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결국 나는 스탯창을 띄우는 데 성공했다.
스르륵. 눈앞에 시커먼 기사의 스펙이 떠올랐다.
[몬스터 정보]
[명칭: 블러디 문 쉐도우]
[체력: 115 마력: 35]
[힘: 38 민첩: 51 지능: 27]
[상세: 제74던전 ‘계승의 화원’의 유일한 레귤러 몬스터. 수백 년간 축적된 무력함에 짓눌려 전추해 버린 이계의 용사. 지금은 원망과 증오만이 남은 망집의 찌꺼기가 되었다.]
딱 3차 붕괴 때의 ‘계승의 화원’ 몬스터 스펙이다.
‘블러디 문 쉐도우’라는 괴상망측한 이름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저놈을 편의상 ‘흑기사’쯤으로 부르는 편이다.
‘딱히 다를 건 없군.’
일단 그걸 알아낸 시점에서 한시름은 덜었다. 참았던 숨을 슬쩍 흘렸다.
키잉! 그리고 곧장 사복검을 풀어헤쳤다.
‘그러면… 일단 제압하고 생각한다.’
이 던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당연히 눈앞에 서있는 저 칠흑의 기사.
74던전의 던전 마스터는 무력이 전혀 없는 케이스다. ‘유령의 축제’의 꼭두각시 인형과 비슷한, 바지 사장 타입의 보스.
‘그러니까 저놈만 없으면 돼.’
눈앞의 흑기사가 이 던전 무력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러니까 저 흑기사만 무력화하면 일단 급한 불은 끈다. 더 이상 피해가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있다.
속전속결. 선공은 가져가겠다.
“후우.”
사복검을 길게 늘어뜨려 수평으로 들었다.
푸화악! 여느 때처럼 5연속 비약. 순식간에 지그재그로 파고들었다.
“좀 맞자.”
단박에 거리를 좁혀버린 내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쉬리릭! 사복검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흑기사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노리는 곳은 갑옷의 이음새. 종잇장 같은 찰나의 틈으로, 붉은 칼날 파편들이 빨려 들어가듯 날아간다.
―크읏……!
놈은 가까스로 반응해 상체를 비틀었다.
콰자작! 내 찌르기는 이음새를 뚫지 못하고 갑옷 표면을 긁었다.
놈의 오른쪽 견갑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지며 찢겨나갔지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이 정돈 당연하고.’
빗나갔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저 흑기사가 반응하리란 걸 이미 알았다. 약간이나마 갑옷에 손괴를 입혔으니, 굳이 따지자면 예상보단 이득을 봤다.
쉬리릭! 곧바로 손목을 꺾어 2격, 3격을 가했다.
―크… 으으윽!
흑기사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채앵, 채챙! 사복검의 변칙적인 공격 궤도를 노련하게 읽어내고. 양손의 쌍검을 귀신같이 휘둘러 내 공격을 효율적으로 저지해냈다.
‘이건 좀, 예상 밖……?’
이어진 공격도 막힌 순간. 그제야 나도 좀 놀랐다.
기존의 3차 붕괴에서, 원래 저 쌍검의 흑기사는 내 2차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다.
방금 추격타에서 적어도 한 대는 적중했어야 정상이다.
‘우연인가.’
그래. 한 번 정도는 운이 좋았을 수 있다.
좀 더 데이터를 쌓아볼 필요가 있다. 이대로 전투를 속행한다.
판단을 마친 내가 상체를 한껏 낮추는 순간.
―크아아아!!
흑기사가 먼저 포효하며 쌍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키이잉! 놈의 양쪽 측방으로 시퍼런 마력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죽어어!!
이내 한 쪽당 일곱 개씩. 총 14개의 날카로운 마력의 칼날이 허공에 맺혔다.
피피핑! 놈이 손짓하자 마력검이 일제히 내게 쏟아져 왔다.
“무슨……!”
나는 전에 없이 당황했고. 황급히 스킬을 발동했다.
치지징! 반투명한 배리어가 눈앞을 물들인다.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콰지지직!
배리어 표면을 마력검이 일제히 두들겼다. 둔중한 충격파가 전신에 은은하게 퍼져왔다.
다행히 배리어가 파괴되진 않았지만, 제법 묵직한 위력이었다.
“…뭐냐. 이 스킬.”
파지직!
여전히 배리어와 마찰하는 마력검들을 눈에 담았고.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중얼거렸다.
