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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59화 (159/235)

159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대치가 길어져서 좋을 건 없었다.

저쪽은 양손 특대검. 나는 한 손 사복검. 무기 중량의 차이부터가 너무 완연했다.

―후웃……!

키기기긱!

황급히 사복검을 비틀어 대검을 측면으로 흘려냈다.

양호성에게 뒤져 가며 배운 소드 패링. 그것을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다.

“위험했구만.”

푸쉬익!

블러드 스트림을 운용해 순식간에 까마귀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갑작스런 충격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가늘게 뜬 두 눈이, 각성한 까마귀의 정면으로 향했다.

“…대충 알았다. 네 실력.”

모 만화 대사대로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라면 나도 참 좋았을 텐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간담이 서늘해지는데. 시발.’

‘죽고 싶어졌다’가 아니고 ‘죽을지도 모르겠다’ 수준.

잠깐이라도 놈에게서 눈을 떼면. 그대로 내 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철그럭! 사복검을 다시 채찍 형태로 늘어뜨렸고. 중얼거렸다.

“이제 진심으로 간다.”

물론 지금까지라고 딱히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가슴 한편에 약간의 심적 여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방금의 단 한 합으로, 그것이 깡그리 사라졌다.

‘인벤토리 오픈.’

파지직!

재빨리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고. 블라이스의 단검과 크로노스 대거를 각각 양손에 꼬나쥔 채 빼냈다.

손등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복검까지. 세 개의 주력 무기가 세팅되었다.

―죽인다… 죽인다.

그에 맞서듯 까마귀도 행동을 개시했다.

파지지직! 놈이 양손을 각기 좌우로 뻗었고. 그 손끝에서 시커먼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스파크에 이끌리듯, 아까 산산조각 났던 쌍검의 칼날 파편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반드시. 죽여버린다……!!

스르릉!

곧 완전히 수복된 흑백의 쌍검이 놈의 좌우로 늘어섰다.

허공에 둥둥 떠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들고 있는 양 정확히 나를 겨눈다. 그 익숙한 검들의 배치에 헛웃음을 흘렸다.

“어검술이냐.”

장수혁의 무기 사용법과 지나치게 비슷하다.

손을 쓰지 않고 검을 조종하는 스킬, 어검술이 분명하다.

“개나 소나 다 쓰는구만. 무슨.”

장수혁이 어검술 스킬을 얻은 던전은 여기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각성한 히든 보스… ‘길을 잃은 까마귀’가, 원래부터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스킬인 듯하다.

“아무래도 좋아.”

저 정도는 변수는 괜찮다. 그 문제의 장수혁 덕분에, 어검술의 대처에는 나름 능숙한 편이니까.

스르릉. 나는 총 세 자루의 검을 들어 올린 뒤, 파지지직! 세 날붙이 위로 일제히 전류를 방사시켰다.

“간다.”

블러드 스트림의 출력을 폭발적으로 증폭했다.

푸화악! 내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동시에, 눈앞에서 까마귀의 신형도 사라졌다.

지금부터는 반쯤 본능의 영역이었다.

“……!”

―……!

카카카카캉!

순식간에 울리는 무수한 금속음.

직후 거센 충격파가 공기를 미친 듯이 찢어발겼고. 신형이 교차한 나와 까마귀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한 방.”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감각만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1초 이하의 찰나. 우리는 약 10번의 참격을 교환했고. 어검술을 이용한 까마귀의 철통 방어를 내 단검이 꿰뚫었다.

‘얕았다.’

하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묵직한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윽……!

아니나 다를까.

신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놈은 이미 내 쪽으로 질풍처럼 쇄도하고 있었다.

기세가 전혀 죽지 않았다.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다는 증거.

―카아아아앗!!

수십 미터라는 거리가 무색하다.

눈 한 번 깜빡인 순간. 이미 내 코앞에서 대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검을 맞댈 준비를 하던 찰나.

‘마법을 섞어볼까.’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즉시 기각했다.

‘괜히 뒤질 확률만 늘 거야.’

적이 뒤질 확률이 아니다. 내가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발동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은 축에 속하는 나의 주력 공격 마법, ‘라이트닝 헬릭스’만 해도 캐스팅 시간이 0.5초는 된다.

‘발동하기도 전에 대가리에 대검 꽂히겠지.’

상대는 민첩 스탯 99, 나와 똑같은 수준의 괴물. 어쭙잖게 견제 따윌 섞다간 역관광 당할 위험만 늘어난다.

차라리 순수한 피지컬 싸움으로 끝장 보는 게 속 편하다.

―하아아압!!

찰나의 상념을 비집고 까마귀의 공격이 들이닥쳤다.

깊게 생각할 틈도 안 주는군. 나는 노련하게 움직여 그것을 받아냈다.

