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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53화 (153/235)

153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

“어디, 그럼.”

털퍽. 나는 침대 옆의 마룻바닥에 대충 주저앉았다. 그리고 허공을 찢어 인벤토리를 연 뒤, 그 안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 꺼내고 싶은 아이템은 세 개.

‘머리. 몸통. 다리. 다 나와라.’

차례대로 강렬하게 연상한다.

그러자 물컹. 손아귀 안으로 뜨듯한 체온을 머금은 무언가가 쥐어졌다.

“뭐가 나오는지. 한번 까보자고.”

스르륵. 이윽고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세 개의 흰색 털 뭉치들.

‘귀머거리 토끼’의 토막 난 파츠들이었다.

“보자.”

예리하게 잘린 머리와 몸통의 절단면을 맞붙이고. 하나뿐인 다리도 있어야 할 곳에 접합해 보기 시작했다.

프라모델 맞추듯 파츠를 대충 짜맞춘 다음, 바닥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빠, 그거 뭐야? 뭐 하는 거야?”

내 행동에 호기심이 든 것일까. 이브가 머리를 불쑥 들이밀며 기웃거렸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

“이게 내가 줄창 자살한 이유다.”

“헤에? 이게? 그럼 이거, 중요한 거겠네?”

“그렇겠지. 아무래도.”

“이게 대체 뭔데?”

그 질문에 잠깐 또 고민에 빠져야 했다.

이내 어떻게든 말을 조합한 나는 긴가민가 대답했다.

“이세계 유사 토끼의 토막 난 사체…라고 해야 하나.”

“으흐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미안. 나도 잘 모르겠다.”

“푸흐.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아빠.”

털썩.

이브는 결국 침대에서 기어 나와 내 옆에 착석했다.

중요한 거라 그러니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호기심 잔뜩 어린 눈이 바닥에 널브러진 토끼의 토막들을 빤히 쳐다본다.

“…….”

“……!”

미약한 긴장 속에서 침묵이 이어진다.

그렇게 둘이서 나란히, 얼마나 ‘귀머거리 토끼’를 주시했을까.

“……?”

“으음?”

우리는 거의 동시에 의문을 느꼈고. 의아한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의문을 먼저 입 밖으로 낸 건 이브였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그러게.”

그렇다.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귀머거리 토끼’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기껏 다 모아서 합쳐놨는데,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으응, 아빠. 그런 거였구나?!”

별안간 이브가 득의양양한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내 쪽으로 은근한 시선을 쏘아보내기 시작했다.

툭툭. 그녀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여기서 뭔가를 더 하는 거지? 그치?”

“음?”

“나 놀래키려고 일부러 안 되는 척하는 거잖아? 안 속는다고!”

“…음.”

이브가 한껏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어쩌지. 저렇게까지 기대하는 눈초리니, 뭐라도 보여줘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환상의 똥꼬 쇼라도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에 이브가 박차를 가해왔다.

“이대로 끝은 아닐 거 아냐? 아빠, 이제 뭐 어떻게 되는데?!”

“…….”

“응? 아빠. 뭐 해야 되냐니까?”

“…글쎄.”

“엥? 글쎄? 글쎄라니?”

이브가 붉은 눈을 땡그랗게 떴다. 여기서 설마 ‘글쎄’라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해봤다는 듯이.

“아빠. 설마, 아빠도 몰라?”

“…모르지.”

“…….”

이브의 붉은 시선이 따갑게 꽂힌다.

그렇게 한심하게 쳐다보지 마라. 나라고 모르고 싶어서 몰랐겠냐.

‘비슷한 걸 전에 해봤어야 말이지.’

나도 지금 맨땅에 헤딩하는 처지다.

던져진 몇 개 힌트들 개처럼 허겁지겁 주워 기웠고. 이제야 간신히 여기까지 다다랐을 뿐이라고.

‘그냥 파츠 세 개 모으면… 알아서 합쳐지는 거 아니었나.’

어쨌든 나는 귀머거리 토끼를 빤히 내려다봤다.

상태창엔 분명 ‘세 파츠를 모으면 진정한 모습이 현현한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 외 다른 조건이 표기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조건은 다 갖춘 게 분명하다.

“…아니. 상태창. 그러고 보니.”

퍼뜩! 그제야 뇌리를 후려치는 생각 하나.

나는 토끼의 토막 중에서도, 머리 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기 시작했다.

‘내가 상태창을 본 건 토끼발이랑 토끼몸통. 둘뿐이었잖아.’

불찰이다.

왜 나는 멋대로, 나머지 하나의 상태창도 똑같을 거라고 단정 지었을까.

어쩌면 유일하게 확인을 안 한 나머지 파츠. 머리 쪽의 상태창에… ‘귀머거리 토끼’를 깨우는 방법이 적혀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나와라.’

