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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58화 (158/235)

158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

전투는 금세 종반부에 접어들었다.

‘다음엔 맞힌다’라는 공약은 아쉽게도 실천되지 못했지만.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 공방에서 성공해 냈다.

지금은 라이트닝 헬릭스가 흑기사의 왼팔에 적중했고. 갑옷 째로 새카만 숯덩이가 된 상태다.

―크아아아!!

문득 흑기사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쉬리리릭! 놈이 하나 남은 팔로 허겁지겁 새하얀 장검을 휘둘렀다. 참격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7개의 마력검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귀찮은 스킬이야.’

마력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궤도가 굉장히 변칙적이다. 견제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한쪽 팔을 무력화해서 양이 반감된 게 위안이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어김없이 양쪽 손아귀에 나선의 번개를 머금은 뒤. 왼손의 번개를 허공에 격발시켜 주위로 자장을 형성했다.

빠지지직! 방사형으로 넓게 퍼진 강렬한 전류가, 수십의 마력검과 충돌해 소멸했다.

―카하아아앗!

후우웅!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리 옆을 스쳤다.

어느새 후방에서 점멸하듯 나타난 흑기사. 그가 내뻗은 새하얀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였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패턴인데.”

마력검이나 가시 촉수로 시야를 교란한 뒤 배후로 순간이동. 그리고 섬전 같은 기습 찌르기.

이것이 아까부터 반복된 놈의 공격 패턴이었다.

“당해주는 것도 원 투 데이지.”

현재는 완전히 파악이 완료된 상태.

이렇게까지 응용력이 없어서야. 당해주기가 더 어려운 수준이다.

‘처음 당했을 땐 좀 당황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공격법에 살점을 좀 내줬다. 그래서 리스토레이션으로 찢겨나간 갑옷과 살점을 수복하고, 곧바로 대처법을 강구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찾아낸 대처법대로 놈을 상대하고 있다.

“끝이다.”

아까 쏟아내지 않고 아껴뒀던 오른손의 나선 번개.

기습이 실패하고 한껏 가까워진 칠흑의 기사의 정면에서, 제로 거리 사격을 가했다.

파지지직! 금빛 섬광이 폭음과 함께 쇄도한다.

―크우욱!

흑기사의 짤막한 신음.

직후 놈은 빠르게 신형을 물리는 한편. 치달리는 나선의 번개를 향해서 검을 힘껏 던져버렸다.

파지지직! 날아온 검 끝이 번개와 맞닿으며 섬광을 내뿜었다.

“또 목숨은 건졌네.”

흑기사의 검은 일종의 피뢰침 역할을 해 내 스킬을 막아냈다.

하지만 강력한 번개를 직격당한 여파로 시커멓게 타들어가 산산조각이 났고. 지금도 칼날의 잔해가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젠 무슨 수로 막아낼 거냐.”

아까도 똑같은 방식으로 한 번. 흑기사는 내 벼락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래서 두 번째까지 막아낸 지금, 놈의 수중엔 더 이상 성한 칼이 없었다.

쉬리릭! 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사복검을 뻗었다.

―크읏!!

부우웅!

엿가락처럼 늘어난 사복검의 궤도가 흑기사의 목을 정확히 노렸지만. 흑기사 역시 노련하게 타이밍을 맞춰 회피 기동을 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정돈 예상했다.

“어딜.”

한 차례 손목에 스냅. 휘둘린 칼날 채찍의 궤도를 순간적으로 꺾는다.

쉬리릭! 사복검의 궤적이 구불텅, 역동적으로 휘었고. 사선으로 회피했던 흑기사의 뒷목을 다시금 파고들었다.

―무…슨!

흑기사는 기습적인 2차 공격까진 피해내지 못했다.

촤르르륵! 칼날 채찍이 놈의 목을 몇 겹이고 휘감았다. 나는 재빨리 어깨를 한껏 당겨, 그대로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꾸드드득. 놈의 갑주가 찌뿌듯한 염을 토했다.

―끄허. 커헉!

우드드득!

흑기사의 목을 감싼 갑주가 우그러지고. 그 틈으로 사복검이 점점 깊숙이 파고든다.

이대로 계속 조이면 아마, 금세 놈의 목이 잘려나가겠지.

‘그렇겐 안 해주지.’

물론 쉽게 죽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면 죽이지도 않을 거면서 놈의 목을 단단히 포박한 이유?

이래야 놈을 죽이지 않은 채, 정확히 빈사 상태로만 만들 방법이 생기기 때문이다.

“슬슬 이쯤이면 됐나.”

콰자작!

