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
“……?”
“아앙?”
나와 보팔의 시선이 동시에 이브에게 향했다.
이브는 보팔에게 기대와 설렘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흠칫. 보팔이 또 한 번 어깨를 움찔거렸다.
“뭐, 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이브의 시선에 유독 쫄아있는 보팔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아까부터 이브의 눈빛이 여간 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나 같아도 저런 열렬한 구애의 시선을 받으면 경계하겠다.
물론 이브는, 보팔의 질색하는 반응 따윈 아랑곳 않았다.
“토끼야. 너 되게 귀엽다! 나는 이브라고 해.”
갑자기 이브가 통성명을 시도한다.
워낙 뜬금없는 상황이다. 나는 물론이고 보팔도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뭐라고?”
아니구나. 그게 아니었군.
보팔의 행색을 보니, 귀가 잘 안 들려서 이브의 말을 아예 못들은 것 같다.
그쯤에서 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깐… 교대나 해야겠다.’
이브가 보팔과 엄청 대화하고 싶어 한다.
마침 잘 됐다. 혼잡스러운 내 머리도 정리할 겸. 잠깐 이브한테 보팔의 말동무를 시켜주기로 했다.
처척, 재빨리 메가폰을 이브의 입 앞으로 갖다댔다.
“이거 갖고 말해라, 이브.”
“응? 이게 뭔데?”
“확성기. 그거 없으면 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아, 그렇구나. 고마워 아빠!”
이브가 방글거리며 내게서 메가폰을 채갔고. 꿈꾸는 소녀처럼 밝은 얼굴로 다시 보팔을 쳐다봤다.
삐이익, 메가폰의 노이즈가 한 차례. 노이즈가 멎은 직후 이브가 다시 말한다.
“토끼야. 안녕?”
“…어. 그, 그래.”
경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브의 첫인사.
그런 순진무구한 반응이 낯설었던 것일까. 보팔은 한층 경계하는 몸짓으로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저건 좀 놀랍네.’
진기한 광경에 지켜보던 내가 다 탄성을 흘렸다.
농부의 겉옷을 벗기는 건 강풍이 아니라 쨍쨍한 햇빛이라던가. 가짜 광기가 진짜 광기를 만나서 잔뜩 주눅 든 모양새다.
아무튼 이브의 뜬금없는 파상공세는 계속됐다.
“토끼야, 너 이름이 뭐니?”
“…뭐?”
“이름 말이야. 네 이름! 어어, 아직 잘 안 들리나?”
“아, 아니. 들린다. 들리긴 잘 들려.”
“그렇구나. 다행이다! 난 이브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야? 응?”
보팔은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하다. 흉터 때문에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이 혼란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내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보팔은 하, 코웃음을 쳤다.
“뭐, 뭔 소릴 하나 했더니. 내 이름이 궁금한 거냐?”
“응. 이름을 알려줘, 토끼야!”
“착각하지 마라, 계집. 같은 육사도라 해서 알랑거릴 요량이었나 본데. 나는 너같이 저능한 개체와는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어.”
“으응?”
어느새 보팔은 전처럼 오만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평정을 되찾은 대신. 모친과 싸가지가 상호 화학반응으로 터져버린 모습이다.
“네놈과 나는 격이 달라.”
“격이… 달라? 토끼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우주의 의지를 이어 받은…….”
“아하. 아직 이름이 없는 거구나. 그렇지?!”
“…엉?”
“그럼 잠깐 기다려 봐. 내가 지금 지어줄게!”
넌지시 풀리려던 보팔의 뒷 설정이 시원하게 입구컷 당했다.
남이야 뭐라 씨불여 쌌든,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브는 전에 없이 해맑은 얼굴로 방방 뛰기 시작했다. 보팔의 이름을 직접 짓는 게 어지간히 신나는 듯하다.
“으음, 으으음! 어떤 이름이 좋을까?”
“…아니. 이봐?”
“그래! 토식이로 하자.”
“토, 토식……?”
“괜찮지? 응? 어울려! 진짜 귀여운 이름이야! 토식이!!”
졸지에 ‘토식이’로 창씨개명 당한 보팔이 넋 나간 표정을 짓는다.
