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한껏 긴장한 채 전방을 주시했다.
이내 자욱한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빠르게 접근하던 작달막한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음? 뭘 그리 쫄아있어. 새끼들아. 내가 뭐 잡아먹냐?”
들려오는 목소리는 상당히 중후했다. 또한 언사가 꽤나 거칠었다.
던전을 오래 굴러먹은 베테랑 헌터들이 딱 저런 느낌인데. 역전의 노장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 나를 깨운 옥좌는… 너구만? 거기 우중충한 사내새끼.”
이내 걸걸한 목소리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고. 그 사이 완전히 드러난 형상을 시야에 담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허.”
뿅뿅뿅.
앙증맞은 발소리의 주인공은… 방금까지 토막 나있던 귀머거리 토끼.
‘킬러 래빗 보팔’이었다.
‘살아났네. 정말로.’
내 무릎 높이에도 채 못 미치는 험상궂은 토끼가 두 다리로 꼿꼿이 서있다.
놈은 내 발 앞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중이었다.
‘직립보행 흡연충 토끼?’
어질어질한 수식어들에 정신이 약간 혼미해진다.
그 와중에도 보팔의 혼잣말은 계속되었다.
“쓰으, X발. 몸이 이래 망가져서야. 담배 하나 제대로 못 피우겠구만.”
그나저나 저 토끼를 ‘서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그건 좀 의문이긴 하다.
보팔의 잘려있었던 목은 여전히 덜렁거렸고. 네 개의 다리 중에는 내가 붙여줬던 한 쪽만이 제대로 붙어있으니까.
‘공중에 떠있다…라고 해야 하나. 저건.’
토막난 나머지 팔다리를 대신하듯, 절단면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 몸통을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새빨간 기운을 중심으로 피와 살이 빠르게 재구성되었고. 지금도 팔다리를 빠르게 재생시키는 중이다.
“와아. 아빠, 토끼다. 토끼 귀여워……!”
문득 이브의 얼빠진 탄성이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이브가 반짝이는 시선으로 보팔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티의 장난감 성을 볼 때처럼 소유욕에 찬 눈빛이었다.
믿을 수 없는 반응에 나는 고개를 연신 꺾었다.
‘…귀여운가? 저딴 게?’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외계인 소녀감성엔 빈티지 스타일이 대세인가 보다.
문득 째릿, 보팔의 흉터로 일그러진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야. 옥좌야.”
“……?”
갑자기 ‘옥자’를 찾길래 이브부터 쳐다봤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브의 이름이 옥자는 아니지만, 일단 여자 이름을 부르니까 그랬다.
“…아.”
이내 옥자가 아닌 ‘옥좌’를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새삼 눈을 끔벅였고. 발치의 험상궂은 털 뭉치를 빤히 내려다봤다.
그는, 정확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부르냐.”
“넌 일단, 지금부터 목소리 좀 크게 내봐라.”
“…그건 또 무슨.”
“보다시피 내가 귀가 이 모양이라서 말이야. 지금도 네가 뭐라 쫑알대는지 하나도 안 들리거든.”
“…….”
하나 있는 손으로 양쪽 귀를 만지작거리는 보팔.
확실히 보팔은 양쪽 귀 모두 곱창이 나있긴 했다. 아무래도 저 찢겨 나간 귀는 회복이 불가능한 듯하다.
‘얘도 닉값은 충실하구만.’
근데 원래 토끼의 생태도 그런 식인가?
저 길쭉하게 튀어나온 귀가 잘려나가면, 이 외계 토끼처럼 청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메커니즘이야?
순간 그런 의문이 순간 뇌리를 스쳤지만.
‘…애초에 지구의 토끼는 직립보행도 안 하고. 말도 안 하고. 이마에 뿔도 안 달렸지.’
게다가 걸걸한 언사로 초면에 명령질을 하거나, 담배를 저리 맛있게 피우지도 않는다.
이 마당에서도 상식을 찾는 내가 좀 한심해졌다.
“앞으로 나랑 대화할 땐 크게 크게 말해라. 괜히 무시한다고 지랄하지 말고.”
“…그래. 명심하지.”
아무튼 보팔은 저걸 통보하기 위해 날 부른 듯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치켜들었던 단검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리춤에 납도했다.
일단 눈앞의 ‘히든 던전 마스터’에게서 적대의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
‘현자의 눈.’
두 번째 이유도 있다.
방금 은밀하게 놈의 상태창을 열어봤고,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킬러 래빗 보팔]
[체력: 1 마력: 1]
[힘: 1 민첩: 1 지능: 1]
[상세: 최초이자 최후의 던전, ‘잊혀진 근원’의 여섯 던전 마스터 중 하나. 죽어버린 왕의 하수인. 왕의 옥좌를 올바른 길로 계도하는 지혜의 주머니이자, 옥좌를 보필하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다.]
