
―자네는 어느 쪽이 좋을 것 같은가.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라. 묻는 건 무조건 나다.”
―거 쌀쌀맞구만, 떼잉.
“어떻게 할 거냐. 두 번째 묻는다.”
―딱히 달라질 것도 없지 않나? 결과적으론 둘 다 집행할 텐데 뭔 차이가 있나.
저것도 사실이긴 하다.
매 맞고 벌 받을래, 벌 받고 매 맞을래. 그런 답정너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프라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 상태로 말해주겠네. 어차피 달라질 게 없으니, 조금이라도 길게 이 친구를 살려놓는 쪽을 택하겠어.
“지극정성이시군. 숨겨놓은 지구의 자식이라도 되냐.”
―허헛. 볼수록 정 주게 되는 친구라니까. 자네가 이 친구랑 1033번이나 같이 있어봐야 해.
“소름 돋는 소리.”
잡설을 주고받는 것도 여기까지다.
나는 입을 콱 닫고 침묵했다. 그리고 시선을 한껏 날카롭게 벼렸다.
프라키는 침묵의 의미를 곧잘 파악했다.
―…클클. 어디부터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 그냥 내 편한 순서로 말하겠네.
놈이 드디어 본론을 입에 담는다.
나는 눈을 한껏 부릅뜬 채 놈을 주시했다.
―그래.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이걸세.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
놈의 말은 입술이 아니라, 뇌리에 직접 꽂혔다.
―자네는 원래부터 초인이 아니었다.
마치 후벼 파듯이.
두개골을 뚫고 박히는 목소리.
―즉.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것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는 프라키의 광소가 그새 한층 짙어진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의 복잡한 상황. 모두 그 사실로부터 출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