‘좌하단. 우중단. 마지막은 정면.’

쉬쉬쉭!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 들어오는 쌍검을 상체를 숙여 회피.

그리고 까마귀가 직접 휘두르는 대검은, 내 쌍단검을 교차해 정면에서 막아냈다.

“흡.”

콰아앙!!

금속음이 아니라 폭발음이 터졌다.

그만큼 육중한 일격이었다. 검이 아니라 거대한 아파트 따위가 짓누르는 듯하다.

“크후우……!”

화르륵!

한숨을 내쉬는 내 앞으로 불티가 튀었고, 압도적인 열기가 불쑥 밀어닥쳤다. 숨 쉬기가 약간 괴로워진다.

저 대검 표면에서 타오르는 불꽃. 아까부터 생각보다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큰일 나겠는데.’

작열통은 진통 계열 스킬로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하다.

저 대검에 살갗이 스치는 순간, 나는 작열통으로 잠깐 움직임이 둔해질 것이고. 그 찰나가 어쩌면 이번 생의 내 최후가 될 수도 있겠다.

“…노 히트 보스런이라니.”

게다가 적의 민첩 스탯은 나와 동등한 수준까지 상승했고. 상대를 죽이면 안 된다는 특수 조건까지 붙어있다.

아니, 아니구나.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각성한 까마귀는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다.

그렇다면 각성한 지금도, 죽으면 다시 부활하는 기믹은 그대로 유지되는 건가? 그건 좀 의문이었다.

‘만약 맞다면……?’

저만한 스펙의 적을 상대로 완급 조절까지 해야 된다는 소리인데. 그러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상 이상으로 빡세지는 난이도에 혀를 내둘렀다.

‘일단은 전투에 집중한다.’

상대의 공세는 한 번 막아냈다.

저쪽이 턴을 소모했으니, 이젠 내가 공격할 차례.

“죽어보자.”

키기기긱!

단숨에 양손에 힘을 줘 까마귀의 대검을 밀어냈고. 순간적으로 벌어진 틈을 파고들었다.

투학! 까마귀의 정면 방향으로 웅크린 신형이 쇄도한다.

‘힘으론 좀 밀리겠지만…….’

단검은 파괴력이 약한 대신, 장검보다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그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활로가 생긴다.

쉬리릭! 두 자루의 단검이 순식간에 놈의 급소를 찔러들었다.

―후웃!!

하지만 내가 까마귀의 공격을 무난하게 막아냈듯. 놈의 방어도 녹록지 않았다.

채챙! 채애앵! 놈은 대검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내 파상공세를 차근차근 수비해 냈다.

‘같은 쌍검을 다뤄서 그런 건가.’

상대 역시 쌍검의 대처법이 익숙한 행색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특질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공방이 전에 없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크… 하아앗!!

“후웃……!”

콰앙! 카카캉!

불꽃과 섬광이 쉴 새도 없이 시야를 간지럽힌다.

까마귀는 조금씩 밀리거나 갑옷을 스치는 정도의 틈은 보여줬지만. 판도를 뒤엎을 치명적 빈틈만큼은 절대로 내주지 않았다.

‘위험.’

어느 순간 경종이 뒷목을 후려친다.

재빨리 현자의 눈으로 전방위를 스캔했다. 어느새 흑백의 쌍검이 배후에서 역공을 가해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어딜.”

쉬리릭, 채앵!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사복검을 채찍처럼 휘둘러 사각의 기습을 막아냈다.

―크아아앗!!

투콰앙!

그 순간 까마귀가 태세를 급변했다.

별안간 방어를 멈추고, 오히려 내게 정면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일단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것은 악수가 됐다.

―죽어어어!!

콰콰콰쾅!

놈이 처절하게 절규하며 검을 크게 휘둘렀고. 그 궤적을 따라 시뻘건 화염의 열파가 반월을 그리며 쏟아졌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열기 앞에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하다하다 검기까지.”

점입가경으로 지랄맞아지는 까마귀의 패턴에 혀를 차는 한편.

키이잉! 나는 오른손을 어깨 뒤로 한껏 물렸다.

“필살기 싸움 해보자 이거냐.”

받아주겠다. 누가 이기나 보자.

쿠르르륵! 말아 쥔 주먹 앞으로 시뻘건 혈액을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나선의 회전이 극에 달하는 순간, 나는 오른손을 힘껏 내질렀다.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투콰앙!

뻗어 나온 주먹 끝. 거대한 나선의 혈사포가 전방으로 쇄도했다.

반월 모양의 날카로운 화염과, 나선으로 회전하는 혈액의 파동이 일점에서 맞닿았다.

‘과연. 위력은?’

콰콰콰쾅!