적어도 상태창상으론… 지구의 토끼와 비슷한 수준의 전투력.
이놈은 이브와 비슷한 과였다. 무력적으론 한없이 좁밥이라는 소리다.
“후. 읏차. 이제 좀 살 만하구만!”
귀머거리 토끼… 보팔은 금방 사지를 재생시켰다.
놈은 새롭게 돋아난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봤고. 이내 내 쪽을 쳐다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너도 옥좌는 옥좌구나?”
“음?”
“네 생체 마력 말이야. 마력이 아주 고급지고 쌔끈한데. 덕분에 내 팔다리도 금방 수복됐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 생체 마력……?”
“엉? 뭐라고? 안 들린다. 크게 좀 말하라니까!”
“…쓰읍.”
갑자기 요양원 도우미들의 고충을 통감하게 됐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긴 노이즈를 흘리는 메가폰이 들려 나왔다.
삐이익―! 확성기 끝을 보팔의 대가리에 향한 뒤 다시 말했다.
“방금 전 육체 회복. 내 생체 마력으로 한 거였냐.”
“음? 아아, 그래. 당연하지.”
확성기를 사용하니 의사소통이 좀 원활해졌다.
그나저나 놀랍도록 뻔뻔한 작태다.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약간 반응이 늦었다.
“남의 마력 훔쳐 써놓고 뭐 그리 당당하냐.”
“훔치다니. 말 한번 싸가지 없이 하는구나. 어린놈의 새끼가.”
보팔이 적반하장으로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놈이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를 한껏 깔며, 위협하듯 뇌까렸다.
“너는 옥좌고 난 토끼다. 이건 알고 있냐?”
“안다. 그게 뭐.”
“계약 관계가 그렇게 돼먹은 걸 내가 어쩌겠냐.”
“계약?”
“모든 육사도는 최종적으로 결국 옥좌에 귀속되지. 재림할 왕을 맞이할 옥좌를 보좌하는 무력이 되고. 지혜가 되며. 때론 육신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
방금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요절복통 시트콤처럼 흘러간다 싶었는데. 갑자기 보팔이 진지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별안간 보팔이 입매를 히죽 비틀어 올렸다.
“그게 이번 연극에서 우리의 관계다. 나는 너한테 영혼의 근본까지 종속된 노예란 말이다, 옥좌야.”
“내, 노예라고……?”
“그래. 그러니 애초에 ‘내 힘’이랄 게 처음부터 없어. 그러니 네 힘을 빌려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당당하게 노예 선언문을 읊는 보팔.
저 토끼한테 타락 세뇌 조교를 시도한 기억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저런 싸가지 없는 노예를 돈 주고 사들인 기억도 없다.
약간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았고.
“…노예 1호. 그러면,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냐.”
일단 자잘한 건 대충 넘기고. 실리나 챙기기로 했다.
삐이익! 메가폰의 노이즈가 방안을 울린다. 동시에 보팔의 답변이 들려왔다.
“나는 칼을 줄 거다, 옥좌야.”
툿. 보팔은 다 피운 담배를 뱉어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담배 하나를 주워들었다.
치익, 그가 손가락을 튕겨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나는 킬러 래빗 보팔. 신의 심장조차 베어내는 검을 네게 빌려줄 수 있지.”
“…검이라고.”
“그래. 그것이 내 영혼에 각인된 의무이자, 네 안의 옥좌에 종속된 계약의 핵심이다.”
보팔은 말을 마치고 후우, 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신의 심장도 베는 검을 빌려준다고 한다. 이브가 혈천갑으로 변신해서 내 전투를 보조하듯이, 어떤 강력한 무기를 주겠다는 뜻인가?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의 경험을 떠올려라, 한정용.
이 새끼들은 비유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이번에도 그냥… 문자 그대로의 의미 아냐?’
그냥 직관적으로. 존나게 미친 듯이 강력한 ‘검’ 계열 무기를 준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얘기가 그렇게 되자, 나는 처억. 놈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줘봐라. 칼인지 뭔지.”
“싫은데.”
단호한 거절이 나왔다. 단호박인 줄 알았다.
하도 단호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냥. 내가 싫으니까. 나중에 하자, 나중에.”
“…….”
“좀 더 결정적인 타이밍이 오면, 그때 이 몸이 폼 나게 도와줄 예정이다. 그러니 지금은 안 돼.”
이 새끼가?
당당하게 노예 선언 할 때는 언제고. 세상천지 어디에 이렇게 영혼이 자유로운 노예 새끼가 다 있냐.
내가 미간에 한껏 골을 패고 있자니. 보팔은 이죽거리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갑주와 검과 방패. 그리고 심장과 불꽃. 이게 최종적으로 네가 받아내야 할, 나머지 육사도의 다섯 유물들이다.”