거지발싸개 같은 조건들이 더 붙어있는 것만 아니길.

그런 염원을 간절히 떠올리길 잠시. 삐빅, 머리 파츠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보팔의 머리(The Vopal Head) (S급)]

[타입: ???/보조]

[효과: 지금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효력 범위: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상세: 킬러 래빗 ‘보팔’의 토막 난 머리. 나머지 2개의 파츠를 모으고 보팔이 좋아하는 음식을 진상하면, 영원한 죽음을 초월하여 잠에서 깨어난다.]

“…찾았다.”

순간 흥분한 나머지 육성으로 중얼거렸다.

의식이 필요한 거였다. 육신이 갈기갈기 토막 난 저 토끼를 부활시키려면, 일종의 의식 같은 걸 진행해야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귀머거리 토끼… 보팔이 좋아하는 음식을 진상할 것?’

아니. 무슨 한국식 제사 지내냐?

토끼 머리고기 앞에 음식 차려놓고 의식을 치르라니.

순간 황당해서 헛숨을 들이켰는데. 이내 더 큰 문제점이 떠올라 정신이 아찔해졌다.

‘저 새끼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어떻게 아는데.’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일단은 대가리나 굴려보자. 내 상식선에서 토끼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라 하면…….

“…당근. 역시, 당근인 건가?”

모름지기 토끼라면 당근을 좋아해야 인지상정. 어렸을 때 유명했던 한 토끼 만화로 얻은 지식이었다.

그런데 내 혼잣말을 들은 이브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당근? 아빠. 갑자기 당근은 왜 찾아?”

“아. 그게…….”

이브에게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내 목적이 이 토끼를 부활시키는 것이라는 점. 이 토끼가 살아나려면 모종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이 토끼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내야 한다는 점까지.

“토끼라면 무조건 당근을 좋아하게 돼있지. 이 바닥 국룰이다.”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이며 나만의 동심을 설파했다.

하지만 이브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당그은? 저 애가, 당근을 좋아할까아?”

“…왜. 아닐 것 같냐.”

“응. 내 생각엔 아닐 거 같아, 아빠.”

이브가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표정은 영 아리까리하지만, 행동은 기묘한 확신에 차있다. 묘한 반응에 나는 눈썹을 슬쩍 틀어 올렸다.

나는 약간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으음. 근거? 이유는 딱히 없어. 그냥, 왠지 그럴 거 같다고 할까……?”

이브는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있어서, 나는 이브의 ‘근거 없는 직감’이 꽤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이미 학습한 상태.

근거가 없다 하여, 절대 그녀의 말을 좌시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유는 때려치우고. 당근 말고, 이 친구가 뭘 좋아할 거 같냐.”

“으음. 내 생각을 묻는 거야?”

“그래. 아무거나 괜찮아. 당장 떠오르는 걸 말해봐라, 이브.”

“내 생각엔…….”

이브가 턱 주변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나름 육사도 중 하나. <귀머거리 토끼>인 보팔과 동창생(?)이다.

단서랄 게 마땅히 없는 지금, 믿을 건 이브의 직감뿐이었다.

“네 생각엔. 뭐냐.”

안달이 난 나머지 이브의 어깨를 부여잡았고. 살짝 닦달했다.

마침내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더니.

“…담배…일까?”

쿠당탕!

곧장 자리를 박차고 현관문을 열었다.

타타탁! GU 편의점으로 향하는 슬리퍼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 * *

담배는 ‘음식’의 범주에 속하나?

일단 한국의 법률상 ‘기호식품’으로 분류되니, 음식 맞는 건가?

나도 물론 의문이 줄기차게 들었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온 내 손에는 이미, 편의점에서 사온 수십 갑의 담배가 들려있었다.

“여기서 파는 담배. 종류별로 한 갑씩 다 주십쇼.”

그 말을 내뱉었을 때, 편의점 알바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우수수! 엄청난 양의 담배를 방바닥에 쏟아내자, 이브도 헛숨을 들이켰다.

“히엑. 겁나 많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이브를 뒤로한 채 담배를 하나씩 뜯기 시작했다.

처척, 처척. 그리고 한 개비씩 토막 난 토끼의 시신 앞에 정성스레 내려놓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네.’

여간 우스운 내 꼬라지에 조소를 흘렸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일단은 이브의 직감을 전적으로 믿어보자.

현시점에서는 이거 말고 뾰족한 방도도 없으니까.

“뭐, 일단 이러면 됐나.”

그렇게 수십 개의 담배 개비를 토막 난 토끼 앞에 늘어놨다.

팔짱을 단단히 끼운 채, 한동안 상태를 지켜봤다.

“…….”

“…….”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정적이 꽤 길게 이어졌다.

“…….”

“……?”

달리 말하면, 꽤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그렇지. 역시 이브를 믿는 게 아니었나.