놀라는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처음 보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처음 보다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내가 놀란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벌써 열 번도 넘게, 갖가지 상황에서 다 만나본 저놈의 기술을… 처음 본다고?
“벼, 변했어요. 뭔가가… 뭔가가.”
이세라의 혼란에 찬 목소리가 머리를 윙윙 울렸다.
허. 헛웃음이 입가에 슬쩍 어렸다.
“…변했네. 정말로.”
그 말이 이제야 좀 빡세게 실감된다.
태평하게 놀라는 건 거기까지다. 정신을 차린 나는 배리어로 흐르는 마력을 능란하게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파지직!
배리어의 표면에서 마력 파동이 크게 요동쳤다.
방어막을 찢어발길 기세로 마찰하는 마력검들의 방향을, 어느 순간 일제히 역회전시켰다.
“재롱 잔치 해보시든가.”
피피피핑!
내게 날아왔던 14개의 마력검. 날아온 궤도를 그대로 역행해, 흑기사의 급소를 향해 쇄도한다.
―이런……!
흑기사의 투구 안에서 당황에 찬 탄성이 흘렀다.
채채챙! 놈이 양손을 바쁘게 휘두르며 마력검을 쳐내기 시작했다. 마력검은 놈의 쌍검과 맞닿을 때마다 푸른 빛무리가 되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또 뭐라도 남아있냐.”
놈이 열심히 방어하는 동안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
이미 5연속 비약을 발동했고. 나는 희미한 잔상만을 남긴 채 흑기사의 배후를 점한 상태였다.
“없으면… 맞아야겠지.”
쇄애액! 사복검이 흑기사의 허리를 갈라버릴 기세로 쇄도한다.
실제로 놈에게 남은 비장의 카드가 없었다면. 아마 그대로 잘라버렸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카드가 없다면 말이다.
―크아아아앗!!
흑기사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러자 놈의 낡아빠진 망토가 시커먼 그림자에 삼켜져 일렁거렸고. 그대로 파바바박! 구불텅거리는 수십 개의 가시 촉수로 변해 내게 날아왔다.
“……!”
그 기습적인 일격.
그리고 엄청난 속도와 기세.
‘저건 좀…….’
위험한 냄새가 난다.
순간적으로 판단한 나는, 즉시 공격을 거두고 백 스텝을 밟아 수비 태세에 들어갔다.
쇄애액! 사방에서 시커먼 가시 촉수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이것도 처음 보는 스킬.’
파팟! 파바박!
사복검을 휘둘러 가시 촉수를 찢어버리고. 일부 눈 먼 촉수들은 몸을 약간씩 비틀어 가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촉수들은 집요하고 빨랐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빠르기에 문제는 없다.
“남은 밑천. 더 있냐.”
푸화악!
모든 가시 촉수의 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고. 마지막 가시 촉수를 사복검으로 휘감아 짓이겨 버린 그 순간.
나는 쌍검의 흑기사를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있으면 지금 꺼내라.”
찢겨나간 기분 나쁜 가시 촉수들은 금세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고. 이내 흑기사의 망토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주춤거리는 흑기사를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없으면. 다음 차례엔 진짜 뒤진다.”
움찔.
흑기사의 쌍검 끝단이 동시에 떨리기 시작했다.
검의 손잡이를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가락을 감싼 갑주가 그르렁거리는 소음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아무도. 절대로. 해치지 못해.
쿠르륵.
흑기사의 투구 안쪽. 시뻘건 안광이 한층 짙게 일렁거렸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흑기사의 상체가 한껏 낮게 웅크려졌고. 쌍검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겨누어졌다.
특유의 전투태세를 갖추며, 놈은 주문처럼 되뇌었다.
―몇 번. 몇십 번. 몇백 번을 바쳐서라도……!
투학!!
놈이 지면을 박찼고. 쏘아진 대포알처럼 일순간에 내게 달려들었다.
시커먼 신형이 순식간에 거대해진다. 쌍검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내게 들이닥쳤다.
―절대로……! 반드시! 지켜내겠다!!!
이건 그나마 좀 익숙한 대사. 그리고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나머지 깊은 안도감을 느꼈고.
“…하.”
그런 나 자신에게 씁쓸함을 느꼈다.
채채앵! 사복검과 블라이스의 단검으로 흑기사의 일격은 쉽사리 막혔다.
4개의 날붙이를 사이에 두고, 코앞에서 대치한 나와 흑기사.
“……!”