이내 힐끗, 이브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빠! 토식이 어때? 잘 지었지? 그치?”
“…음.”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치킨을 두 마리 챙겨줄 것 같은 이름이다. 내 감상은 그것이었으니까.
그걸 알아서 긍정적으로 해석했는지, 이브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부터 넌 토식이야. 토식아!”
“아니, 잠깐! 이 새꺄! 내 말 좀 들어! 내 이름은 토식이가 아냐!”
“으응, 아냐! 넌 이제 토식이야!”
“아니라고 X발! 이 새끼 귀가 처먹었나!!”
현직 ‘귀머거리’ 토끼한테 귀가 먹었냐는 극찬을 듣는 이브.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머리는 좀 복잡한데…….’
저 태평한 꼴을 보고 있자니. 착잡했던 기분은 좀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결 차분해진 머리로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왕이라고 했지.’
보팔이 마지막에 내뱉었던 말들.
아까부터 그것들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이번 왕은 꽤나 취향이 독특하고 과격하구만. 이딴 정신 나간 조건을 최초 트리거부터 걸다니 말이야.”
보팔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건 내 입장에서 또 한 번의 반전 요소다.
저 말에 따르면, 내게 영원회귀를 무려 999번이나 강제시킨 개새끼의 정체는 바로…….
‘화신이 아니라, 그 왕이란 새끼였다는 건데.’
그렇다면 대체 <왕>은 누구인가.
전부터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그놈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흘깃. 나도 모르게 보팔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저놈은… 왕의 정체를 알고 있나?’
잘 모르겠다. 그러니 반드시 알아봐야겠다.
우선 지금은 머리부터 좀 식히고, 나중에 좀 더 정보를 캐내보자.
나는 그런 결론까지 도달하고 둘을 계속 지켜봤다.
“토식아. 이리 와봐! 좀 안아봐도 돼? 응?”
“안 돼! 꺼져!! 저리 가라고!!”
“아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응?”
“으아악! 오, 옥좌야! 살려줘! 저 새끼가 나 못살게 군다! 좀 막아달라고!!”
뿅뿅뿅!
보팔… 아니. 토식이가 허겁지겁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내 다리 뒤에 숨어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대치한 두 중생을 번갈아 쳐다본 뒤. 쓴웃음을 머금었다.
“좀 대줘라, 토식아. 닳는 것도 아닌데.”
“…뭐, 뭣?!”
“다 끝나면 불러라. 나랑 얘기나 좀 더 하자.”
쟤는 대체, 내가 왜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꼴이 아주 좋아. 이브의 애완 토끼.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처절하게 절규하는 토식이와 달려드는 이브를 뒤로한 채.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단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 * *
휴일은 이런저런 일들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1031회차의 3차 게이트 붕괴일이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간 적은 또… 오랜만이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이번 3차 붕괴를 앞둔 나는 좀 이례적으로 행동했다. 아침 일찍부터 미리, 천안의 구세계 백화점으로 출장을 나온 것이다.
“와아. 아빠, 사람 무쟈게 많다~!”
당연히 옆에는 이브를 대동한 상태다.
그녀는 백화점 인근의 버스 터미널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브의 품에는 귀머거리 토끼… 통칭 토식이가 안겨 있다.
“…X발. 내가 왜 이딴 꼴을…….”
얼굴은 시종일관 우장창 구겨진 우거지상.
그런 주제에 중절모와 타이트한 양복을 쫙 빼입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시계토끼 같은 컨셉이다.
정확히는, 세상사 불만이 존나게 쌓여있는 시계토끼.
“…….”
토식이는 완전히 이브의 애완동물로 전락했다.
휴일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저거다.
‘난리도 아니었지. 아주.’
당연히 토식이도 처음엔 엄청나게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의 결국엔 굴복했다. 이브가 평범한 여성의 신체 능력을 가졌듯. 토식이도 평범한 토끼 수준의 완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토식이의 우스꽝스러운 꼬라지는, 당연히 이브의 억지가 주입된 결과물이다.
“아이. 왜 그래, 토식아. 잘 어울려. 진짜로!”
“조용히 해라. 이 미천한 계집아. 너랑 말 섞을 기분 아니니까.”