사람이 참으로 간사하게도, 그런 생각부터 무럭무럭 자라나던 그때쯤.

“으음, 주는 방식이 잘못된 걸까?”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수를 쳤다.

나는 담배를 치우기 위해 뻗었던 손을 우뚝, 정지했다.

“방식이 잘못됐다고?”

“으응. 그래서 저 애가 반응을 안 해주는 거 아냐?”

“그건…….”

담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발상은 애초에 배제돼 있는 이브였다.

‘담배’라는 독보적이고 생뚱맞은 발상이 대뜸 튀어나와서 그런가. 저 근거도 없는 확신이 은근히 신뢰가 가서 더 문제다.

그래서 이런 뻘짓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단 말이지.

“그러면 이브. 어떤 식으로 바쳐야 잘 바쳤다고 소문이 나겠냐.”

“으음, 불을 붙여서 줘보는 건?”

“…담배에 불을 붙여서 말이냐?”

“응! 원래 그렇게 먹는 거잖아? 담배 말이야.”

이브가 생글생글 웃으며 제안해 왔다.

좋네. 향도 피워라 이거지. 조금 더 한국식 제사에 가까워지긴 하겠다.

우리 이브도 한국인 다 됐군. 이 양아버지는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그래. 하자, 해.”

독이 든 성배를 마시려면 그릇까지 씹어 먹어야 하고. 기왕 애국가를 부르려면 4절에 뇌절,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까진 불러야 하는 법.

어차피 벌일 대로 벌여놓은 판이다. 어디까지 가나 보기로 했다.

“처먹어라, 토끼 년아.”

억하심정에 중얼거리는 한편.

나는 굳게 닫힌 토끼의 아가리를 벌린 뒤, 그 사이로 담배 한 까치를 무자비하게 쑤셔 넣었다.

“옜다. 불.”

파짓! 손끝에서 스파크를 튕겨 담배에 갖다 댔다.

섬광의 열기로 담배에 불이 붙었고, 이내 끝단부터 서서히 타들어 가며 진회색 연기를 사방으로 흘렸다.

작업을 끝마친 뒤. 나는 이브를 흘깃 돌아봤다.

“이제 됐냐, 이브.”

“음… 응!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지르고 나니 뒤늦게 현자 타임이 빡세게 왔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자괴감 어린 시선을 하염없이 방바닥으로 침몰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삐빅. 익숙한 전자음이 들려온다.

떨군 시선 앞에는 그런 패널이 솟아나 있었다.

“…뭐가 어째?”

퍼뜩! 반사적으로 고개를 다시 들었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귀머거리 토끼’에 시선을 고정했다.

[히든 던전 마스터, ‘킬러 래빗 보팔’이 영면에서 깨어납니다.]

푸스스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토끼가 문 담배에서 연기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로… 바로 옆에 있는 이브의 얼굴조차 분간이 안 된다.

“이건……!”

“켈룩, 콜록! 아우, 뭐, 뭐야? 앞이 안 보여, 아빠!”

나는 말문이 막혔고. 이브는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기침하기 바빴다.

고작 말보루 레드 한 까치에서 이 정도로 연기가 나올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지금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성공했다고?”

패널에 기재된 대로다.

의식이 성공해서 귀머거리 토끼가 부활한다. 이 막대한 연기는 그 전조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이게 왜 진짜냐고.”

이브의 직감이 들어맞았다.

저 빌어먹을 토끼의 소울 푸드. 담배가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잠깐.’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던 와중,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숨을 삼켰다.

방금 등장한 패널의 내용이 뇌리를 후려친 것이다.

“히든… 던전 마스터?”

한껏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자욱한 연기 너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키잉! 재빠르게 블라이스의 단검을 꺼내 쥐었다.

‘설마. 광대랑 비슷한 과냐?’

눈앞에서 부활하고 있는 육사도. ‘귀머거리 토끼’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가능성.

그런 불길한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광대처럼 갑자기 날뛰기라도 하면.’

한시라도 빨리 제압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게 안 된다면, 일각이라도 빠르게 자살해야 한다.

‘와봐라. 뭐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과 마음, 모두 단단히 준비를 끝냈다.

지금도 뭉게뭉게 솟아나는 연기의 발원지. 귀머거리 토끼가 있는 곳을 향해 단검을 겨누었다.

“아, 아빠? 갑자기 왜 그래……?”

“쉿.”

“……!”

이브의 입을 다물리는 한편.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자연스레 안전을 확보했다.

약간은 안심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으음. 담배 맛 좋네, 이거?”

연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나와 이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우리의 시선은 정확히 같은 방향을 겨누고 있었다.

“……!”

“모, 목소리가……!”

사박사박.

목소리 이후엔 발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가벼운 무언가가, 연기를 뚫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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