―그… 으으윽!
각자의 투구 너머로 시선이 얽혀 들어간다.
놈의 광기 어린 붉은 시선을 보자, 나도 모르게 상념이 깊어졌다.
‘나는, 루프가 바뀌기만 기다려 왔던 거 아니었냐?’
내가 바라 마지않던 대로 루프가 바뀌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설렘이나 호기심보다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 전과 똑같은 전개가 나오고서야 안심하는 내가 있었다.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
어느샌가 고정된 루프에 안주했던 거다.
입으론 ‘바꾸고 싶다’라고 앵무새처럼 지껄이면서도. 사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바뀌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안 되지.”
나약해진 나를 다그치듯 중얼거렸다.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맞지만. 눈앞의 흑기사 들으라고 하는 소리기도 했다.
나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놈의 시뻘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방금 돌진은 빈틈이 너무 많았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
―…….
“거의 뭐 카미카제였지.”
흑기사는 대꾸가 없다.
다만 꾸드득, 흑백의 쌍검에서 전해지는 압력이 한층 강해진다. 전력을 다해 나를 베어버리려 하는 것이다.
나도 밀리지 않도록 양손에 힘을 불어넣었고. 계속 말했다.
“헛짓거리 하지 마라.”
―…….
“일부러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거겠지. 노림수는 이미 다 파악했다.”
―……!
맞닿은 쌍검의 칼날이 잘게 떨렸다.
짙은 동요가 느껴진다. 놈은 내 말에 정곡을 찔려 당황하고 있다.
아무렴 당황스러울 것이다. 저 흑기사의 반전 포인트이자 가장 성가신 기믹을, 제대로 붙어보기도 전에 들켜버렸으니.
‘던전 마스터가 살아있는 동안. 흑기사는 몇 번을 죽여도 부활했었지.’
단순히 상처가 회복된다는 느낌이 아니다.
아예 놈이 죽기 전으로 시간이 돌아가 버리는 수준이다. ‘죽였던 사실이 무효가 됐다’라는 느낌으로 끊임없이, 줄기차게 부활해 댄다.
나는 한층 사나운 웃음을 투구 안에서 머금었고.
“그러니 절대로 죽여주진 않아. 제압만 할 거다.”
내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했다.
키기기긱! 양손에 순간적으로 힘을 줘 상대를 밀어냈다. 대치를 끝낸 뒤, 순간적으로 허공을 박차고 전방으로 파고들었다.
―그윽……!
흑기사가 당황의 탄성을 흘린다.
이내 파파팟! 놈이 재빠르게 양손을 마구 휘둘러, 수십 개의 마력검을 허공에 생성해 냈다. 새파란 칼날의 유성우가 나를 향해 일점폭격을 가해온다.
“처음에나 당황해서 당해줬지.”
나는 가소로운 나머지 중얼거렸고.
파지지직! 비어있는 왼손에 나선의 번개 쐐기를 그러모았다.
투학! 맹렬히 회전하는 두 줄기의 번개가 발사되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같은 기술을 아까랑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다니.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인 모양인데. 1031회차의 한정용은 그렇게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이… 이런!
흑기사가 짤막하게 탄식한다.
놈도 단박에 직감한 듯하다. 본인이 쏟아낸 수십 발의 마력검 따위보다, 내가 발사한 두 발의 나선번개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크으윽!
파팟! 놈이 지면을 박차며 황급히 자리를 이탈했다.
동시에 수십 발의 마력검 세례와 두 줄기 번개가 허공에서 맞붙었다.
나는 입맛을 다셨고.
“까비.”
콰자작! 번개는 모든 마력검을 산산이 분쇄하며 쾌진격을 이어나갔다.
우드드득! 라이트닝 헬릭스는 방금까지 흑기사가 서있던 지면을 새카맣게 지져버린 뒤. 망막을 태울 듯한 섬광을 토해내며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다음엔 맞혀주지.”
지직, 치지직.
나는 왼손을 까딱거려 스파크를 털어냈고. 사복검을 흑기사의 정면으로 겨누었다.
흑기사는 갑옷에 달린 마력 추진기를 이용해, 내 위쪽을 점거한 채 천천히 활공하는 중이었다.
“한 방에 뒤지지나 마라.”
투학!
블러드 스트림을 발동. 동시에 비약 스킬을 한계까지 연발했다.
마치 혈액으로 발사된 로켓처럼. 새빨간 잔영을 남기며 신형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