마침내 칼날의 파편들이 갑옷을 완전히 우그러뜨리고. 찢겨나간 갑주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쯤.

나는 비릿한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궁금하긴 하네. 지금의 너는 얼마나 버틸까.”

―그윽……?!

“짜릿짜릿할 거다.”

짤막한 통보 후. 나는 사복검을 쥔 손에 한껏 힘을 불어넣었다.

키잉! 마력광이 터지며 스킬이 발동되었다.

[스킬 발동: 인챈트―번개의 분노]

파지지직!

사복검의 칼날 표면으로 시퍼런 번개가 치달리기 시작한다.

뿌리부터 시작한 날카로운 스파크가 칼날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갔고. 마침내 단단히 조르고 있는 흑기사의 목까지 흘러 들어간다.

―끄아아아악!!

펄떡펄떡.

문자 그대로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흑기사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온몸을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흑기사가 고통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증오 어린 목소리를 냈다.

―놔… 이거, 놓으라고……! 이, 이 새끼가아아……!!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듯이 놈이 팔다리를 허우적댄다.

그러나 놈은 이미 왼쪽 팔을 완전히 잃었고. 무기인 쌍검도 양쪽 다 대파된 상태다.

더 이상, 내게 저항할 수단이 하나도 없다.

―이… 새끼가아아!!

파바바박!

직후 놈의 망토가 수십 가닥으로 갈라져 시커먼 가시 촉수가 되었고. 내 사방을 점한 채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다.

생각이 틀렸군. 그러고 보니 저 스킬이 남아있구나.

“쯧.”

혀를 찼지만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키잉! 노련하게 스킬을 발동할 마력을 끌어올렸다.

‘저건 물리 공격인가? 아니면 마법?’

잘 모르겠다.

망토가 변형되는 걸 보면 물리 같기도 한데. 시커멓게 꿀렁거리는 형태를 보면 마력으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정체가 정확하지 않다면, 답은 하나다.

‘둘 다 막아보자.’

파바박!

눈앞으로 빠르게 두 개의 역장이 펼쳐졌다.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스킬 발동: 안티 노멀 리플렉터]

순식간에 두 가지 스킬을 동시 캐스팅. 마법과 물리, 두 개의 반사 역장을 한 번에 펼쳐냈다.

최고위 S급 마법사 헌터인 양호성도 기절초풍할 행위였다만. 1031회차 D급 헌터인 한정용에겐 딱히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어디에 반응하는지나 볼까.’

방어를 구축한 나는 태평하게 떠올렸고.

콰작! 콰지직! 수십 가닥의 가시 촉수가 본격적으로, 맹렬하게 역장 표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흠칫 놀랐다.

“전부 반응한다고?”

마법 배리어와 물리 배리어. 촉수가 그 양쪽 모두를 두들기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마법과 물리. 양쪽 성질을 다 갖춘 건가.’

이런 부류의 스킬은 처음이다.

저 스킬의 정체는 뭐지. 그리고 저런 걸 사용하는 흑기사의 정체는 또 뭘까.

그런 의문들이 잠깐 떠올랐지만.

‘생각해서 뭐 하냐.’

시답잖은 찰나의 호기심. 해답이 나올 길이 없으면 생각조차 의미가 없다.

나는 고개를 휘저어 쓸데없는 상념들을 물려냈다.

―그… 아, 아아악……!!

파지직, 빠직!

그러는 동안에도 내가 지속적으로 흘려보낸 전류는, 흑기사를 갑옷 내부부터 철저하게 유린하는 중이다.

슬슬 이쯤인가. 나는 흑기사의 상태창을 열어봤다.

[몬스터 정보]

[명칭: 블러디 문 쉐도우]

[체력: 18 마력: 12]

[힘: 38 민첩: 51 지능: 27]

최초에 100을 넘어가던 체력이 10 대까지 삭감되었다.

통상적으로 상태창에 표기된 체력이 10%이하까지 떨어지면, 그때부터 해당 개체는 빈사 상태가 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3%까지 저하되면.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 못하는 사망 직전 상태가 된다.

‘10초만 더 조진다.’

상태창을 물리지 않은 채. 인챈트 스킬의 출력을 약간 강화했다.

파지지직! 칼날에 치달리는 전류의 섬광이 한층 강해졌다.

―끄아아아아악!!

그에 따라 흑기사의 절규도 한층 심해졌다.

처절하게 울려퍼지는 비명을 배경음 삼아, 나는 ‘흑기사 반만 죽이기 프로젝트’의 박차를 가해가고 있었다.