압도적인 폭발이 일대를 휩쓸었다.

일차적으로 막대한 충격파가 혈천갑을 넘어 심장을 후려쳤고. 이후엔 가공할 열파와 끈적한 혈액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치지직! 피가 지글지글 끓는 매캐한 냄새가 사방에 자욱해진다.

‘위력은… 호각인가.’

혈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나는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 흐으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한번 화염의 검기를 준비하는 까마귀가 그 중심에 있었다.

나는 조용히 혀를 찼다.

“위험한데.”

이 흐름은 좋지 않다.

서로 상쇄되는 수준의 필살기 위력. 그러나 저쪽은 재사용에 제한이 적어 보이고, 내 쪽은 재사용할 때마다 체력을 꽤나 빨린다.

‘라이트닝 헬릭스를 중첩하자니, 시전 속도가 너무 느리고.’

위력이야 압살하겠지만 연속 발사가 어려워서 기각.

결국 이대로 필살기 난사전으로 흘러간다면, 나는 자멸의 수순을 밟게 될 거다.

‘결단을.’

바로 이다음.

다음 필살기 격돌의 순간이 승부처다. 거기서 사활을 걸고 끝장을 보겠다.

꾸드득. 그렇게 결심한 나는 재차 주먹을 말아 쥐었다.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다시 한번 혈사포가 발사되었고.

다시 한번 까마귀의 화염 검기와 맞닿았다.

―카아아아앗!!

콰콰콰앙!

연쇄폭발이 대기와 지면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아까보다도 더욱 자욱해진 토사와 흙먼지, 새빨갛게 피어오른 핏방울의 증기가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지금이다.’

투하악!

그 순간 나는 블러드 스트림을 고속으로 분사했고. 자욱한 혈안개 속으로 유성처럼 파고들었다.

현자의 눈으로 재구성한 내 시야엔, 단 하나의 마력 잔향이 일렁이고 있었다.

‘기회는 이번뿐.’

한 번의 필살기가 격돌하고. 까마귀가 다음 필살기를 다시 준비하는 지금.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승기를 잡을 수 없다.

이제부턴 이판사판. 도박수를 감행한다.

“죽어보자.”

푸화악! 혈안개를 비집고 들어가며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키키잉! 두 번의 찢어지는 금속음이 터졌다.

―큭!!

눈앞에는 흑백의 섬광이 어른거렸다.

어검술로 날아다니던 까마귀의 쌍검이 내 기습을 막아낸 것이다.

―이, 놈이… 어느 틈에!

까마귀도 안개 속에서 내 존재를 포착해 냈다.

키리릭! 놈이 재빨리 쌍검을 조작해 나를 공격해 왔다. 허공에 무수한 마력검을 생성해 쏘아 보내고, 그 뒤를 추격하듯 본체가 찔러 들어왔다.

“후우우.”

숨을 있는 대로 들이켠 후. 수많은 공격 궤도를 하나씩 머릿속에 입력한다.

모든 계산을 마쳤다. 몸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

채채채챙!

고개를 꺾고, 허리를 비틀며. 신들린 것처럼 양손을 휘둘렀다.

마력검의 폭격이 내 참격을 중심으로 튕겨나간다. 그러나 일부는 다리를 스치고, 가슴팍에 적중하고, 견갑과 투구에 튕겨나갔다.

‘이걸로 마지막.’

그리고 최후의 두 개.

마력검의 본체인 흑백의 쌍검이 양방에서 찔러 들어왔다. 나는 극한까지 끌어올린 육체를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혹사시켰다.

“흐읍……!”

키이잉!

단검을 교차했고, 그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나는… 멍청한 탄성을 흘려야 했다.

“아.”

크로노스 대거가 하늘 높이 튕겨나갔다.

마지막의 마지막, 칼날들이 교차하는 최후의 순간. 까마귀가 어검술의 궤도를 순식간에 비틀어 페이크를 가한 것이다.

“이, 런.”

날아간 크로노스 대거의 손잡이엔… 토막 난 내 왼손이 붙어있다.

손목 째로 잘려나간 것이다.

‘이럴 수가.’

방심했다. 생각이 짧았다.

장수혁과 같은 기술을 쓴다고 해서, 스킬의 운용 레벨까지 같을 리가 없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 궤도를 바꿀 줄은……!’

검이 또 하나의 수족 같다.

그야말로 신검합일의 경지. 장수혁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운용력이다.

“크윽……!!”

어쨌든 결과는 명확했다.

내 왼손이 잘려나갔다. 공방은 명백한 패배였다.

이젠 패배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죽어어어어!!!

화르륵!

죽음이 머리 위로 성큼 다가온다.

이번 생의 죽음은, 진홍의 불꽃을 머금은 대검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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