“토식아. 또또! 나쁜 말 하면 혼난댔지?!”
“…죄송합니다.”
지금은 이브의 으름장 한마디면 절대복종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원래 애들은 어른의 거울이라지. 이브는 강서윤이 몸소 가르쳐 줬던 ‘말 안 듣는 애새끼는 패야 제맛’ 교육론을 고스란히 토식이에게 적용했다.
“응, 잘했어 토식아. 대답은?”
“…아, 알겠습니다… 뿅.”
“아이, 잘했어! 너무 이쁘다, 우리 토식이!”
“…….”
그 하루에 걸친 ‘가정교육’의 결과가 지금의 상황.
생각지도 못한 방향의 주종 관계가, 생각보다 빠르게 확립되었다.
‘수아 어머니……. 저게 당신이 뿌린 씨앗이야.’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수아네 어머니를 멍하니 떠올려 본다.
아무튼 어제는, 가정 폭력이 어떤 경위로 세습되는지를 깨닫는 뜻깊은 하루였다.
“아빠, 근데 있잖아.”
문득 이브가 넌지시 나를 불러왔다.
곧장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토식이를 떡처럼 주무르는 이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냐. 이브.”
“이번엔 여기에 엄청 일찍 왔네? 전에는 안 그랬잖아.”
“아.”
“뭔가 이유라도 있었어?”
이브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추궁하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느낌이다.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니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줬다.
“이유라면 있지.”
“흐응. 뭔데?”
“뭐냐면…….”
그쯤에서 입을 덜컥 멈췄다.
그리고 보팔… 토식이 쪽으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음?”
토식이가 이브의 마수(?)에 저항하다 말고 나와 시선이 얽혔다.
놈의 행동이 일순 우뚝 정지했다. 우리는 잠깐 동안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쯧.”
이내 토식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는군. 나도 화답하듯 혀를 찬 뒤. 이브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미안. 지금은 밝힐 수가 없다.”
“에엥? 왜? 대체 뭐길래 그러는데?”
“…미안하다.”
거듭 사과하며 거절을 표하자, 이브의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그녀가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적지 않은 섭섭함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치. 뭐야. 또 나한텐 비밀이야?”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뭔데?”
“그런 건 아니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지금은.”
사실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그냥 그것이 어제 토식이와 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브와 토식이의 주종 관계가 확립된 이후. 나는 이브가 잠든 틈을 타, 토식이와 진중한 대화를 조금 더 나눴다.
“나를 손에 넣었으니. 이 촌극은 이제 본격적으로… 종막을 향해 달려갈 거다. 옥좌야.”
대화는 대체로 토식이 쪽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토식이… 아니. 육사도 <귀머거리 토끼>는, 내게 이런 말들을 해줬다.
“자잘한 설명들은 나중에 천천히 해주지. 우선은 모르면 일단 맞아가면서 배우자. 당장 내일 있을 붕괴부터가 급선무니까.”
던전과 던전 마스터의 정체.
그리고 육사도와 ‘왕’의 정체 등등.
내가 쏟아내는 무수한 질문들을 모조리 씹어 넘긴 뒤. 토식이는 잠든 이브와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나랑 저 계집을 데리고 붕괴 현장에 미리 가있어 봐라. 아주 재밌는 상황이 나올 거다.”
대답 대신 나온 건 그런 지시였다.
그리고 그는 ‘재밌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대신, 이런 제약을 걸었다.
“근데 저 계집한텐 웬만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마. 이게 대전제다. 알겠냐?”
그래서 함구시킨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더 알고 싶을 정도지. 무슨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지도, 왜 말하면 안 되는지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고.
“근데… 지금은 안 되면. 나중엔 된다는 소리지?”
문득 상념을 뚫고 이브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눈앞에 집중했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미소가 나를 반겼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말해줘. 알겠지?”
“…가능해지면, 반드시 말해줄게.”
“응. 좋아. 그러면 됐어!”
이브는 방긋 웃으며 흔쾌히 넘어가 줬다.
말 한 마디면 천 냥 빚 갚는다고. 전에 호감작(?) 해놓은 게 이번에도 유효했지 싶다.
졸지에 미연시까지 하고 있는 내 인생에 건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