상태창을 흘끔거리며 스킬을 중단할 타이밍을 재던, 바로 그 순간.

[모든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별안간 상태창을 가리며 패널이 떠오른다.

생소하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통보다.

“…어.”

나는 숨을 덜컥 삼켰고.

동시에 흑기사의 죽어가던 육신에서는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히든 던전 마스터, ‘길을 잃은 까마귀’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쿠르르륵!

흑기사의 갑옷 틈새에서 시커먼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놈을 보호하듯 단단히 감싼 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푸화악! 폭발하는 강맹한 투기에, 놈의 목을 조르던 사복검도 속절없이 튕겨 나왔다.

―…이대로는, 나는, 쓰러질 수… 없어……!

삐비빅, 삐빅!

그리고 눈앞에 떠있던 흑기사의 상태 패널이, 실시간으로 대격변을 일으켰다.

글자와 수치들이 어지럽게 재구성되어 간다.

[몬스터 정보]

[명칭: 길을 잃은 까마귀]

[체력: 198 마력: 132]

[힘: 84 민첩: 99 지능: 37]

[상세: 제74던전 ‘계승의 화원’의 유일한 레귤러 몬스터. 그 전락의 끝자락. 최후의 순간까지 하얀 그릇을 지키기 위해, 그는 육사도의 화신이 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상태창이 변화를 완전히 마친 후.

나는 변해버린 명칭란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길을 잃은, 까마귀.”

멍하니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되뇌었다.

이내 상세 설명까지 모두 읽은 뒤. 부릅뜬 눈이 홀린 듯이 흑기사 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누구도.

상태창의 변화에 맞게 흑기사 본인도 변화를 마친 상태였다.

아니. 이젠 더 이상은, 지금처럼 ‘흑기사’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한 수준이다.

―절대로. 해치게 두지 않는다……!!

너덜거리는 갑주 위. 시커먼 투기가 휘감겨 무형의 갑옷이 되었다.

등 뒤에서 너덜거리던 망토는 사라졌다. 대신 등갑을 뚫고 시커먼 마력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와, 시커먼 날개의 형상으로 일렁거렸다.

―죽여버린다. 전부, 죽여버릴 거야……!

우드득!

중얼거리던 흑기사… ‘까마귀’가, 별안간 제 가슴팍에 손을 쑤셔 넣었다.

우지직, 꾸드득. 무형의 갑옷을 꿰뚫은 팔뚝이 연신 움찔거린다. 피처럼 질척한 검붉은 액체가 구멍 사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 아, 아아아……!!

뿌드드득!

이내 까마귀가 손을 빼냈고. 그 손아귀엔 시뻘건 심장이 붙들려 있었다.

콰자작! 놈이 자기 심장을 쥐어 터뜨렸다. 그러자 거기서 터져 나온 혈액들이 꾸덕하게 모여들어, 거대한 특대검의 형상이 되었다.

―너도. 죽여주겠다. 지금 당장.

다인 슬라이프를 연상시키는 핏빛의 대검.

그러나 다인 슬라이프보다 훨씬 크고. 또한 한층 투박하다.

차라리 몽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압도적인 폭력과 죽음의 냄새가 난다.

―멸망의 화염.

그리고 까마귀의 짤막한 영창이 들렸다.

푸화악! 놈의 대검 위로 피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진홍의 화염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직후. 찰나의 순간이었다.

―죽어어어어!!!

순간 눈이 포착하지 못했다.

이미 까마귀의 고함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 템포 늦게 반응해 몸을 돌린 순간. 거대한 대검이 나를 쪼개버릴 기세로 추락하고 있었다.

“미친……!”

스킬이 아니다.

방금 건 순전히 육체의 움직임. 그런데도 내가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놓쳤다.

민첩 스탯 99. 나와 같은 만렙임을 실감한다.

“크읏!”

채애앵! 찢어지는 금속음이 울렸다.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갈래로 쪼개지기 직전. 나는 합쳐진 사복검을 가까스로 휘둘러 까마귀의 일격을 막아냈다.

―그으윽!!

“……큿!”

키기긱, 끼긱!

맞붙은 칼날이 비명을 질러댔고. 까마귀의 대검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에 혈천갑이 한껏 뜨겁게 달아올랐다.

화르륵! 튀어 오르는 불티로 시야가 온통 새빨갛게 수놓인다.

“크, 으윽……!”

그리고 나는 힘에 부친 신음과 함께 속절없이 밀려났다.

양손으로 내리친 거대한 핏빛 대검. 그리고 무려 84라는 무시하지 못할 힘 스탯.

급하게 휘두른 사복검으론,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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