“…유물이라고.”
“그래. 보자, 우선 <갑주>는 이미 그 옆의 계집한테 받았을 테지?”
흘깃. 보팔과 내 시선이 동시에 이브에게 향했다.
무시무시한 탐욕에 찌든 사념파를 열렬히 보내는 이브가 보인다. 그에 보팔이 오한을 느꼈는지 흠칫, 몸을 움찔거렸다.
놈이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려버렸다.
“크, 흐흠. 애초에 그랬으니 내가 나올 수 있었겠지. 이건 너무 당연한 소리였구만.”
“……?”
그건 좀 흘려듣기 어려운 말이다.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보팔은 내 정지 사인을 곧잘 알아듣고 말을 멈췄다.
나는 천천히 메가폰에 입을 갖다 댔다.
“방금 그 부분. 자세히 설명해 봐라.”
“왜 또. 뭐가 맘에 안 들었는데?”
“방금 네 말은. 내가 이브한테 혈천갑을 받았기 때문에… 네가 내 앞에 나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잘 들었구만. 그게 뭐 어쨌는데.”
보팔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해 왔다.
그 태연한 긍정에 숨을 삼키는 한편. 나는 재차 황급히 메가폰을 입에 가져갔다.
“너희들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정해진 순서가 있는 거냐.”
“등장하는 순서? 그것까지는 모르지. 그건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이 될 수도 있다고.”
“그건, 방금 말과는 앞뒤가……!”
“물론 최종적으로 네게 어떤 육사도가 귀속되는가. 그 순서는 처음부터 철저히 정해져 있었다. 옥좌야.”
“……!!”
퍼뜩.
이브를 목격한 즉시 자살하는 던전 마스터 에티가 떠오른다.
그리고 모종의 ‘준비’가 되지 않아 계속해서 부활하던 주저앉은 광대. 그놈도 추격하듯이 떠오른다.
“네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구나. 등장 순서도 정해진 게 있긴 하지. 딱 한 명만.”
거기서 피식. 문득 보팔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놈의 똘망똘망한 붉은 눈이 나와 이브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것만으로도 놈이 말한 ‘한 명’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브. 하트 여왕의 눈물이냐.”
“그래. 저 계집만큼은 반드시 맨 첫 번째에 등장하도록 설계돼 있어. 저 살아있는 보석이 모든 육사도를 깨우는 최초의 방아쇠니까.”
“…….”
“그렇게 정해져 있었어. 처음부터 그리 설계돼 있다.”
그 설계자는 아마도 의지의 화신일 테지.
입 안이 바싹 타는 듯하다.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거린다.
나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어거지로 열었고.
“그러면 혹시… 이브가 내 앞에 처음 나타나는 조건. 이건 알고 있냐.”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눈앞의 저 험상궂은 토끼는, 생긴 건 무식해 보여도 아는 게 많은 듯하다. 왠지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뭐, 당연히 그 정돈 알지.”
보팔은 내 기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척. 보팔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내 미간을 똑바로 향했다.
“너. 바로 네가 트리거다. 옥좌야.”
“…나?”
“옥좌의 주인이 시간 동결의 저주를 정확히 999번 반복할 것. 그게 최초의 트리거인 것 같던데?”
“!!”
머릿속에 누군가 표백제를 뿌린 듯하다.
하얗게 질린 사고 위. 끈적한 목소리가 유유히 흘러갔다.
“자네의 영원회귀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베르페아노의 목소리다.
숱하게 반복한 자살런 덕분에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세계 노친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 진정한 목적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진정한 목적.
내 영원회귀의 진정한 목적. 그게 지금 밝혀졌다.
저 토끼의 말에 따르면, 영원회귀의 목적은 바로…….
“회귀를, 999번 동안… 반복하는 거라고?”
“그래. 쉽게 말하면 그거지.”
그냥 죽고, 살아나고.
다시 죽고 살아나고. 또 죽고 살아나고. 그걸 999번이나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그 999번의 반복 자체가, 내 영원회귀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
악의.
나를 둘러싼 집요한 악의를 느낀다.
숨 막히는 광기가 목을 조른다. 잠시 숨을 삼키기가 어려워졌다.
“이번 왕은 취향이 독특하고 과격하구만. 이딴 정신 나간 조건을 최초 트리거부터 걸다니. 보통은 달성하기 전에 정신이 으깨지지 않나?”
“…….”
“그걸 또 보란 듯이 달성해낸 네놈도 정상은 아니야. 흐흐. 일단 근성은 마음에 든다, 옥좌야.”
“…….”
앞에서 보팔이 제 좋을 대로 떠벌리기 시작했지만. 지금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내 대신, 터벅. 이브가 한 걸음 성큼 나왔다.
“토, 토끼야. 안녕?”
그리고 조심스럽게 보팔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